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후 연재] #05. 상하이 예관 신규식 선생 거주지를 찾아서
2018년 6월 20일, 상하이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임정로드 4000km』 취재팀은 이날 '상하이 남창로 100농 5호'를 찾았다.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기 8년 전인 1911년, 예관 신규식 선생이 상하이에 망명해서 지냈던 거주지였다.
취재팀은 비를 맞으면서 밖에서 서성였다. 그때 예관 선생이 살던 집에 사는 중국인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는 집 2층 한 편이 예관 선생이 살았던 곳이라며 방문 앞까지 안내해줬다.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과 먼지 가득한 난간, 어두침침한 복도까지 선생이 살았던 곳은 그대로였다. 취재팀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와 그저 가만히 서서 선생이 살던 방문이며 복도며 계단을 매만졌다.
항상 흘겨보던 사람, 예관 신규식
예관 신규식. 아마 많이들 모를 거다. 『임정로드 4000km』 취재팀도 이번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알게 됐다.
예관 선생은 19세기 말에 태어나 20대 초반에 신식 군인을 양성하려고 설립한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해 육군 보병 참위(지금의 위관 계급)가 되었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불의에 항거한 한 마디로 뜨거운 사람이었다.
1905년 11월 17일의 일이다.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제2차 한일협약, 다른 말로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을 장악했다.
군인이었던 예관 선생은 분노했고, 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아무리 궁리해보아도 망국을 향해 치닫는 나라를 위해 군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선생은 결국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독을 마셨다. 1차 자살 기도였다.
천운인지 아닌지, 예관 선생의 음독자살은 가족들이 빨리 발견한 덕분에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오른쪽 시신경에 문제가 생겨 시력을 잃었다. 선생은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겠냐"며 자신의 호도 아예 '흘겨본다는 뜻'의 예관(睨觀)으로 지었다. 몇 장밖에 전해지지 않는 선생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선생의 선글라스 같은 짙은 안경과 고풍스러운 수염이 더 남다른 이유다.
선생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부하들을 이끌고 저항에 나섰다. 압도적인 전력 차로 패하고 예관 선생은 결국 군복을 벗게 된다.
그렇다고 조국을 생각하는 선생의 마음마저 줄어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관 선생은 대종교에 입교해 애국계몽 영역으로 활동의 폭을 넓혔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기어이 한국을 병탄해버린다. 청천벽력 같은 경술국치 소식에 예관 선생은 집에서 다시 독을 마신다. 때마침 선생을 방문했던 대종교 종사 나철이 선생을 발견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삶의 끝자락을 헤매다 다시 한번 기적적으로 돌아온 것이다.
망국의 설움을 안고 상하이로 떠나다
망국 1년 뒤, 선생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다. 선생이 망명하던 당시만 해도 아직 상하이에서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과감하게 국제도시 상하이로 독립운동의 길을 떠난 것이다.
강직하고 불같은 성품을 지녔지만 머리는 기민했다. 어떻게 싸워야 효과적일지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한 뒤, 먼저 중국 혁명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과도 연을 맺어 청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에도 가담했다. 신해혁명의 유일한 한국인 참가자다.
또한 예관 선생은 훗날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 되는 박은식 선생과 뜻을 모아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특히 선생은 상하이 남창로 100농 5호 2층 단칸방에 살면서 건너편 집에 살던 천두슈(陳獨秀) 선생과도 가까이 지냈다. 천두슈 선생은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이자 유명한 사상가다. 그는 1915년 《신청년》을 창간하면서 중국 전역에 근대 사상 계몽 운동을 일으킨 사람이다. 잡지를 창간한 곳이 바로 예관 신규식 선생이 살았던 남창로 100농 5호, 그 건물이다.
선생은 이러한 친분을 바탕으로 한국 학생들이 더 나은 교육과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했다. 덕분에 실제로 100여 명의 학생이 여러 군관학교 등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고, 이들이 훗날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서 활동하게 된다.
죽는 순간까지도 임정의 통합을 부르짖다
무엇보다 선생이 상하이에서 닦아놓은 기반이 고스란히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하이가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한데 모인 애국지사들이 뜻을 모아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게 된 것이다.
선생은 임정이 출범한 그해에 법무총장에 임명되었고, 1921년에는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까지 오른다. 이때 예관 선생은 외교사절 자격으로 광저우로 가 중국의 국부 쑨원의 광동 호법정부를 방문했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정부에 대해 나라 대 나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자, 임시정부의 외교력이 빛을 본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생의 뜻과는 달리 임시정부는 곧 사나운 격랑으로 빠져들었다. 임정 수립 후 꾸준히 제기됐던 내부 분열이 극단으로 치닫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선생이 강조했던 '외교독립론'이 빛을 보지 못했다.
1922년, 미국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는 워싱턴회의가 열렸지만, 정작 임시정부는 초대받지 못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미국은 한국 대표단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승만은 그해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다. 이후 예관 선생의 지병도 악화했다고 한다. 선생의 외교독립론이 임시정부를 분열시켰다는 자책감에 우울증과 불면증까지 겹쳐서 고통받았다고 한다.
선생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인 1922년 8월, 하늘을 바라보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나는 가겠소.
여러분들!
임시정부를 잘 간직하고,
삼천만 동포를 위하여 힘쓰시오.
이것이 선생의 실질적인 마지막 유언이었다. 이날 이후 선생은 식사와 약을 끊고, 입까지 다물어버렸다. 선생과 의형제를 맺은 동생 박찬익이 찾아와 "이래선 안 된다"며 만류해도 선생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가만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고 한다.
1922년 9월 25일, 선생은 결국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순간, 선생의 입에선 "정부……, 정부……."라는 말만 가늘게 새어 나왔다고 한다. 선생이 떠나는 날, 상하이에는 굵은 소나기가 내렸다.
선생의 집을 나오니 빗줄기는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더 아쉬웠나 보다.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했고, 외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까지 맡으셨던 분의 거처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다.
운 좋게 선생의 집에 거주하는 중국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집 안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지만, 선생의 거주지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번째, 두 번째 청사처럼 아무런 표식조차 없었다.
어떻게 갈까
주소: 上海市 黄浦区 南昌路 100弄 5号 (상해시 황포구 남창로 100농 5호)
처음 가는 길이면 찾기 어려울 수 있다. 『임정로드 4000km』 지도를 잘 보면서 이동해야 한다. ➊ 신규식 선생의 집은 상하이 지하철 13호선 ➋ 회해중로역(淮海中路站)과 1호선 ➌ 황피남로역(黃陂南路站) 중간에 있다.
선생의 집은 임시정부 첫 번째 청사 추정지인 서금이로와 ➍ 두 번째 청사 추정지인 회해중로(淮海中路) H&M 건물,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이 마지막 인사를 나눈 ➎ 원창리(元昌里) 13호와 전부 10분 거리 안쪽에 위치한다.
『임정로드 4000km』 책 본문 앞부분 '6가지 당부의 말'에 나온 QR코드로 지도를 스캔하고 정확한 위치를 자신의 개인용 구글 지도에 입력한 뒤 이동할 것을 추천한다. 골목 안쪽에 위치한 만큼 '남창로 100농' 표지판을 유의하며 걸어야 한다. 여러 주택 사이로 '남창로 100농 5호'라는 주소지를 발견하는 순간 짜릿한 감정이 일어날 것이다.
주의사항 및 팁
『임정로드 4000km』 취재팀이 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안타깝게도 선생이 거주하던 집이 한창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남창로 100농 5호에는 지금 사는 중국인 주민들도 있는 만큼 집 안에까지 직접 들어가서 둘러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예관 신규식 선생의 집과 천두슈 선생의 집 사이에 서서 100년 전 당시를 가만히 떠올려 보노라면, 불현듯 묘한 감동이 북받쳐온다. 무엇보다 우리가 잘 몰랐던 애국지사 신규식이라는 인물에 대해 남창로 100농 5호까지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뿌듯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하면 남창로 100농 5호뿐만 아니라 예관 신규식 선생의 묘가 있었던 '만국공묘'까지 가볼 것을 추천한다.
작은 소원이 있다면, 신규식 선생이 살았던 집에 푯말 하나만 세웠으면 하는 것이다. 이미 신규식 선생이 살았던 거주지에 천두슈 선생이 《신청년》을 발간했다는 푯말이 하나 서 있다.
그 옆에 신규식 선생의 푯말을 덧붙이는 일이야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임시정부 역사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주면 좋겠다.
2019년 3.1 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작
국내 최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순례길 가이드북『임정로드 4000km』
"일생에 한 번은 '백범의 계단'에 서라!"
이 책은 국내 최초 임시정부 순례길 여행가이드북이다. 중국 상하이에서부터 충칭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동했던 지역을 그대로 따라가며 기억 속에 묻힌 장소를 꺼내어 소개한다.
대한민국이 탄생한 '상하이 서금이로'부터 영화 <암살>, <밀정>의 약산 김원봉이 독립군을 훈련시켰던 '난징 천녕사' 등 임시정부 사적지를 소개하며 독자들이 직접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진다." 역사의 진실이 아무리 귀중해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소용없을 것이다.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떠나는 임정로드 여행은 치열했던 우리 역사를 기억하는 가장 특별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