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 외부에 대한 부정적 투사를 해결하는 방법(2)
일반적인 투사 이론을 들을 때 가장 많이 의아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혐오하는 대상이 있을 때, 투사 이론에서는 다짜고짜 대상에게 있다고 여기는 그 특성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아닌데. 조금 억지다’ 혹은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로 느끼곤 하는데 아무래도 전자의 경우가 많습니다. 후자 또한 ‘약간 그런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정말 그렇기만 할까? 그게 전부일까?’라는 의문을 지우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의구심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만이 투사 현상의 전부는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부분적 설명이란 뜻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투사 특히 부정적 투사에서는 내 안의 부정적 측면인 그림자에 대한 부정 그리고 그것을 외부 대상으로 덧씌우는 기제가 상당부분 정확합니다. 이 과정을 의식화함으로써 불필요한 투사와 감정 문제를 겪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별도로 우리는 이제 인간의 투사 기제를 조금 더 넓게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부정적 투사만이 아니라 투사 현상 전체를 이해해 보는 것입니다. ‘내면의 그림자’에 대한 처리기제만으로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인식 기제로서 투사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부정적 투사도 ‘무조건’ 멈추거나 없애려고 하는 건 자칫 회피나 억제, 억압이 될 수도 있으며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물론 삶과 관계의 질을 위해 부정적 투사에서 자유로워질 필요는 있습니다. 다만 무조건적 회피가 아니라 투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통해 되는 것이 좋습니다. 투사 현상을 선명히 그리고 깊이 이해할수록 우리는 투사 현상을 더욱 잘 활용하게 될 것입니다. 이해는 활용을 촉진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글과 다음 글에서는 두 가지 관점을 이용해 투사 현상에 대한 기존의 한정된 해석을 보완하고 확장해보려 합니다. 이것은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현상이 있을 때 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얼마나 더 정확하고 정밀한가, 그리고 얼마나 더 효용성이 있느냐가 되겠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뇌과학의 한 연구 결과를 활용해 투사 현상을 재해석해볼 것입니다. 핵심은 인간의 인식 기능에서 ‘외부로부터 들어와 인식되는 정보’와 ‘내부에서 외부로 투사되는 정보’가 본질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다는 관점입니다.
이 글의 다음 글에서는, 인간 인식의 '쌍개념과 쌍생성' 프로세스로 투사 현상을 설명해 볼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내 내부에 꼭 성적 문란 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억압하고 회피하느라 외부의 성적 문란자를 혐오하게 되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게 됩니다. 그런 기제를 완전히 부정한다기 보다는, 기존의 해석보다 좀 더 정밀하게 분해해서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앞서 올렸던 1편의 글의 링크를 아래에 겁니다. 혹시 보지 못한 경우엔 아래 글을 먼저 보면 또한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 편의 글도 완성되는 대로 아래에 링크로 걸어 드리겠습니다.
링크 1: 타인과 외부에 대한 부정적 투사를 해결하는 방법(1)
- 1. '그림자' 문제의 해결과 '건강한 투사'로의 전환
링크 2: 타인과 외부에 대한 부정적 투사를 해결하는 방법(3)
- 3. 투사의 양극성을 모두 통찰하고, 투사를 넘어선다.
3. 뇌과학적으로 살펴보는 투사 현상의 한 이해
: 외부 대상과 내부 인식은 아무 상관이 없다.
2000년 7월과 8월에 걸쳐 영국의 BBC 2에서 6부작으로 방영된 다큐멘터리 "브레인 스토리(Brain Story)"가 있습니다. 여성 최초로 영국 왕립과학연구소장(1998~2010)을 역임했고,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 명예교수로 있는 수전 그린필 교수가 내레이터로 나옵니다. 아마 제작에도 깊이 관여를 했던 듯합니다. 국내에는 같은 제목으로 나온 번역 책도 있습니다.
(물론 그 후로 벌써 16년 여가 흘렀고, 그 사이에도 뇌과학 영역에서는 숱한 발견과 연구들이 행해져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 6부작을 통해 웬만한 뇌과학 발견과 지식은 거의 다 일별해 볼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어졌습니다. 이 글의 제일 아래에 해당 다큐의 동영상을 볼 수 있는 링크를 올려놓아 봤습니다. 유튜브에서는 1편과 2편만 볼 수 있으며 다른 편들은 여기저기 사이트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4편은 링크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국내 방송사에서 방영한 적이 있으므로 해당 사이트에 가면 유료 등의 형식으로 정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다큐의 4편인 'First among Equals(한국어 제목: 진보의 원동)'을 보면 '케빈'이라는 사람의 사례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사례 연구를 통해 해당 뇌과학자가 우리가 '외부에서 실제 보는 것'과 우리 '마음(뇌)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 완전히 별개의 프로세스일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케빈은 사고를 당해 사물 인식 장애를 가집니다. 그의 증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큐에서 과학자들은 케빈에게 자전거를 그려보라고 합니다. 케빈은 자신의 뇌 내부에 자전거 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실제 자전거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다음입니다. 그렇게 본인이 드린 자신의 자전거 그림을 바로 다시 그대로 보며 그게 무엇인지 질문하는데 케빈은 "모른다"고 답 합니다.
앞에 있는 사물이 자신이 방금 마음에 떠올리고 심지어 그리기까지 했던 심상 그대로인 자전거인데, 외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인식 장애가 있기에 모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논리적으론, 아무리 외부 사물에 대한 인식 장애가 생겼다고 해도 자신이 방금 그린 그림이므로 그것을 자전거라고 인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복잡하지도 않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연결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연구자는 이를 해석하기를, 평상시에는 우리 인식의 정방향(외부에서 내부로) 진행과 역방향(내부에서 외부로) 진행이 일어날 때 연속으로 연결되어 작용하지만, 케빈의 사례를 통해 보면 우리가 가지는 ‘세상에 대한 인식’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이 없는 것 같다고 합니다. 즉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가는 두 인식 프로세스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며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평상시 우리는 이 두 가지 프로세스를 연결해서 인식을 완성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임시 연결, 무작위 연결'과 같은 것으로, 그 두 가지가 실제 연관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입니다.(물론 이것은 절대 원리라기보다는 관찰된 현상을 바탕으로 만든 합리적이고 타당한 추론이다)
사실 이 연구가 아니어도 우리의 일상을 잘 관찰해 보면 이렇게 '외부의 대상'과 '내부의 인식'의 어떤 불일치나 불연관성을 종종 경험하곤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게 예외적 현상이라 여기지만 사실 뇌과학적으론 그러한 불일치가 오히려 본래의 상태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경험하는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우리가 착오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주의해서 착오할 때도 있고 웬만큼 정확히 보았는데도 오해나 잘못 이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외부의 대상’과 ‘내부의 인식’의 불일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나름 정말 정확히 파악한다고 하지만 불일치하거나 무관한 때도 있습니다. 이렇듯 둘의 불일치는 일상에서도 곧잘 경험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위 실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본질적 불일치’가 아니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상황적 불일치’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이지요. 맞습니다. 둘은 분명 다른 종류입니다. 그러나 모종의 연관성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경험하는 ‘외부 대상’과 ‘내부 인식’의 상황적 불일치는 본래의 본질적 불일치의 한 자락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역시 하나의 추론이지만 우리가 언제든 ‘불일치 오류’를 일으킬 수 있음을 미리 주의하는 것은 여러 모로 유용합니다. 착오나 오해를 무조건 따르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인상과 평가가 틀린 것으로 판정 난 경우, 대개 우리는 ‘잘못 판단했다’고 여기고 해당 외부 대상에 대한 내 인식을 수정함으로써 해결되었다고 여기곤 한다. 그러나 때때로 그렇게 수정된 인식마저도 또 다른 착오나 오해일 때가 있다. 즉 불일치가 다시 발생하는 것이다. 보통은 몇 차례의 수정을 거치며 오류를 좁혀가 거의 근접한 정확한 인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 프로세스의 끝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정리해 가는 인식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맞춤’이지 ‘절대적인 연관’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 글에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와 ‘내부에서 나가는 정보’의 본질적 불일치성이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뇌과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한 하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일상의 그리고 평상시의 모든 '인식'이 완전히 엉터리라고 하거나 그래서 무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사 본질적으론 직접 연관성이 없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이 두 가지 정보를 연결시켜서 일으킨 인식의 '효용성'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해서 인류의 문명도 지금까지 형성 및 유지되어 온 것이며 개개인들도 하루 하루, 순간 순간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어도 효용성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성-상대성'과 그에 따른 '효용성-무용성'은 별개의 문제란 말이지요.
다만 외부 정보와 내부 정보를 당연한 듯이 연결시켜 일으키는 우리의 인식 프로세스가, 사실은 지금까지 우리가 여겨왔듯이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는 것이 핵심이고 무척 유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유용성은, 어떤 인식이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면 '틀린 인식을 절대시 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들이 좀 더 쉽게 발견되고 또 수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상당수의 고통과 고민들이 바로 이 '자기가 인식한 것이 틀릴 가능성'을 허락하거나 허용하지 못해서 발생한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인식이 틀린 것이지 내가 틀린 게 아닌데 보통 우리는 인식과 나를 동일시하고 또 인식의 결과를 절대시 해서 그런 오류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본래 이야기하고자 했던 '투사 현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투사'는 상당히 확장된 의미의 투사인데, 기존처럼 자기 내면의 그림자적 측면들을 부정하기 위해 외부로 보내는 부정적 투사만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인간이 내부에서 외부를 향해 덧씌우는 '모든 인식'이 투사가 되는 것입니다. 즉 기존의 투사는 그것의 일부만 묘사한 셈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가져야 할 통찰은, 외부의 대상을 향해 덧씌우는 내부 인식인 '투사'가 사실은 그 외부 대상과 아무런 직접 연관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연결시켜 인식할 뿐입니다.
외부 대상과 내부 인식의 절대적 연결성에서 자유로워지면 우리는 외부 대상에 대해 가지는 우리의 투사에 무조건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용성이 높을 땐 연결해서 쓰고 유용성이 낮을 땐 분리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투사에서 그 만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여전히 '투사 기능의 효용성'은 유효합니다. 즉, 비록 투사가 본질적으론 내부와 외부의 연관성이 없이 일어나는 하나의 '덧씌우기'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우리가 유용성과 실용성에 의해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투사의 유용성을 잘 이용하며 동시에 '불필요한 투사, 부정적인 투사, 틀린 투사, 병적 투사' 등을 잘 알아채고 그리고 수정하고, 그런 투사에서는 자유롭게 되는 것이겠습니다.
(다음 글 "타인과 외부에 대한 부정적 투사를 해결하는 방법(3) - 3. 투사의 양극성을 모두 통찰하고, 넘어선다."에서 투사 현상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이 시리즈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BBC 다큐 'Brain Story' 동영상 링크 모음>
2편: In the Heat of the Moment - 감정의 비밀
4편: First among Equals - 진보의 원동력(링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