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로소픽 Oct 22. 2018

히틀러와 박정희의 이름으로 부활한 디오니시오스 2세

[미리보기]  #5.《분별없는 열정》


기원전 368년경 시라쿠사로 출발할 때, 플라톤의 마음은 매우 착잡했다. 흉포한 전제자인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그 도시를 이미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는 플라톤은 당시 시칠리아인들의 방탕한 생활 방식에 그다지 호감을 느끼지 못했었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진탕 먹고, 밤에는 절대 혼자 잠자리에 들지 않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그곳에서 과연 젊은이들이 절제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품은 것이다. 그런 도시는 끝없이 반복되는 폭정과 혁명을 피할 길이 없었다. 

플라톤은 왜 그런 도시에 다시 가려는 것일까? 우연히도 시칠리아에는 플라톤의 제자가 한 명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짐작했던 것만큼 용서받지 못할 땅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제자는 디온(Dion)이라는 귀족이었다. 플라톤과 철학의 대의에 헌신한 이 젊은이가 플라톤에게 편지를 보내 디오니시오스 1세가 죽고 아들인 젊은 디오니시오스 2세가 통치권을 승계했다고 알렸다. 디온은 디오니시오스 2세의 친구이자 숙부였다. 그는 이 새 통치자가 철학에 마음을 열고 정의롭게 되기를 바란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디온이 보기에 이 새 통치자에게 필요한 것은, 플라톤에게 직접 좋은 교육을 받는 일이었다. 제자는 옛 스승에게 방문해 달라고 간청했고, 플라톤이 결국 심각한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뱃길에 오른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 - 출처: 위키피디아


시라쿠사의 실패

플라톤의 이 두 번째 시칠리아 방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디오니시오스 2세는 배움의 모양세를 갖추기를 바랐지만 변증론법에 필요한 자제심과 신념을 결여했고, 논의의 결론에 따라 자기 삶을 바꿀 의지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 지배자를 햇볕을 쬐려고 나섰다가 살갗만 태운 사람에 비유했다) 결국 의사가 환자의 의지에 반해서 병을 치유할 수 없듯이, 고집불통의 디오니시오스 2세를 철학과 정의로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6~7년쯤 뒤 플라톤은 디온의 요청을 받고 다시 시칠리아로 건너갔다. 디온은 유배 생활을 하는 중에도 디오니시오스 2세가 철학 수업에 복귀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실을 다시 플라톤에게 알렸다. 처음에 플라톤은 동요하지 않았다. 철학이 종종 젊은이들에게 이런 종류의 효과를 창출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던 플라톤은, 디오니시오스 2세가 단지 플라톤이 자신을 가치 없는 인간으로 치부했다는 악소문을 잠재우고 싶어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째 시칠리아 여행을 떠나게 된 것과 동일한 논거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시라쿠사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플라톤이 시라쿠사에 도착해서 발견한 것은 더욱 오만해진 전제자였다. 디오니시오스 2세는 이미 자신을 철학자로 간주했으며 책도 한 권 썼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책은 변증론자인 플라톤이 단호하게 거부할 만한 그런 종류의 책이었다. 여행의 목적은 사라졌고 플라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는 일뿐이었다. 


디오니시오스에게 화를 낼 이유는 없다. 
나는 나 자신과 나를 여기로 오게 한 사람들에게 화가 날 뿐이다.



히틀러와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환생한 디오니시오스 2세

디오니시오스 2세는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지난 세기 동안 디오니시오스 2세는 여러 이름으로 환생했다. 레닌과 스탈린, 히틀러와 무솔리니, 마오쩌둥과 호찌민, 카스트로와 트루히요(Rafael Leonidas Trujillo: 1891~1961), 아민과 보카사 , 사담과 호메이니, 차우셰스쿠와 밀로셰비치 같은 이름들은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 


20세기 아시아의 '디오니시오스 2세'였던 중국의 마오쩌둥·남한의 박정희·북한의 김일성 - 출처: 위키피디아


디오니시오스 2세의 문제는 인류의 창시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지적 동조자들은 끊임없이 새로 생겨날 뿐이다. 20세기에 공산주의와 파시즘이라는 두 위대한 전제적 이념체계들을 탄생시킴에 따라 유럽은 새로운 사회의 인간 유형도 탄생시켰다. 우리는 새롭고 알맞은 이름을 찾아야 한다―전제 애호 지식인.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의미하게 느껴지는 저술을 쓴 그 시기의 주요 사상가들 중 상당수가 말과 행동으로 공개적이고 과감하게 현대의 디오니시오스에게 봉사했다. 악명 높은 사례들이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슈미트는 나치 독일에서, 게오르크 루카치는 헝가리에서, 그리고 다른 곳에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철의 장막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파시즘과 공산주의 정당에 합류했다.  

인간의 정신이 20세기에 전제정을 지적으로 옹호할 수 있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플라톤이 <국가>와 실패한 시라쿠사 여행 경험 속에서 개진한 전제정 비판과 더불어 시작된 서구 정치사상 전통이, 어떻게 전제정은 좋은 것이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주장을 존중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인가?  

우리의 용감한 역사가는 이렇게 커다란 질문들을 제기해야 한다. 자신이 과장된 행태를 보인 예외의 경우들이 아니라 일반적 현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한 하이데거의 사례는 20세기에 철학, 즉 지혜에 대한 사랑이 전제 애호로 퇴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다. 

우리 안의 전제자를 극복하기 위한 '자각'

'자각(自覺)'은 시라쿠사에서 플라톤과 디온이 수행했던 행위와 20세기 유럽의 전제 애호 지식인들의 행위를 구별 짓는 요소다. 플라톤과 디온은 소크라테스의 예제를 본받아 자기 자신의 영혼에서 모든 전제성(專制性)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디오니시오스 2세의 지배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었고, 시라쿠사를 그의 전제정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한 일이 정당화되었다.  

시라쿠사의 유혹은 사유하는 자―남녀를 불문하고―에게도 강하게 다가서며, 그럴 수밖에 없다. 플라톤이 오래전에 이미 본 것을 보기 위해서 지식인을 영웅으로 본 사르트르의 자아도취 신화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진리에 대한 동경과 '도시와 가정의 올바른 질서'에 공헌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인간의 정신에는 모종의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충동을 하나의 충동―분별없는 열정이 될 수 있는 추동력―으로 보았던 플라톤은 그 파괴적 잠재력에 경각심을 가졌고, 건강한 지적․ 정치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이 경각심을 이용하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 정신이 개념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이런 극도의 자각이, 플라톤이 말하는 의미의 철학자와 다른 많은 현대 지식인들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20세기의 전제 애호에 대해 사유하고 배울 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자각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 출처: 위키피디아


전제정은 죽지 않았다. 정치에서는 물론이고 우리 영혼 속에서도 분명히 죽지 않았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시대는 지나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정치에 대해 사유하는 한―사유하는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는 한―어떤 사상의 매력에 굴복하려는 유혹, 그리고 그 사상의 잠재된 전제성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드는 열정을 허용하고 싶은 유혹, 그리하여 우리의 첫 번째 책임을 포기하게 하는 유혹이 끼어들 것이다. 우리의 첫 번째 책임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전제자를 극복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재도 합법" 평생 나치를 지지한 카를 슈미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