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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Nov 11. 2015

투사 3. 투사의 양극성을 통찰하고, 투사를 넘어선다

타인과 외부에 대한 부정적 투사를 해결하는 방법(3)

투사, 특히 부정적 투사는 내 내부에서 받아들이지 못해 어떤 외부 대상으로 덧씌워진 내 안의 그림자입니다. 해당 외부 대상은 그런 특성을 가질 수도, 안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특히 부정적 투사의 경우, 외부 대상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필요한 조처는 적극적으로 취하되) 내 안의 그림자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넘어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투사 자체는 본질적으론 옳고 그른 것이 없는 자연스럽고 유용한 의식적 기능이기에 그렇습니다. 


앞 장에서는 뇌과학 연구 중에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감각 정보'와 '내부에서 나가는 인식 정보'가 직접적 연결성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를 봤습니다. 비록 절대적 법칙이 아니라 관찰된 현상에 근거해 내리는 하나의 합리적인 추론이긴 하지만 이런 발견을 통해 우리는 외부 대상으로 보내는 투사를, 시의적절하게 잘 활용 하면서 불필요하게 매몰되거나 절대시 하지 않는 관점을 취해 볼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한 앞서 두 편의 글에서 위 내용들을 상세히 이미 풀어 보았었습니다. 


링크 1: 타인과 외부에 대한 부정적 투사를 해결하는 방법(1):

1. '그림자' 문제의 해결과 '건강한 투사'로의 전환


링크 2: 타인과 외부에 대한 부정적 투사를 해결하는 방법(2):

2. 밖의 대상과 그에 대한 내부의 인식은 서로 연관이 없다.


본 마지막 글에서는 1편의 글과 같은 기존의 투사 이론과 구조와는 다른 새로운 관점으로 투사 현상을 보려 합니다. 물론 2편에서도 그런 시도를 이미 했지만 여기서는 또 다른 모델을 사용해 보는 것입니다. 그 목표 중 하나는, 기존 투사 이론으로 볼 때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거나 해결하기 모호했던 부분들을 좀 더 선명하게 이해하고, 2편에서와 같이 이러한 이해를 통해 부정적 투사의 문제를 더욱 잘 해결해 보는 것이겠습니다. 




4. 투사 현상에 대한 근본적 접근: 투사의 양극성을 모두 통찰하고, 투사를 넘어선다. 
- 외부 대상에 대한 '혐오'는 내부의 '호감'과 동시에 인식된다.
- 둘은 함께 나타나고 함께 사라지는 쌍개념이다. 


어떻게 보면 기존의 투사 이론은 모두 결과적 현상을 이야기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틀렸거나 부족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관찰 지점이 그랬다는 말입니다. 이미 어떤 의식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 먼저 일어난 의식 현상을 건너뛰고 그 다음 현상 혹은 결과에 주목을 했다는 말입니다. 즉 그 결과적 투사 현상의 배경이 되는 의식 현상이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투사 이론은, 어느 선에선 타당한데 또 어느 선에선 약간 이상한 듯 되기도 했습니다. 가령 내가 지금 앞에 누군가의 행동을 경멸한다고 합시다(단, 여기서 실제 그 사람의 행동이 어떤 지는 일단 놓아 둡니다). 이 때 나는 그 사람의 행동이나 의도를 경멸하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건 내 안에 그림자적인 요소로서 내가 싫어하는 부분이 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외부에 투사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단계의 의식 현상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먼저 내 안에 내가 싫어하는 어떤 측면이 나에게 느껴지거나 인식되는 것이고, 둘째는 이제 내가 인정하길 거부하는 그것을 외부의 대상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게 만드는 '바탕 의식 현상'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쌍으로 일어나는 구분 인식'입니다. 이것을 가장 심플하게 표현해 보면 '검은색-흰색 구분 인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식 이름이 아니라 편의상 이름입니다.(이것은 우리 의식의 분별 기능의 '쌍생성, 쌍개념'성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가령, 만약 우리가 지금 바깥에 있는 '검정색'을 본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을 검정색이라고 인식하려면 우리 안에 그것의 반대되는 '흰색'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물론 색의 구분에서는 꼭 검정, 흰색의 대비만이 아니라 여러 요소가 더 있지만 여기서는 간단한 모델을 사용하겠습니다). 이 두 가지 색의 인식은 당연히 과거에 이미 구축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내부의 흰색 인식 없이 바깥의 검정색을 바라보면, 우리는 뭔가 느낌적으론 그것에 대한 감각은 가질 지 모르지만 그것을 '검정색'이라고 인식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어릴 적 처음 검정색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렇게 느꼈었을 것입니다. 뭐라 선명하게 개념화시키거나 혹은 아는 것으로 느끼지는 못하면서 그냥 어떤 맨느낌으로 그 대상을 인식하는 것.(색만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모든 물리적 감각에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우리가 '검정색'을 감각적으로 알게 되고, 그리고 그것이 '환한 하얀색의 반대되는 느낌의 무엇'이라는 것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이제 비로소 느낌적으로(그리고 만약 개념을 배운다면 개념적으로도) 검정색과 흰색의 느낌적, 인식적 대비를 완전하게 가지게 됩니다.(단, 여기서는 개념으로서의 흰색과 검은색라기보다는 느낌으로서의 감각적 구분을 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검은색-흰색'의 구분 인식이 생기고 난후 여기에 개념까지 덧붙이면, 그 이후부터 우리는 마치 검은색이 본래 검은색이고 흰색이 본래 흰색인 것처럼 여기기 시작합니. 그게 사실이고 절대적이라 느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일종의 '후 해석'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음 '검은색'이라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렇게 느끼지도, 인지하지도 않았던 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후에 느끼는 것은 검은색, 흰색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덧씌운 설정과 이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검은색이라 인식하든 하지 않든 '그 대상'은 그냥 그대로 존재했고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조차도 만약 그 처음 순간처럼 앞에 있는 어떤 검은색의 무엇을 바라본다면, 즉 '흰색'의 느낌에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검은색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건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검은색으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개념으로서만이 아니라 느낌에서도 말이지요.


(물론 지금 당장 느낌 상 바로 완전히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뇌의 혹은 의식의 기존의 느낌은 반복과 훈련에 의해 바뀌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식'은 느낌과 상관 없이 바로 바뀔 수 있습니다. 마치 나를 오랜 동안 일본인으로 알고 있다가 어느 날 유전자 검사로 한국 친부모의 존재를 알게 되면 그 순간 나는 (느낌적으로는 아니어도) 내가 한국인임을 '인식' 하듯이. 그러므로 의식 실험을 해 본다 생각하고서, 내 앞의 어떤 검은색의 무엇 혹은 또 다른 색을 바로 보는데 그 '검은색이다'라는 인식 없이 바로보기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다소 낯선 느낌을 받으시면 성공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평소 잘 알던 무엇을 떠올리는데 갑자기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잠깐 멍하게 되는 그런 순간과 비슷합니다.)


물론 검은색-흰색과 같이 대비되는 성질의 경우들이 아닌 수 많은 '대상에 대한 인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비슷한 구조로 인식이 구축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색감의 경우, 꼭 대비만이 아니라 우리가 각 색깔들을 구분하는 것은 어떤 색을 보았을 때 그 색이 아닌 다른 색들에 대한 감이 동시에 있기 때문에 그 색이 구분되어 인식되는 것입니다. 질감 등의 사물의 다른 물리적 느낌도 그러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추상적인 여러 대상들에 대한 인식도 그렇게 확장되어 발생합니다. 꼭 두 개의 극성이 쌍으로 대비만 되는 구조가 아니라 이미 구축된 쌍개념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점점 복잡하게 구분 인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동양철학에서, 처음의 태극이 음양이 되고 그리고 그 음양이 사상, 팔괘, 16괘로 해서 계속 뻗어 나가는 것과 비슷한 프로세스이겠습니다. 




그런데 투사 현상, 투사 이론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은 바로 그 처음의 '대비되는 인식'의 발생 부분입니다. 즉 위에서 말한 속칭 '검은색-흰색 구분 인식'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면, 만약 내가 지금 바깥의 어떤 대상에게 '비겁함'이라는 투사를 일으킨다면, 그러면 내 내부에서는 '정의로움'이라는 감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때 둘은 서로를 받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는 '비겁함'이 꼭 외부의 대상에게 투사되는 것으로만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 외부의 대상과 관계없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비겁성'의 인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날 때는 마치 검은색의 감이 흰색의 감으로 받쳐지듯이, 내 안의 '정의로움'의 인식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생겨난 '비겁성-정의로움성'의 쌍개념 혹은 쌍인식에서, 정의로움성은 받아들이지만 비겁성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실 이 둘은 자석의 N-S극처럼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로 발생하고 움직이고 소멸하는 '두 개의 극성을 가진 하나'인데, 이제 우리는 마치 그게 가능이라도 한 것처럼 한 극성은 거부하고 한 극성만 인정하려 합니다. 둘은 본질적으론 다를 바가 없는데 우리가 인위적으로 하나는 좋고 하나는 나쁘다고 설정하고 그리고 그에 바탕해서 하나는 거부하고 하나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좋다고 여기는 '정의로움'은 남겨 두고, 이제 내가 안 좋다고 여기는 '비겁함'은 버리려 합니다. 그럴 때 이 버려지는 부정적 극성(사실은 긍정성도 부정성도 아닌)은 잠재되어 있다가 외부에 그럴싸한 대상이 나타나면(실제 그 대상의 여부와는 별개로) 이제 그에게 투사됩니다. 그래서 그는 '비겁한 이'가 되고 나는 '정의로운 이'가 되어 나는 안심하고 그 비겁성을 경멸하고 싫어합니다. 이제 나는 안전하다 여깁니다. 


그러나, 모두 아시다시피 이 모든 과정은 엄밀히 말해 우리 의식의 '환상'이자 '상상'입니다. 만약 여기서 말하는 이 모델에 따라서 본다면 말이지요. 


'비겁성-정의로움성'은 따로의 것이 아닌 동시에 생겨난 쌍입니다. 마치 몸이 붙어 있는 쌍둥이 형제와 같습니다. 분명 그 극성은 다르지만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같이 일어나고 같이 스러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단지 이론이 아니라 실제 우리 의식의 인식 프로세스가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 것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아채면 그에 이어지는 여러 '후 과정'들이 있게 됩니다. 그 후 과정들이 바로 이 투사 시리즈 글의 제목인 '타인과 외부에 대한 부정적 투사를 해결하는 방법' 중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글의 소제목으로 말한 '투사의 양극성을 모두 통찰하고, 투사를 넘어서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이 모델이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 인식의 프로세스나 구조 등에 대한 것은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이야기되어 지긴 조금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대에 들어 뇌과학 연구가 눈이 부시게 발전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인지과학의 여러 내용도 점점 아주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긴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미 밝혀진 여러 실제 뇌생리적 기전 등을 이용해 인간 의식과 인식의 구조, 정체, 본질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최대한 그 연구와 발견의 결과를 이용해야 합니다. 물론 되도록이면 정확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말이지요. 사실 앞선 글도 그런 맥락의 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든 아니든, 어쨌든 인간의 의식과 인식 등에 대한 모델이나 가설은 우선은 '유용성'으로 접근해 가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의식이나 인식 현상은 완전히 우리 자신과 별개의 현상들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 모두가 바로 그 현상이고, 현상의 주인들이자 결과물들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자체이지요. 그러므로 뇌과학이나 혹은 어떤 심리학, 철학 등이 밝혀 내지 못했거나 설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식, 인식 현상을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유용한 것은 '체험적 관찰과 통찰'입니다. 우리 의식과 인식 현상에 대해서 당사자인 우리가 직접 체험하고 있는 것을 정밀히 관찰하고 또 통찰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 과정과 내용 그리고 결론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들이 다를 때 조차도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눠가며 공통된 요소를 뽑아 낼 수 있습니다. 왜? 의식 현상, 인식 현상은 우리 모두의 공통 체험이자 경험들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마지막입니다. 


이 글에서 이렇게 밝혀 본 '검은색-흰색 구분 인식' 혹은 '비겁성-정의로움성 구분 인식'. 그리고 그의 쌍생성, 쌍개념, 쌍인식의 이런 것이 타인과 외부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투사를 해결하는 데 어떻게 유용하다는 것인가?


사실은 앞서 설명을 통해 그러한 구도와 구조를 어느 정도 선명히 알아챘다면 그러면 그 자체가 바로 해결책이 되기도 합니다. 즉 '알아챔은 해결을 만든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상세히 말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외부의 누구에게 투사된 우리의 부정적 투사로, 나도 힘들어지고 상대도 힘들어지며 그래서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할 때, 그 문제를 굳이 확대하고 강화시켜 서로 다투게 되거나 어떤 불상사가 생기게 하고 싶지 않을 때, 그리고 꼭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만인 아니라 평상시 일상에서의 그런 부정적 투사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바로 '투사의 양극성'을 선명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엔 하나의 설정임을 함께.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상대에게서 비겁성이 느껴질 때(사실은 내 속의 비겁성이 느껴지는 것인데), 그때 그것이 내 안의 정의로움성과 함께 생기는 것임을 잘 인식하고, 그리고 만약 그러한 '비겁성의 외부 투사'가 굳이 필요치 않다 여겨질 때는 이제 내 안의 그 정의로움성와 비겁성, 하나인 이 두 극성을 지우고 상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안 느껴져야 하는게 아니라 느껴지지만 무시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상대를 바라보면서 내게 어떤 느낌이 일어나는 지 잘 느껴보는 것입니다. 


줄여서 말해 보면, 이 경우엔 

'내 안에 있는 정의로움과 비겁이라는 느낌을 지우고 혹은 무시하고 상대를 바라보기, 느끼기'입니다. 

(물론 '정의로움' 자리에 여러 다른 가정, 기분, 느낌, 생각, 분별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 그래도 여전히 상대가 비겁하게 느껴질까요? 


만약 제대로 해 본다면 상대는 더 이상 비겁하게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혹은 느껴지더라도 그 느낌이 점점 더 희미해지고 약해집니다.(처음엔 물론 잘 되지 않을 수 있으니 실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느 정도 반복해 보거나 혹은 제대로 해 보면 점점 그 차이가 커질 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상대가 비겁하지 않다'라고 억지로 느끼거나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실패합니다. 왜? 아무리 그렇게 해도 '비겁성'의 구분은 여전히 존재하게 되며(뇌 부정문을 인식하지 못한다. '바나나를 떠올리지 마세요'라고 하면 바나나가 떠오를 수 밖에 없음), 그리고 내 안의 '비겁성-정의로움성'의 바탕 느낌은 여전히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감정 처리, 감정 다루기, 감정의 문제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류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아주 미묘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투사의 문제이든 감정의 문제이든, 진짜 해결은 애초의 이 '비겁성-정의로움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 양극성, 쌍생성, 쌍인식 문제의 정체를 파악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주의하여야 할 것은 이 '비겁성-정의로움성'을 완전히 지우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불가능하며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억지로 억지로 한다도 해도 결국엔 '억압, 억제, 회피, 무시' 기제가 될 뿐입니다. 그러면 스스로는 그게 없어졌다라고 여길 지 모르지만 여전히 의식의 기저에는 깔려 있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우리 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게 됩니다. 오히려 '없앴는데 왜 계속 문제를 일으키지?' 혹은 '왜 안 없어지지?'하며 더 괴로워질뿐입니다. 


지우거나 없애거나 없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본래 구조와 프로세스를 알아채는 것입니다. 눈치채는 것입니다. 제대로. 그 눈치챔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그 영향력이 점점 감소하게 됩니다. 점점 그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없어져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있어도 상관없게 됩니다. 왜? 그게 무슨 현상인지, 그 정체를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검은색-흰색'을 다 인식하고 구분하고, '비겁함-정의로움'을 다 인식하고 구분하지만 그 실용성, 필요성에 따라 잘 활용할 뿐이게 됩니다. 검은색도 비겁함도 어떻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굳이 그것이 필요치 않거나 소용없거나 혹은 고통을 유발할 때도, 여전히 구분은 되지만 그에 과도하게 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중에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괜찮아도 괜찮고, 안 괜찮아도 괜찮다'에 적용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이 원리를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그 차이가 아주 큽니다.




이제 이렇게 해서 3편에 걸쳤던 '투사 시리즈'의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엄밀한 학술적 글이 아니라 느슨한 칼럼식 글이기에 많은 부분에서 얽기섥기한 부분이 보일 것이라 예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본래 목적은 투사에 대한 좀 더 깊은 사유로, 우리가 실제 일상에서 겪는 부정적 투사의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것이었기에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그런 역할을 한다면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외에, 이 시리즈의 내용들에 대해 뭔가 좀 더 정밀하고 세밀하고 정확하게 논해 보자고 하는 모든 말과 시도는 다 유용하고 좋겠습니다. 다만, 이 시리즈의 댓글 등 속에서 그런 과정은 가지지 않겠습니다. 이 글은, 글을 읽으신 분들이 나름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하시고 아니면 그냥 놓아둬 버리는 것으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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