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예로, 일본과 연관해서 식민지 근대화론이니, 역사 수정주의니 말들이 많은데 이 경우 복잡할 것 없다. 일본에게 딱 이 한 질문만 하면 된다. "그래서, 니네는 니네가 조선에 혹은 딴 식민지에 행한 그 비인간적 짓들을 기꺼이 당하겠니?". 학폭 등의 가해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너는 너 같은 놈에게 그 짓을 기꺼이 당하겠니?".
답은 당연히 '아니다'일 것이다. 답이 그러하면 자기도 타인들에게 그런 짓(자기가 당하기 싫은 짓)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겠다면 그럼 인간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짐승이 되는 것이다. 그 차이다. 인간이냐 짐승이냐.
집단이든 개인이든 가해편들이 생각하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자기(편)도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그 냉정한 사실이다. 수 년 혹은 수 십년의 그 잠깐의 시간동안 잠시 잘 나간다고 영원히 그런 줄 아는 착각 혹은 무지. 개인도 집단도 시간(역사) 속에서 항상 입장이 바뀌어 온 그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는 모자람.
때로는 복수의 마음 혹은 '화풀이'인 때도 있다. 자기가 당했으니 자기도 남들에게 그렇게 퍼부어 주겠다는. 혹은 살면서 쌓인 부정적 경험과 감정을 어딘가로 막연히 분출하고 풀고 싶음. 이 역시 무지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당했으면 직접 그 가해자와만 붙을 일이지 애매한 상대(특히 자기보다 약자)들을 괴롭힐 건 명백히 아니기 때문이다. 화풀이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상대에게 제대로 화를 낼 일이지 부당한 화풀이는 못 할 짓이다. 역시 인간이냐 짐승이냐의 차이이다. 짐승은 두려움에 빠지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우선 무조건 주위에 있는 것(특히 자기보다 약한 것)을 물어뜯기 마련이다.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집단 괴롭힘'도 마찬가지다. 짐승들은 일종의 자기보호본능에 의해 자기 집단내에서 약한 개체를 버리거나 해치려 한다. 그래야 자기 집단이 폭식자나 적들에 대해 약점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리라. 인간도 몇 이상이 무리를 이루면 많은 경우 이런 동물적 행태가 나타난다. 실제 약자가 없을 때조차도 억지로(무의식적으로) 희생자를 만들어 낸다. 본능에 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럴 필요가 없다. 야생의 무리가 아니라면, 집단 내에 약자가 있다고 해서 외부나 적들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약자들을 잘 보살피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게 집단에 더 이롭다. 하지만 아직 인류의 뇌는 대체적으론 이러한 동물적, 원시적 신경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보라. 동물 중에서도 약한 개체를 보호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기도 하는 바(늑대나 코끼리 무리 등등의 사례), 인간이라면 더더욱 이 원시적 반응의 한계와 함정을 알아채고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