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형도의 시집《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를 읽고
기형도의 시집《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독서 모임의 어떤 이는 ‘쏙쏙 와닿고 일상의 감사함을 불러일으키는’ 시라 하고, 어떤 이는 ‘뭔가 울림이 있는,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하는’ 시라고 말한다. 또 다른 이는 ‘시어에 시인의 삶이 담긴’ 시를 좋은 시로 여기며, 솔직한 누군가는 ‘시집을 사게 하는 시’라고 답하기도 한다. 이 모든 정의들 앞에서 나는 기형도라는 한 젊은 시인을 떠올린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파고다극장에서 한 젊은 시인이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기형도, 스물아홉의 나이였다. 그는 평소 혈압이 높았고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 그의 시에는 죽음과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기형도의 삶은 좋은 시의 조건들을 몸소 보여주는 증거 같다. 연평도에서 태어나 광명시 소하동으로 이주한 그의 어린 시절은 동화 속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절박한 삶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뇌졸중, 공장을 다니던 누나의 이른 죽음, 시장에 나가는 어머니의 고단한 뒷모습.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시 속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이샘이 말한 ‘시어에 시인의 삶이 담긴’ 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안개 낀 소하동의 풍경, 기아자동차 공장으로 향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안양천 둑방길의 쓸쓸함이 그의 시에서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삶 자체가 되었다. 화려한 수사나 기교 대신 자신이 살아온 절박한 현실이 담겼다.
구샘과 김샘이 공통으로 언급한 '지쳤을 때 힘이 되는' 시라는 기준을 생각해보면, 기형도의 시는 역설적이다. 그의 시는 절망적이고 어둡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독자들은 오히려 위로를 발견한다. 자신만이 외롭고 힘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군가가 이미 그 고통을 언어로 형상화해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읽어주는' 시의 힘이 여기에 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고통과 외로움과 절망이 삶의 본질이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른다. 이는 체념이 아니라 받아들임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용기다.
홍샘의 '아, 글쎄~'라는 답변이 오히려 가장 정확할지도 모른다. 좋은 시란 정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형도의 삶과 작품을 통해 좋은 시는 시인의 진정성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 진정성은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스물아홉의 짧은 생애 동안 기형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을 응시하고 언어로 형상화하고 시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그의 시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쏙쏙 와닿고', '울림을 주며',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만든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일상의 감사함을 불러일으키고', '지쳤을 때 힘이' 되는 이상한 마법을 부린다. 결국 좋은 시란 시인이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마주했을 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기형도의 시는 오늘도 어디선가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삶의 의미를 묻는 이들에게 조용한 답을 건네고 있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한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기형도 시, (주)문학과지성사 펴냄, 2019
기형도의 시집《길 위에서 중얼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