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시절의 기억

by 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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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시절




대학원성적2.jpg 이전에 내 개인블로그에 올렸던 대학원 시절 내 성적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성인이 되서도 꽤 오랜시간 꽤 가난한 삶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엔 나름 풍족하게 지냈으나, 그 이후로는 내 방 없이 산 삶이 약 18년쯤 되니 내 가난에 토를 달 사람은 아마 없을 것 같다. 그 기간 동안 방 없이 지낸 것은 내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내 동생 각각 아빠와 엄마와 같이 방을 쓰는 삶을 오래도록 살았다.


처음 그 집에 이사갔을 때는 우리가 그 집에서 그렇게 오래살게 될 줄은 몰랐다.


집 주인의 심보도 고약했고, 집도 좁았다.


집이 좁은 것은 둘째치고 이 좁은 집 조차 우리 가족의 명의가 아니란 것이 더 개탄스러웠다.


집주인을 통해 별의 별 사건을 다 겪으며 내 집 없음의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강원도에 이사가서는 우리 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생겼다.

서울에서의 집보다도 훨씬 더 컨디션도 좋았다.


누군가가 서울 어디 사냐고 물어서 송파나 잠실이라고 대답하면, 다들 "와! 너 되게 좋은 데 사는구나!" 라는 비슷한 답들이 돌아왔다. "어디 아파트 살아?"라는 대답에 솔직하게 "나 아파트 안 사는데." 라고 대답하면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스무살 때 동기도 있었다.


그 뒤로는 웬만하면 잠실 산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돌려서 송파 산다 이런 식으로 돌려 말하곤 했다.









아무튼 나는 가난했지만, 가난했기에 더 삶이 간절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시기의 10대, 20대 시절도 보내왔고 -

별의 별 사건을 다 겪었다.


내 현재의 얼굴을 보면 전혀 상상하지 못할 세월의 풍파를 많이 겪었다.


그런 풍파를 겪으면서 물론 지쳐 쓰러질 때도 있었지만, 그 세월을 견뎌내며 내 내면은 단단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스무살 때부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구했던 나는, 그 이후로도 쭉 20개 이상의 아르바이트와 일을 해왔다.


편의점, 빵집, 드럭스토어, 다양한 카페, 양초/디퓨저 가게 판매직원, 방문미술 강사, 초등학교 협력교사, 키즈카페 아르바이트, 아이스크림 가게 직원, 국어 과외선생님, 방문미술 S지사 부지사장 등의 일을 해오며 허투루 한 일은 하나도 없다.


일을 하며 항상 진심으로 사람을 대했고, 내 잘못이 아닌 일로 고래고래 화내는 진상 고객을 때로 만나도 훗날 내 경험으로 써먹겠다는 마인드로 임했다. 어디 회사에 지원을 하더라도 자소설이나 거짓 이력서가 아닌 진짜로 내가 겪고 행했던 일들을 이력서에 적어 하나하나 진심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거짓들은 결국 사람들이 직접 겪어보면 뽀록 나고 마니까.


그런 경험들을 통해 인간상에 대해 많이 배웠다.


그리고 사람 대하는 법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배워갈 수 있었다.


약해보이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들은 강하게 대했고, 자신 보다 강해보이는 사람에게 그런 사람들은 비굴하게 굴었다.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나의 반면교사로 삼았다.


'내가 내 인생에서 부자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훗날 부와 권력을 쥘 수 있는 사람이 되어도 절대, 절대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어떤 사람은 그런 사람을 겪으며 다르게 생각한다.

나도 똑같이 다른 약자한테 대해서 복수해야지 하고.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누군가 나를 무시해도, 나는 결코 그런 우스운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았다.


훗날 나는 방문미술 부지사장으로 일하며, 월 500-700까지 벌기도 하고, 대학원 시절 했던 아르바이트 최저 시급으로 약 910만원 이상의 돈을 모아 성적장학금을 포함해서 등록금에 보태기도 했다.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고 등록금에 최대한으로 보태기 위해 최대한 싼 음식을 찾던 시절이었다.


삼각김밥 같은 것을 먹고, 점심시간 마저 아껴 근처 카페나 교보문고에 가서 책 읽으며 공부했다.


나는 그 시절 몸은 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했다.


비록 하루 8시간씩 주 6일이나 몸을 갈아넣어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직업이었기에 저녁 때 하는 대학원 공부가 힘들기도 했지만 - 그만큼 행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공부 마저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다.


나는 공부하고 배울 수 있음에 너무 행복하고 감사했다.


비록 동기들이 대체로 여유로운 집안환경을 갖고 있었기에 -

아르바이트나 일을 병행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들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부러워 눈물 흘리며 공부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때의 내 생활이 부끄럽지 않다.


나는 재밌게 공부했고, 웬만하면 성적으로 누구에게 지고 싶지도 않았다.


덕분에 졸업할 때는 성적우수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학기 내내 등수가 따로 성적표에 나오진 않았지만, 아마 나는 최우수상이 아니고 우수상인 것을 보면 과 2등이 아니었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확실치는 않음)


1년 반 내내 서 있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이후로 수많은 다른 일들을 하며 일궈낸 성적이니 나는 결코 부끄럽지 않다.


고스란히 성적장학금까지 등록금에 보태는 나를 보며, 사촌동생은 내가 착하다고 했다.


자기 같으면 그 돈으로 해외여행을 갔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여유조차 없는 사람이었는걸. 그 말엔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냥 웃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여러 경험들을 했던 나에게, 삶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면 안되는 그런 소중한 것이었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미안해서 지금 죽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미안해서라도 지금도 포기할 수가 없다.


지금의 나는 요즘 미술교습소 원장으로 일하며 그 밖에도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가끔은 당장 낼 월세가 걱정이 될 때가 있어도, 내가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교사임을 자부한다.


무조건 공부만 하라, 그림만 그리라 강요하지 않는 선생님을 자부한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기 싫은 마음을 먼저 공감하고 읽어주며, 그 아이들에게 공부의 필요성을 직접 느끼게 해주는 선생님이고 싶기에, 오늘도 나는 내 자리에서 묵묵히 아이들을 만나며 스스로 공부하고 있다.


'열심히 살면 적어도 후회는 없더라' 라는 것이 가난이 내게 슬며시 들려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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