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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Oct 28. 2015

아담의 이름 짓기, 선악과, 원죄. 그리고 불교의 무명

만들어 보면 기독교와 불교의 접점이 여럿 있을 수 있다, 꼭 그 접점이 실제 있거나 정답이라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접근에선, 기독교 성경의 '창세기'에서 아담이 사물과 대상들에게 행했던 '이름 짓기'처럼 선명한 부분은 없으리라. 


불교의 핵심이, 말하자면 '불이(둘이 아님, 다르지 않음)'의 관점으로, 본래 나뉨 아닌 실체를 둘 이상으로, 그렇게 다름으로 여기는 '분별(심)'에 대한 통찰일진대, 세상 모든 만물에 분별을 위한 '이름 붙이기(개념화)'를 행한 아담과 이브의 행위가 바로 모든 '무명'의 시작인 셈이다.(여기서의 '무명'은 몰라서 무명이 아니라, '본래 아닌 것을 그렇다고 하면서 일어난 오해와 착각'의 결과적 무명을 말한다) 


아담의 그 분별심의 절정이 말하자면 '그냥 그대로'인 모든 것을 '옳고 그른 것'으로 가르는 '선악의 분별(선악과)'의 사용이었고 이것이 사실상의 '원죄'라면 원죄인 셈이다. 흥미롭게도 불교 쪽에서는 선불교 6조인 혜능의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이 이 부분과 연결된다.


사실 분별 자체는 결코 '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아주 효율적이고 지혜로운 기능일 뿐이겠다. 뇌가, 인지가 진화할 수록 분별 기능은 더 정밀해진다. 여기에 '맞다, 틀리다'만 붙지 않으면 된다. 아니 '맞다, 틀리다'도 다만 하나의 '만들어진 분별'일 뿐이므로 이 역시 잘 쓰면 될 일이다. 그러므로 '맞다, 틀리다'도 사실은 아무 문제 없다. 오직 분별을 '절대화'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물론 이 '절대화'는 인간이 일으킨 모든 개념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치관, 신념, 추상적 개념, 감정적 대결 ' 등에서 불필요한 충돌과 부작용이 많이 일어난다. (물론 효용성과 실용성에 있어서의 분별, 개념화는 그것대로 충분히 의의가 있으며 잘 사용하면 된다. 오히려 불필요한 절대화 등이 없으면  없을수록 더 잘 활용될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통찰의 중요도가 어느 정도냐면, 이 부분에서만 어느 정도 선명해져도 인류 전체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정도이다. 특정 개인이 이 통찰에서 '돌이켜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각성'이 일어나면, 그것이 소위 말하는 '깨달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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