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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osophers needlework May 10. 2023

 나는 잘 버티어 낸 것 같다

 - 코로나 단상(斷想)

 세계보건기구(WHO)가 2023년 5월 5일에 코로나19에 대한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 선언’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코로나19의 대유행 초기인 2020년 1월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언한 지 3년 4개월 만이다. 바이러스의 주요 특징인 변이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세계보건기구가 ‘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는 신중하지만 사람들은 사실상의 팬데믹 종식(엔데믹) 선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2020년 1월 말쯤 한국에서 첫 번째 코로나 감염자가 나왔을 때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한두 달 그러다 말겠지 했다. 모르면 용감한 법이다. 그런 마음으로 계획했던 대로 2월 초에 밴쿠버에 갔다. 내가 출국할 때만 해도 캐나다는 코로나19 청정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지인들은 이 시기에 출국하는 나를 부러워하였다. 내 뜻과 상관없이 나는 코로나가 창궐하는 조국을 버리고 피신하는 팔자 편하거나 비겁한 백성이 되었다.


 봄철 황사 심한 날 쓰려고 사 두었던 마스크를 쓰고 인천공항에 갔는데 아주 많이 한산했다. 덕분에 출국 수속은 빨리 끝났다. 기내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스크를 쓴 것이 오히려 눈총을 받았다. 식사할 때를 빼곤 계속 쓰고 있다가 밴쿠버에 도착할 때쯤 벗었다. 밴쿠버 입국 수속 때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오히려 입국을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심란했다. 아시아인은 일단 모두 중국인으로 보는 분위기라서 조심해야 했다.  

    

 무사히 입국 절차를 마치고 밴쿠버 시내에 도착해 보니 코로나로 인한 위협은 느낄 수 없었다. 과연 청정지역인가 싶었다. 밴쿠버 공립도서관 견학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안내도 받고 YWCA 체육관에 회원 등록도 했다. 열심히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리라 굳게 결심한 터였다. 맛있는 커피집도 찾아야 했고 커뮤니티도 알아봐야 해서 바빴다.     


 나는 커피 때문에 코로나 팬데믹을 실감하게 되었다. 밴쿠버 다운타운에는 핸드드립 커피집이 많지 않았다. 직접 내려 먹으려고 로스터리를 찾아 커피콩을 사러 갔다. 40분 넘게 걸려 찾아간 로스터리는 문이 닫혀 있었다. 황망하여 문 앞에서 한참 서성이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알고 보니 로스터리 직원들이 한동안 문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커피콩을 사러 왔다는 사정을 듣고는 바쁜 가운데 커피 취향까지 물어가며 원두를 추천해 주었다. 신선한 커피콩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밴쿠버에 미친 코로나 바이러스의 기세는 대단했다. 3월 말이 되자 거의 모든 공공시설들과 식당, 카페가 문을 닫았다. 출입문 앞에 붙어 있는 종이에 ‘다음 안내가 있을 때까지 문을 닫겠다’라고 표현한 문구가 마음을 더 심란하게 했다. 거리에는 배달원이 많아졌다. SNS에는 식품매장 텅 빈 진열대 사진이 올라오고 상점들이 무기한 오프라인 영업을 중단하겠다는 이메일들을 보냈다. 아시안들이 테러당했다는 뉴스가 나와 외출하기가 겁이 났지만 이렇게 가만있다 굶어 죽는 거 아니야 싶어 식료품을 사러 가기로 했다.      


 식품이 부족하다니 여러 군데를 돌 각오로 동선을 정교하게 짰다. 장보기에 편리한 차림을 하고, 혹시 발이라도 밟힐지도 모른다는 각오에 튼튼한 신발을 챙겨 신고, 배낭을 메고, 장바구니 두 개를 챙겨 집을 나섰다. 가능한 많이 사 올 계획이었다. 길에서 사람들의 손에 들린 쇼핑 봉투를 보며 혹시 내 몫이 없으면 어떡하나 싶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마트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붐비지 않았고 텅 비어 있지도 않았다. 당장 식재료를 사지 못해 굶을 지경까지는 안 갈 것 같았다. 그래도 평소보다 매대 공간이 많이 비어 보이기는 했다. 파스타, 쌀, 통조림, 냉동식품, 가공육, 계란이 거의 없어졌다. 유기농 식품 코너에는 좀 더 많이 남아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한동안 유기농 식품으로 건강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도 식재료가 없어 굶는 일은 없었고 화장실 휴지가 떨어져 고생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일상적이지 않은 일들이 생길 때면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가 이걸 보았으면 뭐라고 하셨을까. 우리 엄마에게 서양 사람들은 다 미국 사람이었다. 엄마는 미국 사람들이 뭘 먹고 사는지 몹시 궁금해하셨지만 결국 시원한 답을 못 듣고 돌아가셨다.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곳의 습성을 현실에 가깝게 설명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먹는다고 설명해 드렸다. 엄마는 세계 여러 나라의 갖가지 음식을 먹는다는 내 대답을 탐탁스럽지 않아 하셨다.     


 당신은 80년이 넘도록 끼니마다 거의 쌀을 드셨기 때문에 아주 심플한 답을 기대하셨을까. 현대 한국인들은 쌀보다는 면이나 빵을 더 많이 먹는데도 여전히 한국인은 밥을 먹는다고 한다. 이처럼 미국인들의 주식은 빵과 고기라고 단순하게 알려 드렸으면 속이 좀 시원하셨을라나. 궁금증을 못 풀어드린 것이 마음에 걸렸어도 여전히 단순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위중한 코로나 시국에 드디어 답을 알게 된 것 같다. 위급한 순간에 사람들이 많이 사 쟁이려고 하는 먹을거리가 어떤 품목에 집중되어 있다면 그것이 주식이겠지 싶다. 엄마, 미국 사람들은 파스타랑 쌀을 먹고 살아요. 그러면 엄마는 미국 사람들도 쌀을 먹는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면서도 궁금함이 풀려 흡족해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또 반찬으로는 무얼 먹는지 물어보셨을 것이다.   

 

2020년 3월 18일 밴쿠버 다운타운 식품매장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트 안을 돌아다니다 휑한 매대에 이르러 나도 사진 한 장 찍어 두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살아생전 언제 또 이런 꼴을 보겠나 싶어(사실은 또 보고 싶지는 않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텅 빈 공간만 강조하게 되었다. 사실 전체 매장에서 빈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식료품이 똑 떨어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지금 보고 싶은 것을 편집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SNS에 올린 사진들도 이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SNS를 보고 마음이 흔들려 불안해진 나를 돌아보니 관용어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부화뇌동했구나. 부화뇌동(附和雷同)은 우레가 한번 쳤다 하면 천지만물이 이에 호응하듯이 연달아 덜컥거린다는 뜻이다. 이는 자신의 줏대와 기준을 망각한 채 이해와 관계에 따라서 혹은 무조건 남의 주장에 따르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말이다. 내가 방구석에 들어앉아 카더라 통신과 사진들을 보며 불안에 떨다가 사재기를 하려고 나섰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장바구니에는 오늘 당장 필요한 재료들만 들어 있어 평소보다 오히려 단촐했다. 괜히 무서워 말고(부화뇌동하지 말고) 보건당국에서 알려준 대로 개인위생에 주의를 기울이되 너무나 움츠러들어 있지 말고 살살 나가 돌아다니며 장도 보고, 꽃구경도 조금 하고 살아도 될 것 같은 배짱이 생겼다.

      

 나는 그 후로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6개월을 잘 살아냈다. 배짱대로 장을 보러 갔고 도시락을 싸서 한적한 계곡으로 소풍을 갔다. 지루한 식단에 변화를 주고자 가진 식재료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조리법을 연구했고 여행 유튜브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였다. 마트 전단지를 열심히 읽었고 드라마와 영화 시청으로 영어 공부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에서 유해진 배우가 쓰는 영어였다. 스쿼트 200개 챌린지를 하며 건강과 체력을 돌보았다. 스쿼트 자세가 틀렸는지 말근육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코로나가 시작될 때만 해도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무서운 확산세에 절망했고 백신 공급으로 다시 힘을 냈다. 백신의 면역 효과가 기대보다 짧아 반복해서 맞으면서도 바이러스에 맞서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몇 번의 재유행을 겪고 변이 바이러스가 계속 나오면서 이제는 코로나에 익숙해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보건기구의 공식 발표가 새로 안심을 주지는 못했다. 그보다는 내가 3년이 넘는 시간을 어떻게 견디어 왔는가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는 되었다. 나는 잘 버티어 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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