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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May 05. 2020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갈 때, 그 하나는

'모든 것'과 '하나'는 같은 것이다. 자, 그러면 무엇이 깨쳐지는가?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갈 때,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여기서 '모든 것'은 인간의 모든 앎을 말한다. 모든 만물이라고 해도 된다. 어차피 그 만물이란 것이 인간의 앎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물리적 대상'들과 '인간의 앎(언어적, 비언어적 모든 앎)'은 다른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할 수 있지만, 그 '모든 물리적 대상들'로 드러나는 감각 자체와 인식 자체가 인간에게는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두 인간의 앎의 영역 안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실제 바깥에 무엇이 존재한다 해도 '인간은 인간의 조건대로 감각 및 인식하므로, 바깥의 있다 여겨지는 무엇과 상관없이 인간에게는 그  감각되어진 대로, 인식되어진 대로가 세상이고 우주고 사실이고 실재이다'. 


그러므로 '물리적 대상'과 '인간의 앎'은 같은 것이 된다.


그 '바깥에 있는 무엇(실재, 사실, 실체)'을 인간은 포착할 수 없다. 포착한 순간 '다만 인간의 감각과 인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감각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의 스크린에 상으로 맺힌 것, 즉 인식 자체'이다. 이 부분을 잘 눈치채야 한다.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때는 단순히 그 대상과 현상들에 대한 이름과 개념들만을 말하는 게 아님을 주의하라. 인간이 오감으로 느끼는 그 모든 감각적 인식들도 '만들어진 것'에 포함된다. 감각은 일종의 비언어적 앎이다. 나는 이 '만들어짐'을 칭하는 용어로 '설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인간의 오감만이 아니라 기계, 센서 등을 사용하여 그 범위를 확장한다 해도 그 역시 마찬가지다. 측정 범위, 인지 범위만 확장되었을 뿐 역시 '만들어진 것' 즉 '설정'이다.


여기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허공 중에 아무것도 없는데서 그것을 창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감각과 인식이 만들어졌다'는 의미이다. 생각 등의 다만 '추상적인 인식'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물리적 감각'도 포함한다는 것을 포착하는 게 핵심 중에 하나이다. 


유념해야 할 것은, 이 말이 외부에 '실체'가 있어 그 실체에 대한 인간의 '물리적 감각'이 더해진 것이라는 뜻이 아니란 것이다. 아니다. 그 '인간의 물리적 감각과 인식 자체'가 바로 인간이 '실체'라고 여기는 그것이다. 즉 '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실체'라고 느끼는 내부와 외부의 모든 추상적, 물리적 대상들이 다 인간의 물리적 감각과 인식 그 자체라는 말이다. 이것을 착파하는 게 또한 핵심이다.(참고로, 이것을 불교적 표현으로는 '실체가 없다. 자성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주의: 이것은 '관념론'을 말하는 게 아니다. '관념론'이니 '실재론'이니 하는 것도 모두 '모든 것'에 포함된다. 즉 모두 같은 '설정'일뿐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관념론이니 실재론이니 하는 것을 포함하여, 그 모든 설정을 품고 넘어서는 것이다. 주의하라. 


자, 보라. 관념론은 '관념이 모든 것이다'를 실재로 삼는 실재론이며, 실재론은 '실재가 있다'는 관념을 믿는 관념론이다. 관념론이 실재론이고, 실재론이 관념론이다. 둘이 다르지 않다. 핵심은 관념론이냐 실재론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빠져있는 근본 오류(무지, 무명)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그 모든 앎(개념, 분별, 생각)이 결국 '하나(의 양태)'의 변형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상대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 같다는 말이다. 


즉 인간이 가진 모든 앎은, 그 내용만 다를 뿐 '한 가지 현상'으로서 동일하다는 말이다. '모든 것'과 '하나'는 결국 같은 놈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돌아간다'로 표현한다. 이것을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제 그러함'을 깨쳐 알아야 한다. 눈치채야 하고, 돌이켜지지 않게 착파해야 한다. 이것을 자각이나 각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깨달음 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든 것'과 '하나'가 같은 놈이라는 것은 여러 비유로 말해볼 수 있다. 예로, 여러 모양의 그릇이 있을 때 담긴 물의 모양이 달라지지만 그것이 물인 것은 동일하다. '모양'에만 집중하면 '다른 것'이 되지만 동시에 '물'임에 집중하면 '모양만 다를 뿐 같은 물'이 되는 것이다. '모양이 다름'을 무시하거나 없이 여길 필요는 없다. 그것대로 유용하게 사용하되, 다만 항상 그것이 '물'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매번 의식적으로 이것을 유념하거나 떠올리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것이 물'임을 어느 순간 단박에 깨우쳐서 다시는 그 깨우침이 돌이켜지지 않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본래 그러함'을 알아챘기에 잊을래야 잊을 수 없게, 잊고 말고도 없게 되는 것이다. 


/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갈 때,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 하나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그 답을 찾으라는 말이 아니다. 그 답을 하라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감'을 깨우치게 되는 순간, 자동으로 '그러면 그 하나는?'이라는 의문이 따라올 수밖에 없게 되며, 그 순간 그 '하나'의 정체마저 눈치채게 되고, 그리고 마음의 여정이 끝나는 것이다. 이 끝남의 순간은 본인은 스스로 알게 되며, 만약 끝나지 않으면 역시 스스로 알게 된다. 끝나지 않으면 또 다른 의문이나 질문이 나오게 된다. 끝나면 더 이상 묻거나 밝혀야 할 것은 없게 된다. 


먼저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감'이 여실해야 한다. 선명해야 한다. 확실히 보여야 한다. 삶을 살면서, 일상을 보내면서, 여러 행위를 하면서, 경험을 하면서, 공부를 하면서, 상황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나에게 보이는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감'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포착할 수 있어야 하고, 깨우칠 수 있어야 하고, 눈치챌 수 있어야 하고, 알아챌 수 있어야 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삶과 일상 중에 모든 것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무심히 넘기고 있기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무심히 넘기는 이유는, '그냥 그럴려니, 별 의미가 없겠거니, 당연히 그런 것이려니' 하며 지켜보고 경험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무지, 무명, 오해, 착오, 착각'으로 이해하고 있으면서 그 이해가 맞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혼돈은 더욱 깊어지고, 고통도 계속 더해진다. 


'삶이 고(통)'이고 '존재가 고(통)'인 이유는 실제 삶과 존재가 고통이어서가 아니라, 실제와 다르게 보기 때문에 본래는 없는 고통이 생겨나는 것이다. 


일상에서, 관계에서, 학문에서, 뉴스에서, 사회적 사건과 사고에서, 경제와 정치적 일에서, 과학에서, 수학에서, 물리학에서, 철학에서 계속 나타난다. 그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궁금해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나타난 그것이 개체 의식에 자극이 되고, 자각과 각성을 일으킨다. 통찰을 일으킨다. 


이 자각과 각성과 통찰이 상대적인 수준에 멈추거나 머무르면 상대적 깨우침으로 머물게 되고(물론 이 역시 의미가 있다), 어느 순간 마침내 근본 지점으로 연결되며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감'이 선명하게 보이면, 그 순간 그 '하나'도 되돌아 가게 된다. 


어디로? 어디랄 것도 없이. 하나랄 것도 없이. 


이상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갈 때,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하나의 안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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