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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May 06. 2020

실재론(1):인간은 실재론(사실주의)을 넘어설 수 있다

'있음'도 만들어진 것임을 눈치채기

(* 주: 이 글은 관념론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관념론도 실재론(사실주의)도 모두 품고 넘어서는 것이 목적이다. 관념론은 '관념만이 모든 것이다'를 사실로 믿는 사실주의이다. 사실주의는 '사실, 실재가 존재한다'는 관념을 믿는 관념론이다. 둘이 다르지 않다. 이 글은 실재론을 부정하는 글도 아니다.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잡혀 있는 한 믿음의 정체를 눈치채는 게 목적이다. 그 결과로서 오는 넘어섬과 자유로움은, 그것을 목적하거나 바랄 수는 있지만, 단지 '결과'일 뿐이다. 다만 아주 유용한 결과.)


(* 주: 이 글의 연속편인 "실재론(2): 유용하다고 '실재'하는 건 아니다-실재론(사실주의)과 유용성을 구분하라"를 이어서 보면 좋다.)





거의 모든 인간이

자신이 알든 모르든

실재론자 혹은 잠재적 실재론자이다.


인간은 왜 실재론(실체론, 사실주의)을 감히 넘어서지 못하는가?


바로 '사실, 실체, 실재'라는 게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왜 사실, 실체, 실재가 존재한다고 믿는가?

'존재함' 즉 '있음'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있음'은 회의 불가의 절대적 전제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과연 '있음'은 절대적으로 있는가?


/


'있음'도 다만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이 '만들어진 것'을 지칭하는 단어들이 바로

'상, 개념, 분별, 마야, 앎, 설정' 등이다.)


이 '있음'은 인간이 가지는 '언어적 앎'으로서의 '있음'만이 아니라

'비언어적 앎' 즉 '느낌'으로서의 '있음'도 해당된다.

즉 아메바도 '있음'을 느낀다면, 그것도 '만들어진 것'으로서의 '있음'이다.

인간은 이것을 언어로 한층 더 덮어씌웠을 뿐, 같은 것이다.


'있음이 있다고 여기는 믿음'의 정체를 눈치채면,

즉 '있음도 다만 만들어진 것, 즉 상, 분별, 앎, 개념 등'일뿐임을 깨우치면

그래서 '있음'이 다만 유용하게 쓰일 도구일 뿐임을 알아채면

더 이상 '있음의 실체시, 절대시, 사실시, 실재시'는 없게 된다.


'있음'을 이용하지만, 그것이 애초에 무엇임을 잊지 않는다.

그러면 '있음'을 절대시 하면서 발생했던 충돌, 고통, 고민, 불안 등이 사라진다.


연이어서 자연스럽게 '실재가 있다. 사실이 있다. 실체가 있다'는

설정의 정체도 눈치채게 된다.


실재가 있는 게 아니라, '실재가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사실이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이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실체가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마치 무극에서 태극이 나오고, 태극에서 음양, 사상, 팔괘가 나오듯

처음 믿음(착오, 무명, 무지, 분별, 설정)인 '있음'에서

그 모든 것이 나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두 같은 것이다.


처음 '있음'이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후의 '변형된 있음'들도 모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실체론, 사실주의, 실재론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것들을 잘 이용하되, 더 이상 절대시 하여 불필요한 고통, 충돌을 만들지 않는다.


이로서 인간은 실재론(사실주의)을 품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




주의하라.

실재론을 배격하거나, 그에서 자유롭게 되는 게 목적이 아니다.


비실재론은 '비실재론'이라는 또 하나의 실재론에 불과할 뿐이다.


'실재, 사실, 실체가 있다'도 아니지만

'실재, 사실. 실체가 없다'도 아니다.


'없음'은 '없음이 있음'이며, 결국 '없음'도 '있음'일뿐이다.

'있음'은 '없음의 없음'이며, 결국 '있음'도 '없음'일뿐이다.


'있다'도 절대시 할 것 없지만, '없음'도 절대시할 것 없다.

있다 혹은 없다를 결정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행위의 본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질없는 '있음, 없음'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있음과 없음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것을 품은, 있음과 없음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


마치 '유아'를 절대시, 실체시 하고 있으면서 그 실체시 자체도 모르기에

그래서 그로 인해 불필요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의도적으로 '무아'를 만들어 '유아의 무의식적 절대시, 실체시'를 흔들고 깨듯이

'실재론, 사실주의'를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절대화해서 믿고 있기에

그것을 흔들고 깨뜨리는 것일 뿐이다.

('유아'도 아니지만 '무아'도 아니다)


실재론과 사실주의의 정체를 눈치채고, 그 결과 그것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이지

무엇을 부정하거나 허무화시키는 게 아니다.

('부정'도 '허무'도 모두 설정이다. 상이다. 분별이다. 특별한 게 아니다. 그 주체도.)


'실재론, 사실주의'의 정체를 눈치채고, 불필요하게 매몰되거나 얽매이지 말고 잘 쓰기.

'실재론'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앎에 대해서.

실재론은 나쁜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다만 유용한 도구일 뿐.


예로, 유일신 종교에서 실재론의 정체를 눈치챈다고 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

'신이 있다', '신이 없다'는 같은 말이다.

이것은 '유아'와 '무아'의 경우와 같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신이 있다, 없다'로 논쟁하거나 회의하는 게 아니다.


'신이 있다'를 선택하면 그것을 최대한 잘 쓰는 것이다.

반대로 '신이 없다'를 선택하면 또한 역시 그것을 최대한 잘 쓰는 것이다.

각자 원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유용한 대로 선택하면 된다.

어느 선택이든 되므로. 둘 다 유용하다.


이것이 이러한 탐구의 '결과적 목적'이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여기에 사용된 모든 말과 개념과 주장도

그 '다만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


그렇다.

역시 '만들어진 것'이 맞다.


그럼 이게 무엇인가.

이 역시 하나의 '허공 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맞다.

또 하나의 '허공 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결국 '허공 꽃'을 만들어 피울 수밖에 없다.


차이는 여기에 있다.


"그 허공 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


계속 허공 꽃의 틀 안에서 또 다른 새로운 허공 꽃을 만들어 내는

'허공 꽃' 놀음이 이어지며, 그에서 파생되는 불필요한 것들을

계속 경험하느냐


아니면, '허공 꽃'이 다만 허공 꽃임을 눈치채서

할 수 있는 한은 그 '허공 꽃'들을 잘 만들어, 잘 사용하되

그것을 품고 넘어서느냐. 자유롭게 되느냐.


넘어설 것도 없는 넘어섬,

자유로울 것도 없는 자유로움을.


이 드라이한 차이.


'나'라는, '주체'라는

허공 꽃마저도 포함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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