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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소픽 Oct 15. 2018

정치가 갈라놓은 고약한 운명(1) - 하이데거&야스퍼스

[미리보기]  #2.《분별없는 열정》

1920년 야스퍼스가 하이데거를 처음 만났을 때 후설의 부인은 하이데거를 남편의 '현상학적 제자'라고 소개했다. 이 조우는 두 사람의 삶을 바꾸는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서로를 전우(戰友)라 부를 만큼 친했지만 극과 극의 길을 걸었던 하이데거(좌)와 야스퍼스(우)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두 철학자의 만남과 우정

야스퍼스는 하이데거보다 여섯 살 위였으며, 그때 이미 독일 지식인층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젊은 시절 야스퍼스는 법학과 의학을 공부했는데 교수자격은 심리학으로 획득해서 그 당시 프라이부르크대학 심리학 교수로 있었다. 야스퍼스의 명성은 1919년에 출판한 <세계관의 심리학>(Psychologie der Weltanschauungen)에 기인하고 있었다. 이 책은 개성이 돋보이며 오늘날에는 사실상 거의 읽히지 않는 저작으로,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와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의 학술 어휘들을 공략하는 한편, 키르케고르와 니체식 실존주의에 관련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 뒤 몇 년간 주고받은 서신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은 심오한 철학적 우정을 발전시켰다. 이 우정은 1922년 야스퍼스가 하이데거를 (당시 야스퍼스가 몸담고 있던) 하이델베르크로 초대해 함께 일주일을 보내게 되면서 굳건해졌다. 이 만남은 두 사람 모두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으며, 그 후 상대방을 '전우戰友'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분명했던 점은 이 우정의 성패는 하이데거가 조금 더 우월한 사상가라는 불편한 사실에 기초하며, 하이데거보다 나이도 많고 지식인층에 더 많이 알려진 야스퍼스가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전제 위에 성립한다는 것이었다.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의 혹평을 받은 뒤 철학에 대한 야망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심리학에서 종교, 니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망라하는 다수의 저작을 출판했다. 

바이마르 시대 말기에 이르자 하이데거의 지적 능력과 영향력이 정점에 달했다. 야스퍼스와 하이데거가 이 시절 교환한 편지들은 이제 중견 교수가 된 두 사람 모두 몹시 바빠졌기 때문에 강렬함이 약간 덜 하기는 해도 여전히 진실한 우정을 담고 있다.  

나치에 부역하며 스승과의 관계마저 끊은 하이데거

잘 알려진 것처럼 1933년 4월에 하이데거는 (독일 남서부 고원지대인) 슈바르츠 발트에 있는 산장을 떠나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에 취임했다. 5월에는 나치에 가입했고 이듬해 4월까지 총장직을 유지했다. 수년 동안 하이데거가 이 시절에 관해 각색해서 해명한 내용이 폭넓게 통용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하이데거가 그 직책을 마지못해 수락했고, 학문이 피해보는 일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유대인들을 보호하다가 때가 되자 기꺼이 그 직책을 사임한 것으로 믿었다―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나치즘을 통해 국가를 갱신한다던 착각이 즉시 깨진 것으로 믿었다. 

지금은 하이데거가 1931년 말부터 나치 지지발언을 한 사실이 명확히 확인되었다. 하이데거가 총장 자리에 오르기 위해 적극적으로 운동을 했으며, 총장에 임명되자 '대학 혁명화 작업'에 자신의 모든 정력을 쏟아부었고, 독일 전역을 돌며 체제 선전 강연을 하면서 말미를 "히틀러 만세!"로 장식했음이 명백한 사실로 드러났다. 

하이데거가 저지른 개인적인 작태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이데거는 유대인 동료들과 모든 관계를 청산했는데, 그중에는 스승인 에드문트 후설도 들어 있었다. (심지어 1940년대 초에는 스승 후설에게 바친 <존재와 시간>의 헌사마저 삭제했다가 나중에 은근슬쩍 다시 원위치에 끼워 넣었다.) 하이데거는 또한 나치 관료들에게 보내는 밀서에서 나중에 노벨 화학상을 받게 될 동료 헤르만 슈타우딩거(Herman Staudinger: 1881~1965)와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인 에두아르트 바움가르텐(Eduard Baumgarten)을 정치적 이유로 탄핵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하이데거는 히틀러 지지 청원서에 서명했으며, 정권을 상대로 베를린에 철학아카데미를 설립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로비를 벌였다. 사임한 뒤 2년째인 1936년에 로마에서 뢰비트와 마주쳤을 때 하이데거는 여전히 나치를 상징하는 핀을 옷깃에 꽂고 있었으며, 제자인 뢰비트에게 <존재와 시간>에 등장하는 개념들이 자신의 정치개입을 고무한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1933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나치 회의에 하이데거(검은 원)가 참석한 모습


야스퍼스, 친구 하이데거의 '히틀러 찬양'에 경악하다

1941년 5월 하이데거는 총장이 되어 다시 하이델베르크를 찾았고, 학생들 앞에서 나치 정권의 대학 관련 계획들에 대해 장황하게 연설했다. 야스퍼스는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청중석 맨 앞줄에 앉아 듣고 있었다. 연설이 끝난 뒤 그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야스퍼스는 자기 친구가 유대인 문제에 관해 나치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하이데거의 의중을 살폈다. 

그러자 하이데거는 "위험스런 유대인들의 국제 조직망이 존재한다네"라고 말했다. 야스퍼스가 "아돌프 히틀러 같은 교양 없는 자가 독일을 다스릴 수 있는가?"라고 묻자, 하이데거는 "독일을 통치하는 일과 교양은 아무 상관이 없다네. 히틀러의 훌륭한 두 손만 쳐다 보게나"라고 답했다. 물론 야스퍼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때까지 하이데거가 말한 것에 비춰볼 때 그가 그토록 급격히 나치와 정치적 결탁을 하리라고는 미처 예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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