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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Feb 02. 2016

타인과의 비교에 쉽게 빠지지 않는 법

축축한 비교를 하지 말고 본래의 드라이한 측정만 하자

인간은 비교의 동물이다. 자신과 연관된 여하 간의 것이든 우등하고 열등한 혹은 좋고 나쁜 우열을 따져 그에 따라 즐거워 하거나 고통스러워 한다. 하지만 그러한 우열 비교 행위를 멈추지 못한다. 마치 자동 프로세스처럼 되풀이 된다.


사실 비교 행위는 가장 심각한 자기 미움 심리기제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비교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본래 모습이 아닌 것으로 비하하고 위축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비교하고 우열을 가리는 행위를 멈추지 못한다. 마음으로는 '안 할 거야, 하면 나만 손해야'라고 느끼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계속하게 된다. 왜 그럴까?


사실 '우열 비교'는 그 본래 기능이 있다. 그리고 그건 아주 자연스럽고 심지어 아주 유용하다. 이것 때문에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우위를 점하고 또 지금의 문명, 문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측정'이다.


즉 우열 비교의 본래 기능은 드라이하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측정'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측정'은 아주 유용한 기능이다. 우리가 어떤 것의 길고 짧음, 무겁고 가벼움, 높고 낮음, 밝고 어두움 등은 잘 측정하면  할수록 이점을 얻을 수 있다. 측정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본능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측정을 하는 것이다. 유용한 것이니까. 그러므로 자신과 타인이 무심결이든 의도적이든 측정을 할 때 그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거나 일 필요는 전혀 없다. '아, 그냥  측정하는구나'라고 알아채면 된다.


문제는 우리가 측정의 본래 목적과 유용성을 망각하고
그것을 '우열의 비교'로 사용하게 될 때이다.


측정은 그냥 드라이하다. 우열 비교는 아주 축축하다. 이 두 가지 행위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기서 '드라이'와 '축축'의 단어를 쓴 이유가 있다. 바로 '감정적 반응'의 여부 혹은 강도이다. 혹은 그 개입이다.


측정 행위는, 글자 그대로 긴 지 짧은 지, 무거운 기 가벼운 지, 가까운 지 먼 지를 재어서 그것을 바탕으로  그다음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더 정확한 측정은 더 효율적인 다음 행위에 도움을 준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모든 일상, 삶, 대상을 측정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왜? 필요하니까.


다만, 이제 너무 그 측정 행위가 습관적으로 되다 보니 불필요한 것들도 계속 측정을 한다. 더 문제는, 그 측정을 측정으로만 두지 않고 이제 거기에 좋다, 싫다의 느낌과 그리고 더 낫다 못하다는 우열의 판단을 가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좋다, 싫다와 우열은 사실 대부분은 상상이고 설정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애초의 측정에서는 그런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상이고 설정이지만 우리는 습관적으로 지나치게 큰 중요도를 부여하고 있고 동일시를 일으키고 있다. 즉 측정을 측정으로만 놓아두지 않고 본래 없던 것을 덧붙이는 것이다.


사실 측정을 해서 짧으면 길게 만들고, 길면 자르면 된다. 측정은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무거우면 덜고 가벼우면 더한다. 얼마나 유용한 기능인가. 그러나 때로는 짧아도 길게 할 수 없고 가벼운데 더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혹은 가능은 하지만 쉽지 않은 경우도. 그럴 때 우리는 거기에 '조급함'을 더 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시간, 내가 원하는 정도로 지금 바로 혹은 최대한 빨리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심리.


혹은 나와 타인의 것을 비교해서 내 것이 더 모라자다 측정되면 이제 여러 가지 질투, 부러움 등이 발동된다. 왜? 적어도 타인의 것과 같아야 하거나 혹은 더 많아야 한다고 바래기 때문이다. 사실 꼭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법칙이나 근거는 아무 곳에도 없다. 내 마음 외에는. 타인의 마음 외에는.




이러한 심리를 모두 한 번에 없애야 한다거나 그런 것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측정'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그 측정은 자동으로 우열, 비교 심리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미 들고, 느끼고 있는 '우열 비교'와 그 후속 심리와 감정들을 굳이 멈추려 하거나, 없애려 하거나, 안 하려 하지 말고(안  될뿐더러, 그렇게 하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부담이 될 뿐이다), 그냥 그 우열, 비교의 행위가 본래는 드라이한 '측정'임을 선명히 알면 된다.


그렇게 알아도 여전히 힘들고 괴로운데 그게 무슨 해결책이 되냐고?


해결책이 된다. 물론 초반에는 그러한 측정의 측성성을 익히 알아채고 눈치챈다 해도 과거의 관성이 남아 여전히  마음속에서는 우열을 가리고 또 비교를 한다. 그리고 그 우열과 비교의 후속으로 오는 감정적 반응들을 느낀다. 그러나, 초반에는 의례 그러함을 알고 측정의 측정됨을 눈치채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된다.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처음엔 희미하더라도 계속 더 선명히 해나가면 된다. 즉 의식적으로 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의식으로 무의식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렇게 계속 과거의 우열 판단, 비교 반응이 내 심리에 있다 해도 그것이 본래는 그냥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인간의 '측정' 기능임을 자각하면서, 그 측정 본래의 기능과 유용성은 잘 사용하되 불필요한 우열, 비교의 습관을 점점 줄여 나가고 멈추어 나가면, 어느 임계치 이상부터 정말 '측정'만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불필요한 우열 판단, 비교를 하지 않고 말이다.


사실 측정임을 선명히 자각하면  자각할수록 우열, 비교 반응은 저절로 줄어들기도 한다. 만약 우열, 비교 반응이 잘 줄어들지 않는다면 여전히 측정 행위를 측정으로 잘 인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자, 우리  마음껏 측정하자!


저것은 길고 이것은 짧다. 또 이것은 무겁고 저것은 가볍다. 저건 좀 추레하고 이건 좀 신선하다. 이건 좀 썩었고 건 싱싱하다. 이 의견은 이러저러한 부분에서 구멍이 좀 많고 미성숙하고 저 의견은 논리도 촘촘하고 증빙 자료도 많고 성숙하다.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주제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 놓았고 저 책은 주제도 심심하고 구성도 많이 부족하다. 이 사상 혹은 종교는 나랑 맞고 저 사상 혹은 종교는 안 맞다.  사람은 믿을  만하고, 능력이 있으며  사람은 신뢰하기 힘들고 능력도 없다. 저 단체는 나에게도 맞고 잘 만들어져 있고 이 단체는 뭔가 나와 맞지 않고 구조도 엉망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더 정확하고 정밀하고 세밀하게 측정하자. 그런 능력을 키우자. 그리고 측정 결과에 따라 판단과 선택을 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넘치는 부분은 덜자. 본래 그러라고 측정을 하는 것이다. 정확한 판단을 하고 그에 대한 대처를 하자.


다만, 그를 지나쳐 불필요한 우열의 판단 혹은 비교심을 더하진 말자. 왜? 나에게 하나도 이득 될 게 없기 때문이다. 타인에게도 말이다. 그건 본래의 측정의 기능과 역할과 의도와도 맞이 않는다. 본래의 측정에는 그런 목적과 의도가 없다. 하지만 어찌하다 보니 우리 인간은 그런 것들을 더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 없어던 것이므로 선명히 눈치채서 줄이거나 멈출 수 있다. 혹은 측정을 하면서 그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다른 동물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이 있다면 잘 쓰면 될 일이지 굳이 불필요한 데까지 쓸 이유는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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