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사랑의 복잡한 감정과 인간 관계의 섬세한 역학을 그려낸 작품이다. 서른아홉의 실내장식가 폴, 그녀의 오랜 연인 로제,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젊은 청년 시몽 사이의 이야기는 마치 브람스의 음악처럼 애수와 열정이 교차하는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폴은 로제에게 완전히 예속된 사랑을 느끼며 앞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폴의 절대적 사랑과 달리 구속을 싫어하는 로제는 마음 내키는 대로 그녀를 만나고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불균형한 관계는 폴에게 깊은 고독을 안겨주며 그녀의 삶이 마치 끊임없이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 것 같은 결핍을 느끼게 한다.
그런 폴의 삶에 시몽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몽상가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의 젊은 청년 시몽은 폴에게 첫눈에 반해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펼친다. 그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에 폴은 오래전에 잃어버린 낭만의 기억을 되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관계에는 나이와 경험의 간극이 존재한다. 젊은 시몽은 자신의 순수한 열정으로 폴의 모든 상처와 외로움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젊음이 가진 눈부신 교만이다. 나이 든 여성의 복잡한 감정 세계와 깊은 결핍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인 것이다. 반면 폴은 세월을 통해 사랑의 덧없음을 이미 경험했으며, 시몽의 열정 앞에서도 그 사랑의 끝을 예감한다. 그녀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결국 시간 앞에 무너진다는 쓸쓸한 진실을 알고 있다.
결국 폴은 시몽이 아닌 로제에게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이는 단순히 안정을 택한 것이 아니다. 폴이 로제에게 돌아가는 것은 성숙한 사랑에 대한 이해의 표현이다. 시몽의 순수한 열정은 아름답지만 완전하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이었다. 반면 로제와의 관계는 불완전하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바로 인생의 진실이며 브람스의 음악이 전달하는 복잡한 아름다움이다.
폴은 시몽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재발견했지만, 동시에 그녀는 로제와의 관계가 지닌 깊이를 더욱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 로제의 자유로움과 독립성,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폴에게 돌아오는 그의 선택은 완벽하지 않지만 현실 속에서 가능한 가장 깊은 형태의 사랑이다.
소설의 제목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단순한 음악적 취향을 넘어선 상징이다. 브람스의 음악이 초기 낭만파의 순수한 열정을 뛰어넘어 더 복잡하고 깊은 감정을 표현하듯이, 폴의 선택 역시 젊은 시절의 순수한 낭만을 뛰어넘는 성숙한 사랑의 표현이다. 그녀는 사랑이란 완벽한 조화가 아니라 불협화음 속에서도 계속되는 관계임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남편과의 관계를 떠올리며 읽었다. 애인은 없으므로 삼각관계에 대입을 할 수 없어 아쉽기도 했다. 남편은 나를 사랑한다고 뜬금없이 말할 때가 있다. 나는 사랑한다고 대답하지 않는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어서다. 남편의 사랑 역시 그 정체를 이해하기 어렵다.(사랑한다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럼에도 나의 답을 요구하면 나는 아직 당신과 살고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래서였을까 작품 말미에 폴이 로제에게 돌아갈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랑은 복잡하다.
폴, 로제, 시몽의 삼각관계는 결국 우리 모두가 삶에서 경험하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와 성숙의 과정을 보여준다. 폴이 로제에게 돌아가는 결말은 낭만적 이상보다는 현실적 깊이를 선택한 그녀의 성숙함을 보여준다. 결국 폴은 시몽과의 일시적인 열정보다, 로제와 함께한 세월이 만들어낸 복잡하고 깊은 감정의 풍경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브람스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좋아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잊지 않을 거야." 폴이 말했다. 그녀는 그를 향해 눈길을 들 어올렸다.
"나 역시 잊지 않을 거야. 그건 다른 문제야. 다른 문제라고." 시몽이 말했다.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중간쯤에서 몸을 휘청하더니 그녀를 향해 일그러진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한 번 더 그를 품에 안고 그의 슬픔을 받쳐 주었다. 이제까지 그의 행복을 받쳐 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그가 부러웠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서 몸을 빼더니 짐을 놓아 둔 채 나가 버렸다. 그녀는 그를 따라 나가 난간 너머로 몸을 굽히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하지만 시몽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거기에 몸을 기댔다.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150쪽
《브람스를 좋아하세요...》프랑수아즈 사강 글, 김남주 옮김, 민음사 펴냄,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