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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은 Dec 24. 2020

#4 욕심 내려놓기

부모는 그냥 되는 줄 알았다

  우리집 1호가 호기롭게 [달님 안녕] 책을 가져와서 내 앞에 펼쳐놓은 적이 있다. [달님 안녕]은 우리집 1호가 즐겨 보던 책이었다. 남편도 나도 외울 정도의 간결한 문장과 큼지막한 그림은 우리집 1호에게 매우 매력적인 책이었을 것이다. 몇 날 며칠 반복적으로 읽어줬더니, 이젠 스스로 책을 가져와서 펼치는 것이 아닌가. 뭘 할 작정인 것이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며 지켜봤더니, 1호가 책을 넘겨가며 그 글씨와 동일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우와~ 우리 아들 천재인가 보다 하고 순간 머리끝까지 피가 쏠리면서 뜨거운 기운이 돌았다. 아마도 놀라움과 동시에 흥분했던 게 아닌가 싶다. 


  꽤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본다 자부했던 내가, 처음으로 흥분의 도가니로 가게 한 사건이었다. 아이에게 연신 다시 읽어보라 여러 번 해도 우리집 1호는 책의 써진 글씨를 기가 막히게 그대로 읽어내는 것이 아닌가. 한 자 한 자 짚어가면서.


  이제 겨우 2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전인데 말이다. 오 마이 갓! 남편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남편이 퇴근해서 돌아올 때까지 다른 책도 펼쳐보며 아이에게 “이거 보여? 여기에는 뭐라고 쓰여 있어?”하며, 나름의 테스트를 해봤다. 


  물론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달님 안녕] 책을 제외하고는 말간 눈망울로 ‘엄마 왜 그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는 눈으로 그저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맞다. 나는 누구나 겪는다는 ‘우리 아이 천재인가 봐’를 경험한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냉정한 마음을 되찾은 후, 남편과 나의 결론은 이랬다. 우리집 1호가 좋아하는 [달님 안녕] 책을 반복적으로 읽어주자 그림을 머리에 각인했고 그 그림을 보면 엄마의 목소리 톤, 제스처, 강조한 악센트를 통해 아이는 손쉽게 내용을 입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집 1호는 천재가 아니라 그저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잘 기억해 둔 거였고, 시각적인 자극과 청각적인 자극의 절묘한 연결이 이루어낸 성과를 보여준 거였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던 것이다. 부모의 욕심이 순식간에 가동되는 순간을 경험했을 때, 나는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하늘 끝까지 치닫는 것을 경험했고, 아이에게 무엇이든 들이밀었던 것이다. 잠깐이지만, 선행교육에 열을 올리는 사교육장 세계의 부모 경험을 잠시 한 듯한 느낌이었다. 평소 선행학습에 대해 ‘내겐 그런 열정이 없어. 그것도 다 에너지 넘치고 열정 넘쳐야 할 수 있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남의 나라 얘기하듯 했던 내가. 잠시나마 그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정신줄을 잡아야 했다. 이렇게 평소 내가 하지 않던 행동이나 생각은 언제든지 침투한다는 것을.


  아이가 나의 엉망진창의 삶을 보상이라도 해주는 존재처럼. 나의 실패를 아이를 통해 이루어내려는 욕심을 거둬야 한다. 내겐 그런 것이 없었다고 여겼지만, 실제는 아니었다. 지금껏 ‘나’로 여겼던 모습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 사소한 에피소드에서 절절히 느꼈다. 이러한 자각이 매일 매 순간 일어나는 것이 바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얼마나 모순적인 인간인지, 내가 얼마나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인지 말이다.


  첫째 아이에게 유독 목메어 ‘완벽’을 요구하는 부모들이 많다는 건,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 완벽히 해내고 싶은 마음, 그런 좋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거였을 거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그건 ‘나의’, ‘부모의’ 욕심이라는 것을.


  1호를 키우면서 이런 순간이 많았다. 숫자 10을 한글판, 영어판 모두 만 2살이 되기 전에 말했을 때, 다시금 부모의 욕심이 슬금슬금 올라오기도 했더랬다. 어디 그뿐인가. 찍찍이 한글판에 자신의 이름을 배열한 것도 모자라, 만 3살이 되기도 전에 가족 모두의 이름을 삐뚤빼뚤 손 글씨로 써냈을 때는 ‘영재’ 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심각하게 고민도 했더랬다(사실 영재 테스트 권유도 받았더랬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부모가 함께 정한 ‘양육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흔들리는 나 자신에 대해 믿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름 아동심리전문가라 하는 나도 이렇게 흔들리는데, 다른 부모들은 얼마나 흔들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허나 그 흔들리는 와중에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흔들림은 중요하다’는 거였다. 흔들린다는 건 그래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우린 그저 ‘혼란스럽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거였다. 흔들리는 것과 다르게 ‘혼란스러운 것’은 기준이 없는 것을 의미하니까. 적어도 흔들리는 부모는 ‘양육 철학’이 있고, 그 철학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 자각하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깨어있는 부모로의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수많은 유혹에 한두 번 넘어졌다고 스스로 자책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장거리 레이스와 같은 양육에서 살아남는 정신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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