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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May 01. 2020

'물질은 입자인가, 파동인가'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

애초에 '물질'이란 것이 만들어진 설정임을


'물질은 입자인가, 파동인가'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물질' 자체이다.

(주: 이 글의 내용은 '관념론'이 아니다. 관념론과 실재론 등도 모두 아래의 '설정'에 포함된다. 이 글을 관념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이다. 이 글은,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품으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앎, 인간의 개념과 분별의 허상성을 들어내기 위해 나는 '설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오늘은 그중에 '물리적 개념'을 소재로 사용한다.


먼저 인간이 사용하는 물리적 개념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설정'임을 눈치채야 한다. (그리고 물리 개념들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개념(앎)'이 그러하다. '인간' 자체(주체)도 물론 그 개념에 포함된다. 지금 이 문단에 사용된 모든 개념들도 물론.)


예를 들어 '입자-파동 상보성'은 인간에게 상식적으로 많은 혼란을 준다. 물질이 입자성을 보이며 동시에 파동성을 보인다는 것. 이것이 말해주는 근본적인 통찰은, 현재 인간이 파악한 물질의 근본 양태로서의 '입자'와 '파동'이 실재를 그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볼 수 있는 '설정'으로서 '다만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진실이다.  


물질은 물질은 입자 혹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다. 입자니 파동이니 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인지, 인식이 포착할 수 있는, 만들어 낼 수 있는 '임시적 설정'에 불과하다. 즉 가정을 해 보자면, 다른 은하의 다른 지성체가 있다 할 때 그들은 전혀 다른 개념(설정)으로 물질을 포착하고 표현하고 있을 수 있다. 그들의 그 설정 또한 '실재 물질' 그 자체는 아니다. 다만 그들은 그렇게 포착하고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 '물질'은 실제 무엇일까? 입자도 파동도 모두 '만들어진 설정'에 불과하다면 그러면 우리는 물질의 본래 양태를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일까? 이론적으론 그렇다. 우리가 '물질은 무엇이다. 물질의 근본 양태는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그저 또 하나의 설정이 될 뿐이기에. 그러면 끝이 없는 과정이 된다.(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칸트는 '물자체는 알 수 없다'는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


자, 우리는 이제 여기서 '물질'이라는 놈도 설정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칸트가 말한 '물자체'도 마찬가지다. 그것 역시 다른 모든 개념(앎)과 같은, 특별할 것 없는 하나의 '설정'일 뿐 물자체 같은 건 실재하지 않는다. '물자체'라는 설정은 아무 문제 없다. 유용하게 잘 쓰면 된다. 단, 그것을 절대시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물질이 무엇인지 혹은 물질의 근본 양태가 있어 그게 무엇인지 그걸 찾거나 발견하는 게 아니다. 입자나 파동만이 아니라 '물질'이라는 것조차도 '만들어진 설정'에 불과하다. 만들어진 놈의 근본이나 정체나 본질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이걸 돌이켜지지 않게 눈치채야 한다.


우리가 하는 것 혹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물질은 무엇이다' 즉 '물질은 입자이다. 파동이다'라는 설정을 만들고 사용해 보는 것이다. 이왕이면 좀 더 유용하게.(그 유용성은 실용적인 것에 중점을 두지만, 꼭 그것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예로, '재미'와 '여흥'이 유용하면 그걸 목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럼 이 모든 것, 인간의 모든 앎과 지식 그리고 심지어는 인간 자체까지도 모두 '만들어진 앎, 개념, 설정'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그럼 모두 허상이고 환상이고 허무하다는 말인가?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일단은 그 '허상, 환상, 허무'들도, '사실'이라는 것도 다만 만들어진 설정에 불과함을 먼저 말하면서) 아니다. 그렇게 들어갈 필요 없다.


'환상이냐 사실이냐'를 따지는 것은, 그 질문하는 환상과 사실이 실재하는 것일 때 가능하다. 그러나 그 둘도 다른 모든 개념, 설정과 같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어떤가? 이것이 보이는가?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유용성'이다.


'만들어진 것'이지만 '유용'할 수 있다. 환상이냐 사실이냐 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러므로 되도록 유용하게 만들어 잘 사용하면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만들어진 것'을 절대시, 사실시, 절대화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 된다. 즉 '유용하지만 절대는 아니다'라는 깨우침이다. 사실성(절대성)과 유용성을 구분할 수 있으면 된다. 어떤 면에선 이것이 가장 핵심이다. 이러한 각성의 결과로 오는 자유와 해방. 그리고 (본래 문제가 아닌) 문제들의 해결.


여기서 말하는 자유와 해방은, 그런 게 있어서 그것을 성취하거나 쟁취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불필요하게 스스로 잡혀 있던 감옥 아닌 감옥에서 벗어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냥 본래의 상태가 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모든 말조차도 '다만 만들어진 설정'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맞다. 이 모든 말도 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어차피 설정이고 말인데?


그 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설정성 등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말의 결과, 그 설정의 결과로 무엇이 오느냐가 핵심이다. 계속 말의 감옥, 생각의 감옥, 앎의 감옥, 설정의 감옥에서 맴돌이만 하게 하느냐, 아니면 결국 그의 정체를 눈치채게 되어 (그것을 여전히 잘 사용하지만) 동시에 그에서 벗어나게 되느냐. 말, 생각, 개념, 설정이 후자에 사용된다면 그러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어떤 논리적 모순, 역설, 한계 등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마지막으로 다시, 여기서 말하는 개념, 설정, 앎, 생각에는 애초에 말한 물리학, 물리학적 개념들만이 해당되는 게 아니다. 인간 인식, 인지, 감각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인간의 모든 앎'이다. 그리고 심지어 '인간 자체(주체)'라는 앎 마저도.


이러한 것을 단지 개념과 말로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자각하는 것, 각성하는 것, 통찰하는 것. 


돌이켜지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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