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극복이라는 위험한 유희 — 위버멘쉬 003

by 사색하는 공학자

“지난 글에 이어, 작가 신청 당시 제출했던 세 번째 원고의 주제를 나눕니다. 사유의 주제 중 111번째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다음 글부터는 [위버멘쉬]의 첫 번째 기록(001번)으로 돌아가, 저의 사색 프로젝트가 시작된 그 지점부터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묘한 존재입니다. 생존에 유리한 편안한 길을 놔두고, 굳이 험한 산을 오르거나 가혹한 절제를 선택하며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곤 합니다.


니체는 이러한 금욕과 자기 통제의 이면에 ‘자기를 이겨냈다는 성취감’이라는 독특한 심리가 숨어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겉으로는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인간은 기묘한 권력감과 만족감을 느낍니다.


자학조차도 자신을 증명하려는 ‘의지’의 한 형태라는 서늘한 분석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나 역시 ‘완벽’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살았습니다. 세 개의 학위를 따고 전문가로 인정받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나 자신을 외부에 증명하는 것이 승리하는 인생이라 믿었습니다.


최근 신학 공부라는 거대한 중압감에서 해방되었을 때, 매주 쏟아내야 했던 영문 에세이의 굴레를 벗어나 날아갈 듯했던 기분도 잠시였습니다.


나는 어느새 다시 낯선 니체의 잠언을 읽고, 파이썬(Python) 코딩을 배우며 나를 또 다른 시험대에 올리고 있습니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지금은 학점 걱정은 없지만, 무너진 일상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몸부림임은 매한가지입니다.


내 안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너는 아직 건재하다”, “이 나이에도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몰아붙여 얻는 성취감이 잠시의 쾌감을 줄지는 몰라도, 생물학적 항상성을 무너뜨린 대가는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제가 니체가 말한 그 ‘자기 극복의 유희’에 너무 깊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경계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방글라데시의 거친 현장에서 보았던 생존 투쟁보다, 어쩌면 스스로를 끝없이 채찍질하는 현대인의 ‘자발적 고난’이 더 치명적인 질병일지도 모릅니다.


71세에 새로운 일터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할 준비를 하고 코딩을 익히는 나의 도전 역시, 그것이 다시 ‘나를 증명하려는 강박’이 되는 순간, 나는 또 다른 감옥의 문을 닫고 들어가는 셈입니다.


니체는 종교인의 겸손조차 자기만족을 위한 위장된 강함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만약 나의 자기 부인이 “나는 이만큼이나 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자부심의 근거가 된다면 니체의 말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적 자기 부인은 나를 단련하여 초인이 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주권이 나에게 없음을 인정하고, 나의 ‘통제 욕구’ 자체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완벽이라는 감옥을 나와

니체적 인간이 스스로 험산 준령을 오르며 자신의 강함을 확인한다면, 기독교적 인간은 자신이 그 산을 넘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절대자의 인도를 구합니다.


나약한 자신을 파괴하여 초인이 되려는 위험한 유희를 멈추고, 이제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광야의 평안을 선택하려 합니다. 완벽주의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와, 이제야 비로소 나만의 속도로 숨을 쉽니다.



참고 도서: 『위버맨쉬』, 프리드리히 니체 저 (어나니머스 역, 떠오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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