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 작가 신청 때 제출했던 두 번째 원고를 나눕니다. 전문가라는 높은 곳에서 보지 못했던, 낮은 곳의 숨 막히는 해상도에 관한 기록입니다."
지난 글에서 나는 71세의 나이에 다시 '허영심'이라는 엔진을 켜고 광야로 나아가겠노라 고백했다. 그 엔진을 달고 내가 가장 먼저 도달한 사유의 지점은 바로 '타인을 향한 시선'이다.
평생을 전문가라는 높은 곳에서 세상을 조망하며 살아왔던 내가 삶의 예기치 못한 경로 이탈로 벼랑 끝에 서 보니, 비로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명한 해상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스티븐 코비는 그의 저서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설명하며 지하철에서 만난 무책임한 아버지의 일화를 들려준다. 아이들의 소란을 방치하던 아버지가 실은 방금 아내를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목격자의 분노는 순식간에 깊은 연민으로 변한다.
타인의 삶이라는 이면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우리가 마주하는 현상이란 얼마나 기만적이고 저해상도인가.
학위를 마친 후 화학공학자로 25년 넘게 연구실과 현장을 지켰던 나는 이 현상을 ‘스케일업(Scale-up)의 함정’으로 이해한다. 실험실의 작은 비커 안에서는 미세한 불순물 하나가 전체 반응을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가 되지만, 수만 리터 용량의 거대한 산업용 반응기(Reactor)로 넘어가면 그 불순물은 수치상 무시해도 좋을 '오차 범위' 내로 숨어버린다.
시스템이 거대해질수록 개별 요소의 고통과 결함은 배경 소음처럼 흐릿해지는 법이다.
후에 공중보건학을 공부하고 전문가로서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탄자니아 등의 빈민가를 가까이 경험했던 시절의 나 역시 이 함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가진 자'로서 그들을 도왔고, 많은 연민과 마음의 고통으로 아파하며, 구조적 모순에 분개하곤 했지만, 곧 보건 통계상의 사망률이나 유병률 수치에 일희일비하는 전문가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러나, 통계 수치 0.1%라는 ‘오차 범위’ 뒤에 숨은, 삶이 송두리째 무너진 한 사람의 비명은 거대한 보건 시스템의 해상도에는 결코 잡히지 않는 배경 소음일 뿐이었다.
최근 나는 인생의 예기치 못한 경로 이탈로 인해 주위에 경제적인 약자들인 기초생활수급자들의 물리적 이웃이 되어 그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도 아닌, 선진국 대열에 있는 대한민국 내에서, 벼랑 끝에 서서 본 가난은 이전의 내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층위의 것이었다.
가스비를 내지 못해 차가운 방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인 이의 절망, 가난의 굴레를 영원히 지속하게 만드는 복지 정책의 모순된 규정들….
단 한 번도 이 벼랑 끝에 서 보지 않은 이가 던지는 위로는 얼마나 가볍고 무력한가. 전문가의 차가운 데이터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살아있는 가난'의 숨 막히는 해상도가 여기 있었다.
니체는 그의 통찰 속에서 부자가 가난한 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악의가 아니라 단지 '감각의 부재'일뿐이라고 말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의 무게가 다르기에, 이해할 수 있는 감각이 없는 상태에서의 무심함은 죄가 아니라는 논리다.
그러나 나는 니체의 이 서늘한 진단에 차마 동의할 수 없다.
성경적 관점에서, 그리고 내가 소위 개발도상국에서와 우리나라에서 마주한 척박한 현실에서 볼 때 '무관심'은 결코 무죄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하고도 정교한 악(惡)의 일종이다.
사회라는 유기체 안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이웃을 '나의 시스템' 밖으로 밀어내고 시야에서 지워버리는 것, 그 무감각 자체가 인간의 근원적인 죄성에 기인한 악함이기 때문이다.
나사로의 고통을 외면했던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그가 악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대문 앞에 누운 형제를 보면서도 ‘보지 못한’ 무감각함 때문이었다.
비록 지금의 내 처지가 당장 나아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고난은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스펙트럼'을 선물했다.
이제 나는 부유한 자의 거시적인 시선이 아닌, 낮은 곳에서만 보이는 미세한 떨림과 눈물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과거 앞에서 언급했던 나라들의 빈민가에서 보았던 헐벗은 아이들과 그 너머에 세워진 골프클럽과 초호화 저택의 극명한 대비가 스냅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때 나는 그 장면들을 글로 옮길 역량이 부족하다며 아예 기록하기를 포기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글쓰기란 화려한 수사법의 잔치가 아니라, 내가 목격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정직한 고백이라는 것을.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공명하는 ‘긍휼’의 회복이야말로, 이 사막 같은 세상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진정한 회복탄력성의 시작이다.
나는 오늘도 낮은 곳의 해상도로 포착한 기록들을 정리하며 노트북 앞에 앉는다. 타인의 신음을 배경 소음으로 치부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기에, 광야에서 써 내려가는 이 사색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참고 도서: 『위버맨쉬』, 프리드리히 니체 저 (어나니머스 역, 떠오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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