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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Nov 07. 2021

깨달음의 노래 (by MuRu)

"이 모든 것이 꿈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다."

둘 다 큰 농담이다.


――――――――――


깨달으면

모든 게 그대로이지만, 모든 게 변한다.

모든 게 변하지만, 모든 게 그대로이다.

신비라 할 것 없는 이 신비여!


/


세상을 향해 전해 줄 메세지가 1000이라면,

아직 10도 말하지 못했고,

글에는 1도 쓰지 못했다.

모든 것은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전해질 것이다.


/


인류는 첫 번째 큰 진화를 지나왔다.

그것은 '언어 기능의 발견과 사용'이다.

이제 두 번째 큰 진화를 지나야 한다.

그것은, 언어를 품고 넘어서는

'언어, 즉 앎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유념하라! 이 앎에는 '나'도 포함됨을.

앎으로부터의 자유는 곧 나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리고 언어적인 앎에 더해

비언어적인 앎도 넘어서야 함을.


/


내 목적은 사람들을 설득 시키는 게 아니다.

아무도 설득될 필요 없다.

내 목적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그것을

함께 '자각' 하는 것이다.

자각 해야 할 '그 무엇'이 있으므로.

모든 상대적인 것을 품고 넘어서는

'그것'!


/


인간의 느낌과 반응과 행동엔

적절한 것이 있고 부적절한 것이 있다.

깨달음 후에는

인간의 느낌, 반응, 행동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것들 중 부적절한 것들이

멈추게 된다.

그리고 적절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적설, 부적절'은

깨달음 이전 상황에서의 기준이다)


/


'현상'이(혹은 우리가) 달리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달리 어디에 존재하고 있겠는가?

달리 다른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근원이다.

바로 당신이

근원에서 나왔고,

근원에 존재하고 있고,

바로 당신이 근원이다.

당신이 도이다.

근원이 현상이고,

현상이 근원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시명, 즉비.


/


당신은 결코 자신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결코 자신을 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듣는 자'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결코 자신을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결코 자신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보이고, 들리고, 생각 되고, 알게 되는 것은 모두 대상이다,

당신일 수 없다.

그럼, 당신은 누구인가?

봄이, 들음이, 생각함이, 앎이

당신이 근원임을 증거한다.

주체와 대상을 넘어선 근원.  


/


어떤 믿음도 믿지 않는다.

어떤 믿음도 안 믿지 않는다.

믿음은,

믿고 안 믿을 대상이 아니다.

오직 믿음의 정체를 알아,

어떤 믿음이든 잘 활용할 뿐.

나와 너,

모두와 전체의

조화와 흐름을 위해.


/


유아(有我)도 아니지만 무아(無我)도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아(我),

'나'라는 것.

'무아'라고 하는 순간

'무아'라는 새로운 '아'가

만들어지는 것 뿐이다.

유아도, 무아도 모두

‘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있음'도 아니지만

'내가 없음'도 아니다.

'아(我)'라는 것,

'나'라는 것 자체를 보아야 한다.

이것은 만들어진 설정에 불과하다.

'주체 설정'이라는 설정.

'있다, 없다'라는 것도

만들어진 설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정확한 질문은

'나란 것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나란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이다.

'나'의 정체를 찾는 게 아니라

'나'라고 그 주체 설정 행위,

이 설정 행위 자체, 그 정체를

눈치채는 것이다.

이 '짓거리' 자체를.

'나, 있음' 등을

이미 존재하는 무엇으로

믿거나 전제하는

우리의 자동화된 착오를

알아채는 것이다.

그것이 '나'로부터,

'있음'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방법이다.

(주의: 누가 알아채는 게 아니다.

'내'가 알아채는 게 아니다.

그러한 '나'가 설정임을

눈치채는 것이다.

주체 따위가 없어도

알아챔은 있음을.

다른 알아챔과 비교해

그 '결과'가 명백히 다름을!)

나아가, 이것은

'유아/무아', '있음/없음'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앎에 적용된다.

예외가 없다.

누가 적용하지 않아도

눈치채지 못해도

본래, 항상, 이미

그러하다.


/


환영으로 환영을 없애는 것.

환영으로 환영을 넘어서는 것.

환영이 환영에 삼켜지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새로운 앎이 아니다.

모든 앎을 삼키는 앎이다.

마치 자기 자신을 삼키는 블랙홀처럼.


/


무엇에 대해서든,

함부로 '안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정말로 안다면 '바뀌어야' 한다.

진정한 앎은 변화를 수반하게 되어 있다.

자신이 아는 듯 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자연스런 변화가 없다면

차라리 '아직 완전히는 모른다'고 하라.

그래야 그 '아직 모르는 부분'을 더 찾으려 하게 된다.

무심결에 '나는 이제 안다'라고

혹은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라고 해 버리면,

무심결에 더 이상 '모르는 부분'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결국 끝끝내 '안다는 착각 속에,

사실은 모른 채'로 있게 된다.

자기만 손해이다.

자신이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최고의 앎이다.

이를 통해 그 모르는 것을 알기까지 탐구하게 된다.

결국 실제로 알게 된다.

그리고 제대로 끝내게 된다.

이것이 자신에게 이익이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렇지만

깨달음과 깨달음 탐구에서도

이와 같다.    



- Mu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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