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후 연재] #09. (번외편) 일본 가나자와 윤봉길 의사 암장지
1932년 4월 29일, 25살의 청년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뒤 대한민국의 역사는 바뀌었다. 한 청년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다시 한번 세계만방에 알린 것이다.
그러나 윤 의사의 마지막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일제는 윤 의사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고문과 협박으로 괴롭혔다. 무엇보다 일제는 윤 의사의 죽음이 몰고 올 폭발력이 두려웠다.
사형을 미루고 미뤘다. 결국 윤 의사의 사형 집행은 상하이에서 오사카로, 9사단 사령부가 있던 가나자와까지 옮겨진 다음에서야 집행됐다.
애초에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의거 후, 상하이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됐었다. 폭탄 투척 현장인 훙커우 공원에서 공개처형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윤봉길의 순국이 독립운동가들을 더 자극할 수 있다는 점과 국제여론의 악화를 우려했다. 상하이헌병대에 구금되어 있던 윤 의사는 1932년 11월 18일 일본 우편수송선으로 고베항을 거쳐 오사카성 내에 있는 육군 위수형무소로 옮겨졌다.
이후 윤 의사는 이곳에서 순국 직전 마지막 한 달 동안 독방생활을 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렇다면 오사카로 압송된 윤 의사는
왜, 굳이, 기차로 멀리 가야 하는 가나자와에서 사형을 당한 것일까?
윤봉길의 최후에 깃든 일제의 비열한 의도
윤 의사 의거로 사망한 시라카와 대장은 일본 육군 9사단장 출신이었다. 또한 현장에서 중상을 입은 우에다 중장도 당시 9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제 9사단은 상해파견군의 주력부대로 중국 침략의 선봉이었다.
결국 일제는 윤 의사 의거에 대한 복수 차원에서 9사단 주둔지가 있었던 가나자와성에서 압송해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일제는 당시 윤 의사의 사형 집행 시간도 시라카와 대장이 사망한 오전 6시 25분과 맞출 정도로 윤 의사의 사형 집행을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실제 사형 집행 시간은 오전 7시 30분이었는데, 이는 중국 상하이가 일본보다 1시간 빠르다는 시차까지 고려한 결정이었다.
윤 의사는 1932년 12월 18일, 오사카헌병대에 의해 가나자와로 이송되었고, 도착 다음 날인 1932년 12월 19일, 미츠코지산(三小牛山) 육군작업장에서 미간에 총상을 입고 순국했다.
쓰레기장에서 발견된 윤봉길 유해
해방 후 김구 선생은 윤 의사를 포함한 삼 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를 찾아 국내로 봉환하고자 했다. 이를 재일거류민단장 박열 선생에게 의뢰하였고 1946년 3월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을 조직하였다.
서상한 선생을 대표로 한 유해발굴단은 재일본조선인연맹 소속 청장년들과 육군묘지로 향했다. 유해발굴단은 가나자와 현장에 도착했지만 암장지를 찾을 수 없었다.
윤 의사의 유해는 관에 넣어져 노다산(野田山) 육군묘지에 인접한 '가나자와시 공동묘지에 매장했다'고 일제의 보고서에 기록되었지만, 거짓말이었다.
수일씩 엉뚱한 곳만 파며 시간을 보냈다. 결국 "윤봉길의 묘소가 발견될 때까지 묘지 전체를 파헤치겠다"며 당시 간수였던 시게하라(重原)에게 말하자, 그때서야 어쩔 수 없이 윤 의사가 묻힌 암장지를 실토하였다.
윤 의사가 십수 년을 묻힌 암장지는 쓰레기 처리장 부근으로 묘지에서 벗어난 곳이었다. 문제는 이곳이 관리사무소 앞 좁은 통로라는 사실이다. 일부러 유해 위로 사람들이 걸어가게 방치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암장지 바로 위에 자리한 묘역관리소는 윤 의사의 암장지를 한눈에 조망하는 위치에 만들어졌다.
왜 그랬을까? 일제에 끔찍한 공포를 안긴 윤 의사가, 혹여 그것이 유해일지라도,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건 아니었을까. 1946년 윤 의사 유해는 이봉창, 백정기 의사와 함께 효창원에 모셔졌다.
윤 의사의 암장지를 지켜온 이들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윤 의사의 암장지를 지킨 사람들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특히 재일교포 고 박인조 선생을 더 주목해야 한다. 박인조 선생은 이력이 특이하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원이었다. 말 그대로 운이 좋아 살아났다고 한다. 이후에 그는 속죄하면서 살아갔다. 속죄의 마음을 붙잡고 윤 의사 암장지에 섰고 암장지를 단장하면서 지켜나갔다.
가나자와 외곽에 위치한 윤 의사 암장지와 비석이 알려진 건 오로지 선생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끈질긴 헌신과 노력으로 1992년 암장지에 비석이 세워졌다. 윤 의사가 거사 전에 남긴 문구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 장부는 거사를 위해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 새겨진 비석도 암장지 터 한편에 세워졌다.
박인조 선생은 생이 다할 때까지 윤 의사의 암장지를 지키다 지난 2009년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윤 의사 암장지에서 안쪽으로 30m만 더 들어가면 공동묘지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윤봉길 의사 암장지는 박인조 선생의 조카이자 <윤봉길의사암장지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현택 선생의 주도로 잘 보존되고 있다.
암장지에 가면 꼭 박인조 선생의 무덤까지 가 인사드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이하게도 윤 의사 암장지는 가나자와시 한국어 홈페이지에 관광명소로 나온다. 일제와 윤 의사의 관계를 생각하면 굉장히 특별한 일이다.
암장지적비 건립에는 당시 가나자와 시장이었던 야마데 다모쓰의 묵인때문에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야마데 시장은 역사적 책임을 무겁게 여기는 사람으로 윤 의사에 대한 일제의 만행에 책임을 통감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가나자와 지역 시의원인 모리 가츠토시 의원(일본 사회민주당)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한국 청년들이 단체 방문을 할 때마다 윤 의사의 암장지를 찾아 "진정한 의미의 과거 청산은 아직도 과정에 놓여있다"며 "과거 침략전쟁을 일으켰던 일본군은 '침략군'으로 불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우리 조상들이 당신들의 조상에게 험난한 경험을 하게 한 점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사과까지 했다.
일본 정치인에게 직접 듣는 진솔한 사과, 이들의 노력 덕분에 지금까지 윤 의사의 암장지가 더 기억되고 유지되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갈까
주소 :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노다쵸 노다야마 4-1 휴게실 부근 (石川県 金沢市 野田町 野田山 4-1)
일본에 있는 윤 의사 관련 유적 중 난이도만 따지면 가장 상급이다.
물론 자위대 훈련지 내에 있는 순국지가 가장 방문하기 어려운 장소지만, ➌ 윤 의사 암장지 역시 가나자와 외곽 공동묘지에 위치한 탓에 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필자의 경우, 가나자와 시내 유니조 호텔에서 코하라 방면 (小原 石川県 方面) 21번 버스를 타고 약 30분 정도 암장지 근처인 '노다 버스정류장(지도의 Nodahigashi Bus Stop)'까지 이동했다.
이후에 노다야마산 ➊육군묘지까지 도보로 이동한 뒤, ➋ 노다야마산 입구에서부터 15분 이상을 걸어 들어가 윤 의사 암장지를 찾았다.
앞면의 아래 지도를 보기 바란다. 윤 의사 암장지가 있는 공원묘지를 확대해놓았다. 윤 의사 암장지와 더불어 윤봉길 의사의 순국기념비와 박인조 선생의 묘가 다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윤봉길 의사의 순국기념 비석은 암장지에서 걸어서 4분 거리에 있다. 윤 의사의 순국지 자리에서 기념할 수 없는 탓에 암장지 인근에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회>와 <매헌윤봉길의사 의거 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도해 1992년 4월 21일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혼자 방문해서 순국기념비를 찾는 일도 결코 쉽지는 않다. 암장지로 들어온 작은 길 반대편으로 돌아 200m 정도 갈림길이 나올 때까지 걸어 내려가야 한다.
이 갈림길에서 좌측을 바라보면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윤 의사 순국기념비를 확인할 수 있다. 길 찾기가 어렵다면 윤 의사 암장지 뒤편에 있는 관리사무소에 가서 현장관리인에게 순국기념비 위치를 물어보자. 암장지에서 순국기념비로 향하는 방법을 '일본어'로 자세히 알려준다.
주의사항 및 팁
윤봉길 의사 암장지는 가급적 오전에 방문했으면 한다. 워낙 깊은 곳에 있는 탓에 낮에도 상당히 어두워서 일정을 고려하면 넉넉하게 오전에 방문하는 편이 유리하다.
윤 의사 암장지를 시작으로 박인조 선생 묘, 순국기념비, 자위대 부대 내 순국지까지의 일정을 하루에 소화하는 것이 좋겠다.
특히 암장지를 시작으로 순국지까지의 일정은 차가 없으면, 반드시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 튼튼한 신발을 신고 다니자. 산속인 만큼 봄부터 가을까지는 모기도 만만치 않다. 모기 기피제와 바르는 모기약 등을 준비하자.
개인적으로 윤 의사 암장지를 찾을 때 소주(혹은 정종) 한 병 준비해 갔으면 좋겠다. 윤 의사를 생각하며 암장지 주변에 술 한 잔 올린 뒤 인사드려보는 것은 어떨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윤 의사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밀려온다. 물론 윤 의사 암장지까지 자발적으로 찾아간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도 생겨난다.
윤 의사 암장지에 가면 박인조 선생의 조카인 박현택 선생의 연락처가 있다. 그는 '설명이 필요한 경우 10분이면 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적어 놨다. 고마운 일이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박현택 선생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갔으면 한다. (박현택 선생 연락처 : 090-6043-2919)
2019년 3.1 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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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지 않는 길은 사라진다." 역사의 진실이 아무리 귀중해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소용없을 것이다.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떠나는 임정로드 여행은 치열했던 우리 역사를 기억하는 가장 특별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