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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소픽 Nov 27. 2018

나는 왜 이소룡의 책을 기획했나

[마케터의 단상] (2) 이소룡의 고3 팬이 입사 후 이소룡 책을 내다


All the warriors in this world (세상의 모든 전사들이여) / Join the passion of this master of soul (위대한 영혼의 승부사와 함께 하라) / From the chinese hills and shore (중국의 고산에서 해안까지) / We still listen to Bruce Lee battle call (이소룡의 함성이 아직도 들리네) - Emma Re, (드라마 <이소룡 전기> OST)


요즘 내가 매일 같이 흥얼거리는 노래다. 이탈리아 여가수 Emma Re의 잔잔하면서도 웅장한 목소리와 용기를 북돋는 가사가 가히 전설적인 액션스타 이소룡의 삶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들을 때마다 힘이 나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고3 시절 나를 위로해주던 그 이름, 이소룡 

엄밀히 말해 나는 '이소룡 세대'는 아니다. 이소룡이 죽고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태어났으니 우리 세대에게 이소룡은 이미 한물 간 스타였다. 아마 내 또래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이소룡보다는 '싱하형'이라는 우스꽝스러운 패러디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그런 내가 이소룡의 늦깎이 팬이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소룡의 영화가 아닌, 이소룡의 생애를 그린 드라마 때문이었다. 2008년 중국 CCTV가 베이징 올림픽 기념으로 제작한 50부작 드라마 <이소룡 전기>가 그것이다.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기념으로 중국 CCTV에서 제작한 50부작 드라마 <이소룡 전기>. 2009년 SBS에서는 이 드라마의 한국어 더빙버젼을 주말마다 방영했다. ⓒ SBS


이듬해인 2009년, SBS에서는 이 드라마의 한국어 더빙판을 주말 저녁마다 방영했는데, 나는 한 회차도 빼놓지 않고 챙겨볼 정도로 열혈 시청자였다. 그때 나는 수능을 코앞에 둔 고3 수험생이었다. 하루하루 지겹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던 그 시절, 일주일을 기다린 끝에 보던 <이소룡 전기>는 내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지친 수험생활에 적잖은 위로를 받았는데, 이소룡이 온갖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장면들 때문이었다. 특히나 홀로 미국에 건너간 이소룡이 아침마다 신문배달을 하고 저녁엔 접시를 닦으면서 고학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는 동병상련의 애틋한 감정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렇게 시련을 견뎌낸 이소룡이 마침내 전세계를 뒤흔든 스타로 우뚝 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의 경이로운 삶에 전율을 느끼며 팬이 되어버렸다. 


▲ 나의 이소룡 컬렉션들. 내가 기획한 <물이 되어라, 친구여>가 새롭게 추가됐다.


이소룡의 팬이 출판사에 들어가 이소룡 책을 내다 


이소룡의 위로(?)를 받으며 수험생활을 견뎌냈던 그 시절로부터 벌써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까지 졸업한 뒤, 작은 출판사에 입사했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입사 후 운명처럼 다시 이소룡을 만나게 될 줄이야. 

내가 들어간 출판사는 인문·철학 전문 출판사였다. 철학 관련 서적을 기획하긴 해야겠는데, 전혀 철학적인 삶을 살아오지 않은 까닭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막막한 상황이었다.  

때마침 내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으니... 이소룡이 철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아마존을 뒤졌다. 이소룡의 철학적 아포리즘(격언)을 모아놓았다는 <Striking Thoughts>라는 외서가 눈에 띄었다(이 책은 이미 두 차례나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적이 있었으나 당시엔 절판된 상태였다).


▲ <물이 되어라, 친구여>의 원저인 <Striking Thoughts> ⓒ Tuttle Publishing


그렇게 나는 철학 기획이랍시고 이 책을 조심스럽게 들이밀었다. 예상했던 대로 내부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이미 이소룡을 한물 간 스타로 생각하는 분위기에서 과거 두 번이나 출간됐던 책을 다시 낸다는 건 내가 봐도 무모한 기획이었다.  

그러나 사장님의 전폭적인 지지와(처음엔 갸우뚱했으나 나중에 사장님도 젊은 시절 상당한 '이소룡빠'였다는 소리를 듣고 모든 의문이 풀렸다) 한 번 열심히 팔아보겠다는 나의 의지에 더해 마침내 계약이 이뤄지고 출간까지 앞둔 상황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덕업일치'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소룡 탄생 78주년이 되는 오늘(11월 27일), 이 책이 <물이 되어라, 친구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825개로 정리한 이소룡의 아포리즘 <물이 되어라, 친구여> 

대학 시절 철학을 전공했던 이소룡은 서재에 동서고금의 다양한 철학 서적을 쌓아놓고 틈날 때마다 읽었다고 한다. 이소룡에게 철학은 육체적 한계를 넘어 잠재력을 극대화하고, 삶을 살아갈 의지를 북돋워준 심신수양의 수단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남긴 어록들을 보면 위대한 철학자들의 명언을 인용한 경우가 많다. 

<물이 되어라, 친구여>는 이소룡이 어린 시절부터 쓴 친필 일기와 강의 노트, 독서 중에 틈틈이 책 귀퉁이에 남긴 단상들, 지인들과 나눈 편지, 기자와의 인터뷰 등 생전에 이소룡이 남긴 말과 글을 825개의 아포리즘(격언)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책 속에서 이소룡은 삶, 죽음, 인간, 무위, 진리, 시간, 의지, 성공, 자아실현 등 다소 무거운 주제들부터 시작해서 건강, 연애, 사랑, 결혼, 육아, 예술 등 일상의 소소하고 가벼운 주제들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각 주제들을 통해 우리는 이소룡이 서른두 해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견지했던 삶의 원칙들을 엿볼 수 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이소룡이 시련과 역경을 마주했을 때 어떤 삶의 원칙을 가지고 그것들을 극복해 나갔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어록들이 가득하다. 제목인 "물이 되어라, 친구여(Be Water, My Friend)"라는 구절 역시 이소룡이 생전에 인터뷰나 작품에서 즐겨 인용한 구절이다. 형체가 없이 부드러운 물처럼 우리의 삶 역시 부드럽고 유연해야 한다는 뜻이다.


환경 탓이라고? 허튼소리! 환경은 나 스스로 만드는 거야! - p.10 

나만큼 직업이 불안정한 사람이 또 있을까? 내 직업이 뭔지 아는가? 나는 등이 아파 1년 동안 아주 고생했다. 하지만 모든 역경 뒤에는 축복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때로는 그런 충격이 일상의 진부함에 빠지지 않도록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p.186


이소룡과 대화하듯 편안하게 읽는 책 

아포리즘은 이소룡이 제자들을 지도했던 방식이기도 하다. 이소룡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직접적인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철학적 아포리즘을 화두로 던지면서 그것을 힌트삼아 제자들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했다.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제자들은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의 제자들은 이소룡을 단순한 무술 스승이 아닌 인생의 스승으로 회고한다. 

<물이 되어라, 친구여> 역시 독자들에게 직접적인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쩌면 읽으면서 알쏭달쏭한 말들도 많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소룡이 원했던 방식이다. 읽는 이들 스스로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저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나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국 나중에는 이 책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진리의 추구는 외부의 권위나 견해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방식이 아닌, 저마다 스스로 찾아나서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이소룡의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그저 이소룡과 편안하게 대화를 하며 그 대화 속에서 나의 고민을 풀어줄 힌트를 찾는다고 생각하며 읽으면 족하다. 


"진리를 추구할 때는 독립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결코 다른 사람의 견해나 책에 의존하지 마라." - p.18 

"이 책에 담긴 문장들은 기껏해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신경쓰거나 손가락에 시선을 집중하지 마라. 그러면 하늘의 아름다운 모습을 놓칠 것이다. 손가락의 용도는 그 손가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과 모든 것을 비추는 빛을 가리키는 것이다." - p.359


▲ 영화 <용쟁호투> 스틸컷. 이소룡이 제자에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볼 것을 주문하는 장면이다. ⓒ 워너브러더스


이소룡 탄생 78주년, 그가 다시 부활하기를 

최근 영국의 전설적인 록그룹 '퀸(Queen)'의 음악 세계를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흥행하면서 대한민국에도 때 아닌 퀸 열풍이 불고 있다. 퀸 세대는 물론 퀸에 대해 잘 몰랐던 세대들까지도 퀸의 노래를 찾아듣는 모습은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가히 고무적이다. 

이처럼 전설은 시간이 흘러도 그 빛이 바래지 않는 법이다. 분야는 달랐어도 이소룡 역시 '20세기 문화의 아이콘'이라 할 정도로 이제는 전설이 된 인물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소룡 탄생 78주년을 맞아 그의 어록집을 출간하며 다음과 같은 소박한(?) 바람을 품어본다. 

그동안 우리에게 부분적으로만 알려졌던 이소룡의 진면목이 45년 만에 다시 재조명되기를! 그리고 고3 시절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상처받고 소외된 영혼들이 '위대한 영혼의 승부사'와 함께 삶의 의지를 되새기는 여정에 동참하기를!


나는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는 동안 멈춤 없이 계속 전진할 뿐이다. 
비록 나 이소룡이 품은 모든 야망을 못다 이룬 채 언젠가 죽을지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며 내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았다. 
여기서 인생에 더 무엇을 바라랴. - p.64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 기사 원문: http://omn.kr/1du5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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