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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소픽 Oct 17. 2018

정치가 갈라놓은 고약한 운명(2) - 하이데거&야스퍼스

[미리보기]  #3.《분별없는 열정》

총장에 재직할 때와 사임한 기간을 포함해서 3년간 야스퍼스는 이따금씩 하이데거에게 편지를 썼다. 마지막으로 야스퍼스를 방문하기 직전 하이데거는 그의 악명 높은 총장 취임사를 발표했다. 하이데거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전문적인 철학 어휘들을 동원해가면서 나치가 대학을 접수한 정책을 지지했다. 


출간된 연설문은 사실 그 내용이 무척 모호한데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나중에 뢰비트는 이 연설문을 받고서 연설 내용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공부하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나치가 거느린 폭풍 같은 군대와 함께 행진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그 연설을 호의적으로 평가할 만한 구석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올해 초 우리가 대화를 나눈 뒤 더욱 굳건해진 그대의 철학에 대한 신뢰가, 그 시간을 반영하고 있는 이 연설문의 내용으로 인해 파괴되지는 않을 걸세"라고 편지를 썼다. 소원해진 두 친구는 하이데거가 어려움에 처한 1937년까지도 서로 책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전쟁 동안에 쇠약해진 하이데거는 기력 회복을 위해 잠시 요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1945년에 프라이부르크를 점령한 프랑스는 하이데거의 서재를 접수한다고 위협했으며, 나치청산위원회에 소환하기도 했다. 이 위원회는 결국 하이데거의 교수직 수행을 금지했고, 잠깐 동안이나마 연금도 박탈했다. 부질없는 일이었지만 궁지에서 벗어나고 싶은 하이데거는 친구 야스퍼스의 증언 요청을 위원회에 건의했다. 야스퍼스가 여전히 자신을 위해 증언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 출처: Flickr


친구를 변호하기 위한 증언에서 야스퍼스는 자신이 아는 한 1920년대의 하이데거는 결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 이후 하이데거의 행동은 이 점에서 일관성이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는 이 증언이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의 지성화된 나치즘이 현실적인 것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비정치적인 인물이며, 역사의 수레바퀴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어린아이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철학적 진지함에 관한 한 당시 독일 철학자들 중에서 아마도 독특한 위상을 차지할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 저술과 출간은 마땅히 허용해야겠지만, 강단에 서는 문제는 전혀 다른 사안이라고 말했다. 야스퍼스는 서면 증언에서 "내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사유 방식은 본질상 자유를 허용하지 못하고, 독재와 다름없어 소통불능의 특성을 지닌 듯하며, 따라서 오늘날 교육의 장에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특히 "어투와 행위들은 국가사회주의의 특성과 흡사할 것"이라고 결론을 맺었다. 위원회는 야스퍼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하이데거에게 교수 직무 금지 처분을 내렸다. 이 처분은 1950년까지 효력이 지속되었다. 

이 증언이 곧 야스퍼스가 친구의 일에서 손을 뗄 준비의 일환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야스퍼스는 위원회에서 하이데거가 장차 '진정한 갱생'을 경험하기 바란다는 희망을 표현했다. 동시에 야스퍼스는 하이데거가 겪은 실패들이 본질적으로 경박한 인간이 저지른 실패에 비견될 수 있지 철학의 실패라고 볼 수는 없다고 확신했으며, 자신의 소임을 깨닫게 되면 철학자로서 하이데거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만약 하이데거가 후안무치한 자기정당화와 무책임한 정치적 객담으로 응답하지만 않았다면 그 사안은 거기서 종결되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이미지를 순수한 어린아이로 표명하면서, 1930년대에 유대인과 좌파가 위협을 받을 때 자신은 어느 때보다 그 사람들을 훨씬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고 밝힌다. 현재 독일은 고난에 처하게 되었지만 자기 말고는 아무도 그 점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고 불평한다. 독일인들이 애써 이 사실을 회피하려 하지만 독일은 사방의 적들에 둘러싸여 사면초가에 있으며, 스탈린은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인은 정치 영역에 신뢰를 보내고 있지만, 정치 영역은 기술과 경제의 이해타산에 점령되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희망은 오직 독일인들의 새로운 무거처성(Heimatslosigkeit: 고국상실감)에서 분출할 숨겨진 민족적 계기가 도래하는 것에만 걸 수 있을 뿐이라고 하이데거는 결론짓는다. 

야스퍼스는 이 이상야릇한 비판문에 2년 동안 답하지 않다가, 마침내 하이데거가 구제불능―인간적으로나 또한 사상적으로나― 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야스퍼스에게 하이데거는 이상적인 철학자의 모델이 아니며, 오히려 위험한 환상에 사로잡힌 흉포한 반(反)철학자였다. 야스퍼스는 자신이 과거에 사랑했던 한 사람에게 열정적으로 혹독한 반격을 가했다. 


자네 편지의 문장들이 추정하고 말하는 철학, 
즉 사악한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철학은 
사실상 철학이 현실에서 유리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전체주의의 승리를 준비하려는 수순이 아니겠는가? 

1933년 이전에 떠돌던 철학이 
히틀러를 받아들이는 데 기여한 것처럼 말이네. 
여기 비슷한 일이 지금 다시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 자네가 이제 끝났다고 하는 정치적인 것이 
아주 사라질 수 있다고 보는가? 
그 형태와 수단만이 바뀐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누군가가 실제로 이 변화된 형태와 수단을
 인식해야만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야스퍼스는 하이데거가 품고 있는 도래에 대한 희망으로 화제를 돌린다. 


편지를 읽으면서 공포심이 커져갔다네. 
내가 보기에는 전적인 공상
-언제나 알맞은 역사적 순간에 일어나는 공상- 
지난 50년간 우리를 기만한 공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네. 
자네는 정말로 숨겨진 원천들에서 초자연적인 것을 
드러내는 예언자의 길, 현실에서 유리된 철학자의 길로 
들어설 작정인가?


하이데거는 이 질문들에 답하지 않았다. 이후 10년 동안 때때로 생일축하 인사를 담은 간결한 메모들을 교환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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