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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소픽 Oct 19. 2018

"독재도 합법" 평생 나치를 지지한 카를 슈미트

[미리보기]  #4.《분별없는 열정》


카를 슈미트는 베스트팔렌의 플레텐베르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985년 그곳에서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실 미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지만, 오늘날 많은 유럽 국가, 특히 독일에서는 슈미트를 가장 중요한 20세기 정치이론가 중 한 명으로 여기고 있다. 슈미트의 저서는 여러 언어로 출판되었고, 여전히 강도 높은 학문적 토론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중 가장 비중이 있는 저작들은 바이마르 시대에 쓰였다. 

"독재도 합법" 나치를 공개 지지한 황제 법학자

슈미트가 나치에 부역한 이야기는 참으로 듣기에도 민망하다. 1933년 5월 1일 쾰른대학 법학교수였던 슈미트는 나치에 가입했다. 비록 나치 전위대에는 끼지 않았지만, 당원번호 2,098,860가 증언하듯 슈미트의 결단은 사실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치에 입당하기 전 10년 동안 슈미트는 반자유주의 정치학자이자 법학자로서, 베르사유조약과 바이마르헌법을 공공연히 비판해 유명해졌다. 1920년대에는 좌우익의 정치적 극단주의가 압박하는 가운데 독일의 의회민주주의가 붕괴하자 제국 대통령이 지배하는 한시적 독재를 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바이마르헌법 48조가 부여하는 비상권한 아래에서는 독재도 합법이라는 것이다. 

1932년, 독일 정부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권력을 강화하는 상황에 쐐기를 박기 위해 바이마르헌법 48조를 발동해 프러시아제국의 대리자를 임명하자 슈미트는 헌법재판소에 출석해 그 조치를 옹호했다. 결국 패소했지만 비상권한에 관한 변론은 나치 관료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몇 달 뒤 권력을 잡게 되자 나치는 슈미트를 사법자문관 중 한 명으로 초빙했다. 슈미트는 이 제안을 수락했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신문들은 슈미트를 제3제국의 황제법학자로 부르게 된다.


나치를 지지했던 독일의 법학자·철학자 카를 슈미트 (1888~1985)


마르틴 하이데거, 에른스트 윙거, 고트프리트 벤(Gottfried Benn: 1866~1956)을 포함해 수많은 독일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슈미트는 제3제국 초창기의 나치를 공개 지지했다. 그러나 안드레아스 쾨넨이 슈미트 사례를 세밀히 연구한 저서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슈미트는 다른 독일 지식인들보다 한발 더 나아가 나치 정권의 헌신적인 공식 대변자가 되었다.  


헤르만 괴링(Herman Go¨ring: 1893~1945)의 후원 아래 프러시아 국가평의회에 지명되었으며, 베를린대학 교수 자리를 하사받았고, 중요한 법학 학술지 편집인이 되었다. 나치는 슈미트가 히틀러의 행위에 사법적 지위를 부여하리라는 희망을 품은 게 분명한데, 결국 실망하지 않았다. 당에 가입한 직후 슈미트는 '모든 권리는 특정 민족(Volk)의 권리'라는 주장을 근거로 총통제 원리, 나치의 우월성, 인종주의 등을 변호하는 선전책자들을 썼다. 히틀러가 에른스트 룀(Ernst Ro¨hm)을 포함한 나치돌격대(SA)의 다른 정적들(여기에는 슈미트의 친한 친구도 들어 있었다)을 처형한 1934년 6월의 장검長劍의 밤 이후, 슈미트는 히틀러의 처신이 그 자체로 지고한 정의라고 주장하는 악명 높고 영향력이 있는 글을 발표했다.  

한 학회에서 <유대정신에 대항한 투쟁 속에서 바라본 독일 사법권>이라는 발표를 할 때 슈미트는 도덕의 최저점에 도달했다. 이 발표문에서는 도서관에서 유대인 저자가 쓴 책들을 솎아내라고 요구했고, 동료들에게는 유대계 저자들을 되도록 인용하지 말되 사정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원저자가 유대인임을 명시할 것을 권고했다. "유대인 저자는 우리에게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한다." 잘 알려진 유대인의 논리적 영리함은 단지 우리를 겨냥한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경고한 뒤 다음과 같은 히틀러의 말을 인용하면서 발표문을 끝맺고 있다― 


나는 유대인들을 물리침으로써 주님의 역사役事를 수행하려고 분투한다.


슈미트는 죽는 날까지도 나치 부역에 관해 뉘우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후에는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비망록을 저술하는 데 많은 정력을 쏟아부었으며, 그중 일부는 몇 년 뒤 독일에서 <주해집Glossarium>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황금빛 서표書標와 양각된 슈미트의 서명을 표지에 싣는 등 고급스럽게 편집됐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큰 물의를 일으켰는데 , 무자비한 어투는 슈미트 옹호자들에게도 가히 충격일 정도였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로 존재한다. 반면에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 변화 발전할 수 있다. … 우리 독일인의 진정한 적은 독일인 속에 동화한 유대인이다." 

"이 유대계 망명 러시아인들과 인도주의자들의 우정보다는 히틀러의 적의가 훨씬 낫다." 

"무엇이 정말로 더 볼썽사나운가. 1933년에 히틀러에게 합류한 것인가, 아니면 1945년에 히틀러에게 침을 뱉은 것인가?"


2차 대전이 끝난 뒤 슈미트는 비굴한 인생을 살았다.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자기연민으로 가득한 비망록에 개인적인 울분을 토로했다. 그러나 슈미트의 영향력은 잊히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꾸준히 회복세를 보였다. '침묵의 안전'으로 은퇴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이었지만 그는 사실상 지칠 줄 모르는 자기선전형 인간이었다. 독일연방공화국 초기에는 자신을 응대해 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이라면 아무에게나 아첨조의 편지와 자필로 서명한 책들을 뿌려댔다. 연합군에 의해 구금된 뒤 10년이 지나자 플레텐베르크에 있는 슈미트의 자택은 과거 황제법학자와 정치를 논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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