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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May 07. 2020

실재론(2): 유용하다고 '실재'하는 건 아니다

실재론(사실주의)과 유용성을 구분하라

실재론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첫째 글은 "실재론(1): 인간은 실재론(사실주의)을 넘어설 수 있다"에 있다. 이 글은 추가되는 글이다. 앞의 글을 먼저 보고 이 글을 보면 실재론을 넘어섬에 더 도움이 된다.

(주: 이 글은 비실재론, 반실재론의 글이 아니다. 관념론에 대한 글도 아니다. 이름과 내용만 다를 뿐, 그들 모두도 결국엔 실재론과 같은 처지이다.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 또한 핵심.)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 대부분은 실재론자(실체론자, 사실주의자)인데, 그렇게 되는 데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핵심 원인 중 하는 '유용성과 사실성(실재, 실체)의 혼돈'에 있다. 즉 '유용하면 그것이 실재이다, 사실이다, 실체이다'로 여기는 근본 착각(무명, 무지)이다.


"그러므로 유용성과 사실성을 구분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다른 설정(앎, 분별, 개념)이라는 것, 

그 둘은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는 걸 깨치는 것"

이 아주 중요하다.(미루지 말라. 지금 당장 여기까지의 글만 보고서도 깨칠 수 있다. 눈치챌 수 있다. 알아챌 수 있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유용하다면 혹은 효과가 있다면 그것은 유용한 것일 뿐, 유용하다고 해서 그게 사실이거나 실재이거나 실체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 앎, 모든 분별, 모든 개념, 모든 상이 그러하지만 하나의 예로 '숫자'를 보자.


숫자 즉 '수'는 아주 유용하다. 자연수는 물론이고 유리수, 무리수, 실수와 허수 등 모든 수는 그 나름의 효용성을 가지고 있다. 우주선을 날리고 사물 인터넷까지 되는 현대 기술의 대부분도 이 '수'의 덕을 보고 있다.


그러나 수가 유용하다고 해서 그것이 실체, 사실, 실재는 아니다.


수는 개념이다. 허공 중에서 만들어진 설정이다.


"아니, 자연 중에도 숫자가 다 있지 않으냐. 물건의 개수가 하나, 둘, 셋 등으로 존재하고, 수학적으로 계산되거나 표현되는 것들 상당수가 자연에 있고, 자연에서 도출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숫자, 수학도 있지만 실제 물리적 대상들과 일치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것까지 모두 '만들어진 설정'이라고 하는 건 좀 억지가 아닌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러한 의문에서 간과되는 핵심이 있다. 바로 질문자가 생각하는 '실제 물리적 대상들과 일치하는 경우'들도 모두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 외부에 '수' 체계가 있어서 그것을 인간이 포착해 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외부를 인식하는 방식 중에 '숫자'라는 것이 생겨나고, 그 생겨난 도구로 외부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 정도 이상 유용하고 효용성이 있으므로 우리에게 여러 이익을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착각이 일어날 수 있다. 수가 이렇게 유용하므로 인간은 부지불식간에 '수는 실재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이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이다. 실체이다'라고 여기게 된다. 그렇게 믿게 되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그 유용성과 상관없이 '수'는 명백히 만들어진 것이다.




'수'만이 아니라 좀 더 일상적인 인간의 모든 개념들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의 앎 자체라고 해도 된다. 여기에는 언어적 앎만이 아니라 비언어적 앎도 모두 포함된다.


차갑다, 뜨겁다. 밝다, 어둡다. 착하다, 나쁘다. 좋다, 싫다. 남자, 여자. 부족하다, 충분하다. 빠르다, 느리다. 작다, 크다. 낮다, 높다. 온다, 간다. 빨갛다, 파랗다. 슬프다, 기쁘다. 안다, 모른다...


일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앎의 상당 부분은 유용하다. 그래서 뜨거운 것을 조심해서 다루게 되고, 차가 오면 내가 멈추거나 피하고, 어두우면 불을 켜서 밝게 하고, 싫은 것은 피하고, 맘에 드는 상대를 좋아하고, 부족하면 채우고, 느리면 빠르게 하고, 높은 곳은 위험하므로 피하고, 상대가 오고 감을 알며, 색깔을 구분하고, 슬픔과 기쁨을 느끼고, 모르는 것은 배워서 알고자 한다.


이러한 앎의 유용성은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효율적이며 필요하다. 아주 좋은 도구이다.


그러나 이렇게 유용하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다, 실재이다, 실체가 있다'라고 오해할 필요는 없다.




실재론(사실주의)이 왜 문제인가? 


문제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주 유용한 도구이다.

단, 그 정체를 알고 잘 쓸 때이다.


문제가 생기는 때는, 애초에 만들어진 그 '사실, 실제, 실체' 등을 '절대화'할 때 발생한다.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라고 취급하기 때문이다. 아닌 것을 그렇다고 여기면 당연히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간이 가진 고통의 대부분은 바로 이 '실체시, 사실시, 절대시, 실제시'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한 것이 '있다'는 착오. '본래부터 존재한다'는 무지와 무명.


이러한 착오가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글은 그중에 '유용성과 사실성의 혼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혼돈을 깨기가, 알아차리기가, 눈치채기가, 깨우치기가 힘든 이유는, 앞서도 말했지만 '유용하면 사실이다'는 이 단순한 연결 사고방식 때문이다. 아니다. 유용한 건 유용한 것이고, 사실성은 사실성이다. 우선 이 둘을 분리하라. 다른 것임을 인식하고, 자각하라. 그리고 그 '사실성'이란 것도 앞서의 글 "실재론(1): 인간은 실재론(사실주의)을 넘어설 수 있다"에 밝혔듯이 실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임도.


실재론이 일으킬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가 명확하게 짚어 '사실과 비사실'을 나눌 수 없게 되는 지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마치 아래에 나오는 에셔의 작품들처럼 말이다.



첫 번째 작품을 보자.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 즉 '상, 설정, 분별'이라고 해도 상대적으론 위 그림에서처럼 좀 더 명확한 검은 새와 흰 새의 구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마저도 사실상 만들어진 것이며, 그 유용성 때문에 사용하게 되는 것 뿐인데 인간은 어느 순간 부터 '검은 새는 절대적으로 검은 새이고, 흰 새는 절대적으로 흰 새이다'라고 여기고 믿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선에서는 그러한 구분의 절대화, 사실시, 실재시는 유용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아주 많다. 두 번째 작품에서, 누가 흰 사람이고, 누가 검은 사람인가. 다른 말로 하면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그림의 아래 부분에서는 명확한 듯 보이지만, 각각을 타고 들어가보면 어느 영역에서는 구분이 모호하거나 의미 없어지게 된다.사람과 배경의 경계 혹은 구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것을 '실재화, 절대화' 시키면서 인간이 만들고 겪는 여러 문제와 고통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모호하게 되는 지점에서만이 아니라, 가장 선명하게 구분되는 지점에서조차도 '그것이 애초에 만들어진 것임'을 파악하는 것. 왜냐하면 그 '모호한 지점'은 사실 늘 변하기 때문이다. 아니 '전체가 모두 모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실재한다'는 것이 착각임을 눈치채고 있는 것. 굳이 돌이켜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항상, 본래' 그러함을 알아채고 있는 것.




이상에 대해서 역시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유용성'이란 것도 또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면 이 모든 안내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유용성이랄 것도 없는데."


맞는 질문이다. '유용성' 또한 당연히 만들어진 것이며, 유용성이 성립하려면 벌써 그전에 '유용함이라는 설정의 실체화, 그 유용함을 누릴 주체의 실체화' 등이 있어야 한다. 즉 '유용성'도 여지없이 허공의 허상 위에 지어진 또 하나의 허상이다.


하지만, 앞서도 글에서도 말했지만 똑같은 '허공 꽃'이라고 해도 차이가 있다고 했다. 그 '생각의 틀, 생각의 감옥, 앎의 감옥' 속에서 계속 맴돌이하고 헤매고 고통받게 하느냐, 그 틀과 감옥 자체를 무너뜨려 버리느냐의 차이. 그 실재 결과의 차이. 그 유용성의 차이.


알면서 쓰느냐, 모른 채로 쓰느냐의 차이.


'실재론(사실주의)과 유용성의 구분'은 그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유용성이 있다. 탐구자가 제대로 탐구하고, 제대로 자각 및 각성한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유용한 자극제로 사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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