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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Apr 28. 2020

'나'를 무엇과 동일시할 것인지 선택해 보라

'나는 인간 아무개이다'라는 동일시는 이제 식상하다

나를 무엇과 동일시할 것인지

선택해 보라.


"나는 무엇무엇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을 하는 이유는,

우리는 전혀 나를 무엇과 동일시할 것인지

'선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세상이 우리에게 준 하나의 선택을

채택할 것도 없이 무작정, 무조건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제안해 보는 것이다.

제안받아 보는 것이다.


'나를 무엇과 동일시할까?'


'나는 무엇이다'


/


우리가 하고 있는

'능동적 선택이 아닌 무조건적인 동일시'는

"나와 나와의 동일시"이다.

우리 모두가 자동으로 행하고 있는 그 하나의 짓거리.


간단히 말해 '나는 인간 아무개 누구누구이다'라는 동일시.


인간이라는 설정에 바탕해서

이 한 몸뚱이 혹은 의식 개체를

'나'라고 하면서 나와 동일시한다.


그런데 의문을 가져보자.


왜 나는 이 '아무개 나'라는 인간 개체와만

동일시는 해야 하는가?

다른 여지, 다른 가능성, 다른 선택은 없는가?


당연히 있다.


하나의 동일시가 가능하다면

똑같은 원리로 다른 것과의 동일시도 가능하다.

다만 그 가능성을 애초에 생각해 보지도 않기에

안 되는 줄, 못 하는 줄, 없는 줄 알고 있을 뿐.


/


주의!


나를 '인간 아무개'가 아닌 다른 것과 동일시한다는 말은

또 다른 개체나 대상, 설정과 동일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나는 가족과 동일시하든,

어떤 집단과 동일시하든,

어떤 민족과 동일시하든,

어떤 종과 동일시하든,

어떤 신과 동일시하든,

어쩐 존재, 믿음, 신념, 영혼, 에너지, 허공, 무와 공과 동일시하든

애초에 '인간 아무개'와 동일시하던 것과

같은 행위다.


그 '인간 아무개' 자리에 또 다른 '아무개'가

들어앉는 것에 불과하니까.

우선 이것을 선명하게 눈치채야 한다.

그래서 단지 그 대상만 바뀌는 동일한 동일시를

무의미하게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필요할 때는 유용성을 위해 언제든

나와의 동일시 대상을 바꿀 순 있다.

다만 그 동일시를 절대시 하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는 것.)


/


그럼 나를 무엇과 동일시해보라는 말인가?


'또 다른 나'가 아니라

위에서 말한 그 모든 변형된 혹은 확장된 '나'들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그 자리, 그 배경, 그 원리.


어떤 나가 생겨나고, 경험하고, 고통받고, 기뻐하고, 사라지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늘 항상 이미 있는 그 자리, 배경, 원리.

나와 상관없이, 나를 넘어서 있는.


그것과 동일시해 보는 것이다.


"어, 그 자리, 배경, 원리를 우리가 알 수 있나? 느낄 수 있나?

어떻게 느껴도 그것은 위에서 말한 그 '변형, 확장된 나'가 될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지?

모순 아닌가?"


맞다. 모순이다.

그럼 어떻게,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

아는 순간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하면 된다.


내가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이 믿어지든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변형, 확장된 나'이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알아채면서

더 이상 어느 지점에서든, 어느 자리에서든 멈추어서

'그래. 여기가 나다. 이것이 나이지'라고 하지 않으면 된다.


사실 위에서 말한 그 자리, 배경, 원리는

그것이 실제의 나가 아니라

이것, 즉 '더 이상 나를 나로만 여기지 않는 것'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도구로서 제시되는 것.

아주 유용하며, 효과적인 도구.


/


이 능동적 동일시의 선택을 해 보는 것이 뭐가 좋은가?


이 선택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처음으로

'더 이상 내가 나로만 존재하는,

내가 나와만 동일시하는 그 감옥 아닌 감옥'에서

벗어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건 단지 생각만이지 않은가?

그 선택, 그 동일시를 해 본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나인데?"

맞다.

단지 생각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나이다. 나는 인간 아무개이다'는 동일시도

'단지 생각'일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같은 생각일 뿐인데

유독 하나의 생각만 절대시하고

다른 선택, 다른 가능성은

애초에 없다고, 불가능하다고, 안 된다고

여길 필요가 있는가?


/


자, 읽지만 말고 실제 해 보자.

당신을 무엇과 동일시해 보겠는가?


'인간 아무개'와?


그건 이미 너무나 많이 해 왔다.

그것도 유용하고 도구로 잘 사용되지만

이젠 다른 것도 해 보자.

해 봐도 아무 일이 없다.


다른 개체, 집단, 대상, 믿음, 신, 무, 공 등과 동일시하는 것도

많이 해 왔다. 더 이상 신선할 게 없다.

(필요할 땐 물론 계속하자)


나를 떠올리면서

어떠한 새로운 나, 새로운 대상, 새로운 상태가 떠올라도

그것에 다 무심하면서, 그냥 살짝 밀어 놓으며

그 모든 것과 상관없는 자리, 배경, 원리.

그것을 떠올려보며, 느껴보며

그것과 나를 동일시해 보라.


'떠오르는 어떤 것도 내가 아니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아닌 그것이다~'라고 해 보라.


천천히, 부드럽게, 음미하듯이, 편안하게, 여유롭게.

되는 만큼, 느껴지는 만큼.


그러면서 느껴지는 만큼, 되는 만큼

음미해 보라.

그러한 동일시를 할 때 느껴지는 여러 좋은 느낌을.


명상하듯이.

아니, 이게 바로 가장 의미 있는 명상 중 하나이다.


/


처음엔 별 느낌 없더라도 그것도 음미하고,

약한 느낌이 들더라도 그것도 음미하고,

그리고 뭔가 좀 더 강한 느낌이 들면 또 잘 음미해 본다.


주의할 것은, 이것은 '직접적 앎'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직접적 앎'의 정체, 본질을 눈치채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실제 내가 그 자리, 배경, 원리가 되어서 혹은 그것과 동일시해서,

그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엇을 상상하고 느껴도 그것이 아니므로.

'간접적인 앎'으로서 오는 자각, 각성, 느낌이다.

(이 직접성을 넘어서는 '간접성'의 비밀을 눈치채는 것이 하나의 핵심이다.)


'간접적인 앎'이지만

그 어떤 직접적인 앎보다도

더 선명하고, 강렬하고, 돌이켜지지 않게 확연함을

만끽하면서.

(간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직접성'의 허상을 깨치는 게 핵심이다)


그것이 진정한 나이다.

그것이 진정한 그대이다.


그 어떤 나도 아닌 나.


더 이상 '나'라는 설정에

의존할 필요 없는 나.


/


나를, 그리고 당신을 그 무엇이라 해도 우리는 그것이 아니다.


두려움, 공포, 불안, 걱정, 슬픔, 허무, 공, 죽음.

기쁨, 쾌락, 욕망, 평화, 안전, 무심, 탄생과 삶.


나는, 그리고 당신이 그 무엇도 아닐 때

이제 그 너머에 있는 그 무한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그 무엇, 그 자리, 그 배경, 그 원리.


'나'라고 할 것이 없지만 정히 '나'라고 해 볼라치면

바로 그것이 나이다.


궁극적으론 '나는 그 무엇, 자리, 배경, 원리'라고 할 것조차도 없지만

하지만 간접적으로 그것을 의식하고, 느껴보고, 그것이 되어볼 수 있다.


내가 그것이니까.

당신이 그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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