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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소픽 Jan 28. 2019

청년들이여, 임정로드로 떠나라!

[출간 후 연재] #10. (에필로그) 2019 임정로드 여행을 떠나자!

솔직히 프로젝트 <임정>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독립은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트린 원자폭탄 두 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애국지사들의 걸음을 부인할 순 없지만 직접적인 요인은 그렇게 여겼다. 


상하이를 시작으로 자싱,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구이린, 치장, 충칭을 돌았다. 한국에 돌아와선 매일같이 효창원에 들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 산 애국지사들의 걸음을 좇았다. 원고를 작성하면서는 부족함을 느껴 일본 오사카, 교토, 가나자와에 다녀왔다. 그럴수록 더 강한 의문이 들었다.


우리의 해방은 정말로 미국이
일본에 떨어트린 원자폭탄 두 방 때문일까?


당연히 아니었다. 



김구, 안중근, 안창호, 이동녕, 이시영, 차리석, 송병조, 김철, 여운형, 조소앙, 신규식, 박은식, 김원봉, 신채호, 윤세주, 윤봉길, 이봉창, 박열, 백정기, 김익상, 김산, 오성륜, 김시현, 김상옥, 박재혁, 김지섭, 정정화, 김의한, 엄항섭, 조성환, 이육사, 주푸청(褚輔成), 이회영, 신익희, 조명하 그리고 장준하……. 



임정로드를 진행하며 우리가 잘 몰랐던 애국지사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됐다. 이들이 걸어간 길을 좇으며 대한민국의 독립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깨달았다.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제대로 익히고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핑계는 차치하더라도, 왜 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인가 하는 아쉬움이 먼저 들었다. 

중국 현지 취재를 진행하는 내내 안타깝고 미안한 감정이 이어졌다. 김구 선생의 유적지를 찾아도, 김원봉 장군의 흔적을 좇아도 다르지 않았다. 제대로 몰랐기에 죄송했고, 대한민국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온전히 지켜내지 못해 미안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켜낸 수많은 애국지사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옳은가'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대부분의 유적지가 방치되고 폐허가 됐다. 해방 후 수십 년 동안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회조차 없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앞장서야 할 정부는 '1948년 나라가 건국됐다'며 왜곡하고 방해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이 사실을 제대로 알릴 수 있을지 걱정됐다. 이 책을 끝까지 쓴 이유다. 

감히 한 문장으로 우리의 독립이 이렇게 이뤄진 것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잘 몰랐던 애국지사들이 목숨 걸고 도전했기에, 끝까지 버텼기에, 우리 손으로 해방을 쟁취한 것이다. 좀 더 많은 청년이 애국지사들의 걸음을 직접 좇았으면 하고 바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는 것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애국지사들이 걸은 발걸음을 좇았으면 한다. 임정로드는 이미 완성됐다. 

김구 선생과 문재인 대통령이 섰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 백범의 계단에 서 보면 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 나 역시 함께하고 있음을. 수십 년 전 애국지사들이 걸었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래서 꼭 찾아가 보기를 바란다. - 김종훈 (오마이뉴스 기자 / 프로젝트 <임정> 기획 /  『임정로드 4000km』 집필)




허망함을 감출 수 없다


투어를 마치고 편집을 앞둔 상태에서 느낀 바를 말하자면 힘들었고, 고단했고, 괴로웠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21일간 쉼 없이 달려왔고 숙소에 들어가서도 바로 쉴 수 없었다. 마치 임정 요인들의 발자취처럼 무겁고 어려웠다. 

하지만 정말로 힘들었던 건, 힘들게 찾아간 임정 요인들이 머물렀던 터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을 보며 느낀 허망함이었다. 

첫날부터 그랬다. 대한민국의 시작인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처음 세워진 곳은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서금이로(구 김신부로)에 있었다는 것만 알았다. 임정 요인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게 영광스럽고 즐거우리라 생각했던 나는 첫날부터 무거운 마음일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현장에서 참 많이 울었다. 가장 많이 울었던 곳은 윤봉길 의사 의거지였다. 루쉰공원 매헌기념관에서 윤 의사 관련 영상을 본 나는 눈물을 흘린 게 아니라 쏟았다고 할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제대로 감정을 주체하기조차 어려웠다. 죄송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의 무지가 너무 미웠다. 무엇보다 이제야 방문했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이날 존경을 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눈물을 흘리는 일뿐이었다. 윤봉길 의사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임정로드 투어는 삶의 태도를 바꾸게 했다. 역사에 무지했던 나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쉽게 얻은 현재가 아니기에 임정 요인에게 느낀 죄송함이 진심이라면 앞으로 삶을 잘 버텨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게 비할바 못 되지만 현재에 충실하며 기억하고 존경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 김혜주 (오마이뉴스 기자 / 『임정로드 4000km』 취재팀)




20박 21일, 상하이부터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흔적들을 방문하면서 전 과정을 영상으로 세세하게 기록해야 했다. 

나와 회사 동료 두 명, 그리고 청년 여행가 한 명, 성격도 제각각인 네 사람이 모여 총 6000km의 거리를 이동하면서 벌어질 이야기들이 촬영·연출자 입장에서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출발 전 회의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사실 나의 역할에 감이 오질 않았다. 상황을 기록하는 객관적인 사람으로 가야 할지, 개입하여 함께 떠나는 사람으로 가야 할지부터 모호했다. 4명의 로드다큐를 온전히 보여주려면 그만큼 카메라를 운용할 인력이 더 필요한데 우리가 가진 예산상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틈틈이 상황을 기록하며 장면 연출을 위한 최소한의 개입만 했다. 여정을 이어가며 스스로 정한 규칙이었다. 

청년 여행가 최한솔 씨는 유일하게 중국어가 가능한 사람이다. 중국 일정에서 필요한 모든 통역을 도맡아 했다. 김혜주 기자는 자기 몸집만 한 가방을 앞뒤로 메고 나와 함께 임정의 흔적들을 담아내야 했다. 그날 찍은 영상을 백업하는 일도 쉽지 않았는데 작업은 새벽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김종훈 기자는 행여나 임정 요인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을까 밤잠을 설쳐가며 내용을 수십 번 재검토했다. 

나 역시 일인 다역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더더욱, 누구 하나 아픈 사람이 생기면 안 된다고 서로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제일 먼저 내 몸에 이상이 왔다. 

비 오는 날 촬영으로 무리한 탓인지 몸이 으스스했다. 잠시 스쳐가는 소나기이길 기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는 심각해졌다. 어느새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팀원들은 전체 여정을 위해 차라리 병원에 입원할 것을 권했고 결국 임정 프로젝트 시작 5일 만에 나는 몸살감기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창피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나려 했다. 잊혀가는 임정의 역사를 취재할 임무를 생각하니 마음 편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링거를 맞는 내내 수없이 내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길 기도했다. 그러지 않아도 부족한 시간인데 아프다고 이렇게 누워서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몸이 불편하더라도 마음만은 편하기 위해 다음 날 일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진행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러한 다짐에는 약산 김원봉 선생이 큰 계기가 됐다. 그의 이야기는 되뇔 때마다 가슴을 후벼 팠다. 처음 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밀정>, <암살>이라는 두 편의 영화였다. 젊은 시절은 정말 화려했고 대단했다. 하지만 그의 말년과 살아온 흔적들은 고요하고 슬펐다. 

당시 현상금 60만 원이 걸렸던 백범 김구 선생보다 더 많은 현상금(100만 원)이 걸렸을 만큼 일제에 큰 위협을 줬던 인물이었음에도 자발적으로 월북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의 공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더 슬픈 건 그가 살았던 중국 현지의 집은 기념 장소가 아니라 시장 한가운데 허름한 옷가게로 쓰이고 있었다. 그마저도 폐업이 눈앞이다. 

허름한 옷가게로 변한 충칭 김원봉 집터


목숨을 걸어가며 일제로부터 해방을 위해 반평생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쳤지만 해방 후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인 노덕술에게 갖은 수모를 당했다. 이후에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더 늦춰지면 안 된다. - 정교진 (오마이뉴스 기자 / 『임정로드 4000km』  취재팀)




지난 4월 초 남미여행을 즐기고 있을 때 우연히 인터넷에서 임정로드 투어에 함께할 1인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평소 역사 공부에 흥미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지원서를 작성했다. 

수일 후 "함께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김종훈, 정교진, 김혜주 기자를 만났다. 우연히 지원하게 되었지만 진심을 다해 내 의지와 능력을 어필했고 좋은 결과로 이어져 세 사람과 20박 21일을 동행하게 되었다. 

출발 전 팀원들과 네 번의 만남을 가졌다. 부족하지만 최대한 노력해가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공부도 하고 임정로드를 계획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출발 전에는 역사 답사를 간다는 생각과, 내가 중요한 일을 한다는 생각에 마냥 설레기만 했다. 다만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다른 팀원들을 대신해 통역을 도맡아야 한다는 점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나의 역할은 뚜렷해졌다. 중국에서 약 일 년 반 동안 생활했던 경험이 유용했다. 같은 아시아권이라도 중국문화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른 나라니까~'라고 생각하고 바라보아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들이 많았다. 매 순간 충격받은 팀원들에게 "중국은 이런 문화가 있어서 그래요"라고 설명했다. 



팀원들은 설명을 듣고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특히 문이 없는 화장실을 경험하고, 중앙선을 넘나드는 택시기사들의 운전에 놀라고, 정해진 출발 시각보다 먼저 출발해 버리는 기차에 당황했다. 


그러나 힘들어할 수만은 없었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고생한 만큼 '임정 요인들도 이렇게, 아니 이것보다 훨씬 더 힘든 생활을 하셨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답사지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없는, 심지어 관광지도 아닌 곳에 갈 때마다 방치된 역사적 현장들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내가 왔다 간다고 변화가 있을까, 이미 늦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내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늦으면 찾는 사람 없이 잊힐 수밖에 없다. 움직여야 변화한다는 말을 믿는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작은 움직임들이 생기길 기대한다. - 최한솔 (중국어 통역 / 『임정로드 4000km』 참가자)



필로소픽 출판사는 특별히 아래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9년 3.1 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작
국내 최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순례길 가이드북『임정로드 4000km』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일생에 한 번은 '백범의 계단'에 서라!"


이 책은 국내 최초 임시정부 순례길 여행가이드북이다. 중국 상하이에서부터 충칭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동했던 지역을 그대로 따라가며 기억 속에 묻힌 장소를 꺼내어 소개한다.


대한민국이 탄생한 '상하이 서금이로'부터 영화 <암살>, <밀정>의 약산 김원봉이 독립군을 훈련시켰던 '난징 천녕사' 등 임시정부 사적지를 소개하며 독자들이 직접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진다." 역사의 진실이 아무리 귀중해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소용없을 것이다.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떠나는 임정로드 여행은 치열했던 우리 역사를 기억하는 가장 특별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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