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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은 Dec 24. 2020

#3 새로운 ‘나’로 전환모드

부모는 그냥 되는 줄 알았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고 놀랐다. 화장기 없고 초췌한 여인이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전에도 화려하고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죽은 사람 같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이랑 같이 머리가 빠지고 나면서 지저분한 잔머리가 유독 거슬렸고 손질 안 된 머리는 마치 수세미를 연상케 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절망감마저 들었다. 게다가 출산 후 부기는 도대체 언제 빠질는지. 제때 씻지도 못하고 반쯤 풀린 눈으로 뛰어다니며 세월을 보냈더니, 그 모든 것을 증명이라도 한 듯 거울 속 여자는 마치 좀비 같았다.


  잠을 못 자는 것은 참을 만했다. 아이가 방긋거리며 웃을 때는 세상 행복이 다 나에게만 있는 것 같았고, 바쁜 중에도 아이 옹알이라도 보겠다며 연신 영상통화를 하는 남편의 모습도 꽤 귀엽고 애틋했다. 아이가 주는 기쁨은 우리가 가족이라는 충만함을 채워주는 것 같았고 이제야 진짜 삶을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문득문득 들었고 점차 억울함도 울컥울컥 올라왔다. 체력의 한계가 오면 짜증도 났고 늘 옆에 없는 남편은 내게 일거리를 잔뜩 안겨주고 홀로 도망간 배신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급기야 보상받지 못한 노동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알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내 안에서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 내 맘대로 갈 수 없고, 화장실 문이라도 닫으면 엄마가 사라진 줄 아는 녀석이 울어 젖히는 통에 화장실 문도 닫지 못한 채 볼일을 봐야 할 정도니. 마치 내가 인격적인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점점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러니 내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게 되었고 시들시들한 나무 같았을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남편 역시 당황스러웠으리라. 그도 역시 부모는 처음이고 어린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아빠의 역할이라는 것이 너무나 한정적이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조차 몰랐을 테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은 아버지가 되자마자 남편으로서 위기를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게 부모가 된 남자의 첫 번째 관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어린아이를 양육할 때 행복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아내를 즐겁게 해주는 것, 그게 부모가 된 남자의 첫 번째 미션 아니었을까.


  심각하게 고민을 해봤다. 나는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일까? 그 옛날 우리의 엄마들이 했다던 그 희생의 전처를 나 역시도 밟고 있는 것일까? 


결론은 ‘아니다’였다. 나는 달라지고 있었다. 아이를 위해 3시간마다 일어나고, 아이의 일거수일투족 예민하게 반응하고, 함께 웃고 함께 소리치고 함께 울었던 그 시간은 나로 하여금 부모가 되게 하는 시간이었다. 


  아이로 인해 나는 지금껏 소중하다 여긴 ‘나만의’ 것들을 잠시 미룰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것이 ‘우리의’ 앞으로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나는 서서히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출산 때, 나와 아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서워 벌벌 떨면서도 견뎠던 남편처럼. 나 역시도 아이를 양육하면서 ‘견딤’의 시간을 통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행하는 부모로서의 내 모습은 거저 얻어낸 것이 아닌, '내 선택’‘자발적 견딤’을 통해 얻어진 값진 시간이고 경험이었던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억지로 떠넘긴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자발적으로 부모가 되기로 ‘선택’한 나의 값진 시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견딤’은 필수였기에. 나는 성숙의 길에 이제 막 들어선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은 성장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므로. 꽃길만 걷는 성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아이를 위해 부모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의 성장을 위해 아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부모가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위치적 우위성을 선점하는 건 매우 몰염치가 아닐까? 나이 든 사람이 다 어른이 아닌 것처럼, 아이를 양육한다고 다 '부모 됨'이 있는 것은 아닐 테니. 이제 나는 아이를 통해,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 그 시간에서 견뎌야 하는 것들로 인해 '부모 됨'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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