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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소픽 Dec 20. 2018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이소룡

'자아실현'을 향해 나아간 두 천재스타 프레디 머큐리 & 이소룡


Ay-Oh(에-오)!


스크린 속 프레디 머큐리(라미 말렉 분)의 선창에 객석의 관객들이 떼창으로 화답한다. 그 어떤 영화관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영화관 측은 아예 관객들이 콘서트장에 온 것처럼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싱어롱 상영관'까지 마련했다. 그야말로 '퀸망진창'(퀸과 엉망진창의 합성어로 퀸 신드롬을 뜻하는 말)이다.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퀸(Queen)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 48일 만에 누적 관객 수 8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미 퀸의 본고장인 영국의 누적 매출을 뛰어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대한민국에선 퀸 노래를 들으며 자랐던 기성세대는 물론, 퀸에 대해 전혀 몰랐던 10대들까지도 퀸 노래 따라 부르기에 열심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스틸컷 - 출처: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대한민국 퀸 열풍의 주역 <보헤미안 랩소디>의 진주인공은 프레디 머큐리다. 퀸의 리드 보컬이었던 프레디는 비주류에서 전설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인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토종 영국인들과 다른 외모 탓에 '파키'(파키스탄 사람을 비하하는 단어)라고 불리는 등 인종차별을 경험한다. 게다가 그는 바이섹슈얼(양성애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콤플렉스에 좌절하지 않았다. 불가능에 도전한 결과, 그는 20세기 최고의 록그룹 리더가 될 수 있었다.


너무나도 닮은 두 사람, 프레디 머큐리와 이소룡

프레디 머큐리가 활동했던 동시기에 상당히 비슷한 삶과 철학을 추구했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액션스타 이소룡(브루스리)이다. 


록 음악과 영화계의 전설이 된 프레디 머큐리(좌)와 이소룡(우)


프레디와 이소룡은 묘하게 닮은 꼴이다. 

우선 두 사람 모두 인종차별을 겪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프레디는 이국적인 외모 탓에 토종 영국인들로부터 '파키'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야만 했는데, 미국으로 건너간 이소룡 역시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인종 문제는 늘 그의 발목을 잡았다. 영화판에서 그는 늘 단역과 조연을 전전해야만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이 야심 차게 기획했던 TV 드라마 시리즈 <쿵푸>의 타이틀롤도 서양인 배우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프레디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록밴드의 전설'이라는 타이틀을 따냈듯, 이소룡 역시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할리우드 스타에 등극했다. 

미국 영화계에서 뼈저린 실패를 맛본 그는 1971년 홍콩으로 돌아와 영화 <당산대형>을 찍었다. 영화는 대박이 났다. 이후 <정무문>, <맹룡과강>의 잇따른 흥행으로 마침내 할리우드의 러브콜까지 받게 됐다. 1973년에 개봉한 <용쟁호투>는 최초의 홍콩-할리우드 합작 영화였다.

공교롭게도 천재적 재능의 소유자였지만 요절했다는 점에서도 둘은 닮은 운명이었다. 이소룡은 1973년 7월 27일,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뇌부종으로 32살의 나이에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프레디의 경우 45세로 이소룡보다는 좀 더 오래 살았지만 그 역시 죽기엔 너무나도 이른 나이였다. 미인박명이란 이럴 때 해당하는 말일까.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 날이 11월 24일, 이소룡의 생일이 11월 27일이란 점도 묘하게 들린다)


미국 워싱턴 레이크뷰 묘지에 위치한 이소룡의 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영웅이었다. 철저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인 프레디의 아버지는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강조하며, 아들 프레디가 자신의 가르침에 철저히 복종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반항아적 기질의 소유자였던 프레디는 "내가 누군지는 내가 결정해"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이러한 프레디의 자유로운 정신은 퀸의 음악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비주류(이민자·성소수자)라는 자신의 약점을 오히려 당당하게 내세우며, 아웃사이더를 대변하는 음악에 도전한 것이다. 1975년에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분 길이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작곡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관객들이 퀸에 빠진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남들의 눈치를 보지도 않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추구하려 노력했던 프레디의 삶과 그의 철학이 반영된 노래들이 관객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이다.


We are the champions my friends 
And we'll keep on fighting till the end  
No time for losers 
Cause we are the champions of the world  

우리는 챔피언이야, 친구여 
그리고 우린 끝까지 계속해서 싸울 거야 
패배자를 위한 시간은 없지 
왜냐면 우리는 세계의 챔피언이니까

- <We Are The Champions> (1977) -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스틸컷 - 출처: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이소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워싱턴주립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던 그는 '자아실현'을 평생의 화두로 삼았다. 그가 철학과에 입학했던 것도 학창시절 "철학은 인간이 왜 사는지를 네게 알려줄 거야"라는 선생님의 말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그는 단순한 무술가 혹은 영화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는 육체적 단련과 정신적 사유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 했다. 이렇듯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삶의 의지가 있었기에 그는 어떠한 난관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1969년, 운동 중 입은 심각한 허리 부상으로 반 년 이상 침대에 누워서 생활해야만 했는데, "운동을 그만두라"는 의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재활훈련을 거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Walk On! (계속 걸어라!)"


"자아실현은 아주 중요하다. 내가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피상적인 자아실현이 아닌 참된 자아실현을 향해 나아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내면에 있는 진솔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기를 바란다." - p.12

"진리를 추구할 때는 독립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결코 다른 사람의 견해나 책에 의존하지 마라." - p.18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가 나다." - p.304

"평범한 행동이나 정해진 패턴에 대한 반복 훈련의 수단이 아닌, 자기표현과 자아실현을 향해 나아가라." - p.321

- 이소룡 어록 『물이 되어라, 친구여』-



전설은 시간이 흘러도 그 빛이 바래지 않는 법이다. 분야는 달랐어도 이소룡과 프레디 머큐리는 '20세기 문화의 아이콘'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의 편견에 맞서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삶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감정 아닐까 싶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개봉을 계기로 우리의 추억 속 영웅 프레디 머큐리와 이소룡의 진면목이 다시 재조명되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저마다 상처받고 소외된 영혼들이 이 '위대한 영혼의 승부사'들과 함께 삶의 의지를 되새기는 여정에 동참하기를!


나는 록스타가 아니라 전설이 될 거야
- 프레디 머큐리

나 이소룡은 미국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동양의 첫 슈퍼스타가 될 것이다
- 이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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