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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Aug 24. 2016

열 번의 호의는 잊고 한 번의 무례는 기억하다

생존을 위해 안 좋은 것만 우선 기억하는 자기보호본능에 속지 않기

고속도로에서 달릴 때 누구나 경험하는 상황이 있다. 자기 차만 이상하게 계속 옆 차들에 추월 당하는 것이다. 실제 어느 심리 연구에서도 다수의 운전자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니, 대부분이 자기 차가 추월을 많이 당한 것으로 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추월 여부를 조사하니 추월한 것, 자기가 추월 당한 것 둘 다 비슷하게 나왔다고 한다. 내가 상대방을 추월하는 것은 경험 당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기에 차후에 기억을 잘 못하고, 반대로 추월당한 것은 선명하게 기억하기에 일어나는 일종의 착각이란 말이다.

고속도로에서만이 아니다. 일상에서 내게 좋았던 지나간 일은 오히려 별로 기억되지 않고 내게 안 좋은 일들은 생생하게 기억된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 심리도 그렇다. 좋은 일과 안 좋은 일 중 안 좋을 일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러한 심리 기제는 우리를 힘들게 한다. 이 글과 함께, 우리가 왜 그런 심리를 가지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에게 이로운 반응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인간은 열 번의 호의보다는 한 번의 무례를 더 기억하는 존재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그러는 걸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어떤 상황에서의 체험에서, 차후에 자동으로 회상되는 대부분은 기분 나쁜 느낌과 내용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해서, 상황에 대해서 불필요하게 과도하게 불편해하거나 싫어하게 되곤 한다. 이것은 명백히 우리들에게 손해다. 즉 '실제 있었던 일 그대로'가 아니라 편향(그것도 부정적으로)되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의 인품이  덜되어서? 인격 수양을, 인간성 훈련을 더 해야 하기 때문에? 속이 좁아서? 


아니다. 다 아니다. 단지 우리의 뇌의 혹은 의식의 일종의 '진화적 효용성의 결과'일뿐이다. 혹은 자기보호본능의 결과라고 해도 좋겠다. 


즉 우리의 뇌 혹은 의식은 아주 효율적인 프로세스를 구축했는데 자기에게 이미 좋은 것, 편안한 것, 당연한 것, 안전한 것들은 (비록 그 자체를 즐기거나 좋아는 하더라도) 더 이상 의식적 경계나 주의를 강하게 줄 필요가 없으므로, 경험은 다 하면서도 따로 더 선명히 기억해 두지 않는다. 물론 차후 '긍정 강화'에 무의식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의식적으론 '당연한 것'으로 인식한다.(물론 정말 '감정적으로 강렬한 좋은 경험'은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다. 여기서는 그 정도의 일이 아닌 경우를 말한다.) 


'당연하게 여겨진 것'은 말하자면 '이미 아는 것'이 되어, 뇌과학적으로 보면 시상하부와 해마와 피질에서 '새로운 정보'로 분석되는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은 채 무심결에 인식 된다고 한다. 그래서 선명하지도 않고 또 차후에 저절로 떠올려지거나 반복해서 재기억되지 않는다.


반면에 부정적 체험과 그 느낌들은 선명하게 인식되고 각인되어 차후 내가 떠올리기 싫어도 계속 저절로 떠오르고 또 느껴진다. 후속으로 '부정 강화'도 일어난다.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나는 걸까? 왜 우리 뇌 혹은 의식은, 우리가 원하는 과거 좋았던 것을 반복해서 떠올려주지 않고 자꾸만 괴롭고 힘든 부정적인 것만 반복 경험시키는 걸까?




바로 우리 '생존'에 유리하고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원시 시대를 상상해 보자. 당신은 조용한 풀 숲에 혼자 있다. 그러다 몇 미터 떨어진 덤불 뒤에서 '부스럭' 소리가 난다. 그런데 아직 숲 속 경험이 많지 않은 당신은 소리는 들었지만 다소 무심해한다. 


그러다 갑자기! 그 덤불 뒤에서 호랑이 같이 큰 포식 동물이 뛰쳐나온다. 기절할 뜻이 놀란 당신은 죽는다는 본능적 두려움에 온 힘을 다해 되돌아 뛴다. 그렇게 뛰어가는 동안  온몸과 마음은 최고의 긴장과 두려움 상태를 경험한다. 무시무시한 경험이다. 결국 그 동물이 당신을 덮쳤다. '아, 이젠 죽는구나!' 그런데,  그때 당신과 동물이 같이 언덕 아래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덮친 그 자리는 아래로 기울어진 언덕의 시작점이 이었다.  정신없이 아래로 구른 후 멈춘 자리에서 좁은 입구가 있는 바위틈을 발견한다. 잽싸게 그 안으로 들어간다. 같이 굴러 내려온 후 잠시 어리둥절 하던 그 동물은 한 동안 아쉬움으로 바위 틈 밖에서 으르렁 거리다 결국 포기하고 사라진다. 잠시 숨을 고르던 당신은 안도하면서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 일이 있었던 이후부터, 당신은 그 동물에게 쫓겼던 그 자리, 그 덤불을 보면 그리고 그 부스럭 소리를 들으면 당시 느꼈던 그 공포의 오감과 정서 반응을 재경험하게 된다. 특히 '부스럭' 하는 소리! 일상에서 드리는 그 비슷한 소리들에 자기도 모르게 반응되어 얼굴이 굳고 몸이 얼어붙는다. 사람들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놀리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또 아무 일 없는 일상 중에도 가끔씩 그 당시의 느낌과 경험, 장면이 불시에 떠오르며 강제로 재경험에 빠진다. 그러면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곤 한다. 이젠 혼자 숲에 나가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그 충격 후에 받는 영향의 강도가 다르기도 하다. 내적 두려움은 있지만 이전과 거의 비슷하게 다시 숲에도 가고 동물도 사냥하고 하는 이가 있고, 혹은 어느 정도 두려움은 느껴지지만 극복하면서 차차 나아지는 이도 있고, 혹은 그 영향이 계속 가면서 더 강화되거나 혹은 유지가 되어 위에 쓴 것처럼 트라우마성으로 많이  힘들어하는 경우 등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다를 순 있다.


그런데 잘 보면, 고통이나 불안의 경험 후에 그 대상, 상황, 오감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당연히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같은 덤불 혹은 같은 부스럭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또 전처럼  덤불숲 위에서 갑자기 포식자가 튀어나와 나를 잡아먹는 일이 없을 테니까. 그래야 내가 살아남으니까. 


문제는 원시 시대나 혹은 그것이 필요할 때는 유용하지만 현대에 혹은 필요치 않을 때에도 여전히 이 생존을 위한 자기보호본능으로서의 '부정 경험 민감과 반복'의 프로세스가 일어나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것이 재강화되는. 아래에서 이 경우들을 좀 더 정밀히 살펴보자.




원시 시대와 현대의 차이:
진짜 위험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구분


원시 시대든 현대든 부정적 경험의 강제 재반복이 필요한 경우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즉 진짜 위험한 순간들이다. 특히 실제 육체적으로 위험한 순간들이 그렇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상황적으로 위험한 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꾸준히 그런 경우를 대비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으면 미리 감지하고 피해야 한다. 나와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하지만 현대는 원시 시대만큼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 많지는 않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급격한 문명, 문화, 기술 등의 발전 속도에 비해 인간의 DNA 혹은 의식적 변화는 아주 느리다. 그래서 외부 환경과 물질적 토대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의 기본 반응, 기본 의식, 기본 본능은 원시 시대 때의 반응 기제 거의 그대로이다. 


몸이 다치거나 죽는 위험한 사고를 당하는 경우들은 원시 시대나 지금이나 같다. 그런 경험은 우리에게 큰 공포를 주고 또 우리는 당연히 그러한 공포 반응이 일으켜 다시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일련의 잘 정리된 심리치유 과정을 거치면서 트라우마성 반응은 없앨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상황들이 있다. 즉, 실제 육체적으로 혹은 정말 위험한 상황이 아니지만 그렇게 연결되는 경우다. 


'발표 불안' 같은 것을 예로 들어 보자.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다 심각한 실수를 했고 그래서 큰 창피를 경험한 경우이다. 자신의 발표 실수로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고 자존심이 무너지고 하는 경험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자신을 '실제로, 물리적으로' 해치는 것 또한 아니다. 다분히 심리적인 상황인 것이다. 한 번의 발표 실수가 있었지만 다음에는 다시 심기일전해 더 잘 준비해서 발표 하면 된다. 과거의 실수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예의 생존본능, 자기보호본능이 발동하는 게 문제다. 우리 마음은(혹은 뇌는) '창피를 당하는 상황'을 추상적 위험을 '실제 위험'으로 여기는 것이다. 마치 원시 시대 때 우리를 위협했던 그 '호랑이'처럼 말이다. 그리고 '발표'라는 것이 이제 그 덤불의 '부스럭'하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 덤불숲이 되는 것이다. 


사실 호랑이가 나온 건 '그 때'의 일이고, 오늘은 심지어 동료가 가서 덤불 뒤에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했다 혹은 돌을 던져서 내가 직접 확인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덤불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 나는 여전히 떨린다. 자꾸 뭔가  아른거리는 것 같고 부스럭, 부스럭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와 똑같이, 발표한다는 생각 혹은 사람들 앞에 선다는 생각만으로도  온몸의 근육은 긴장하거나 혹은 힘이 빠지고, 침이 마르고, 손이 떨리고, 목소리도 떨린다. 아직 1주일이나 남았는데. 그리고 그렇게 힘이 빠지고 떨리는 것 자체가 또 나에게 더 스트레스를 준다.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앎에도 이런 반응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에 나 스스로 한 번 더  불안해진다. 예기 불안인 것이다.


(여기서는 발표 불안을 예로 들었지만, 과거의 여러 충격적, 부정적 경험들은 거의 모두 비슷한 반응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일상의 불안증이나 공포증 등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실제로는 이러한 트라우마성 증상들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심리치료법들이 있으며 제대로 치료 과정을 밟으면 대부분은 극복되고 치료된다. 많은 심리상담이나 정신과 치료가 그런 과정들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내용들은 사실은 그러한 치유의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또 당연히 인식되고 자각되어야 할 부분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식, 통찰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치유의 효과도 또한 커진다. 물론 '인식의 변화' 하나만으로 하는 건 아니다. 실제 오감적 반응의 변화, 재경험의 변화 등 여러 방법도 같이 쓰여야 한다.)




자, 여기서 우리가 이제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진짜 위험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의식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의 원시적 생존 본능, 자기보호본능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동으로 위험으로 인식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까지 두려워하거나 긴장할 필요가 없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런 자각은 의도적으로 해야 한다. 


단, 이때 주의할 것은 '긴장하면 안 돼!'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오히려 긴장을 더 키운다. 그러지 말고 그냥 '아, 지금 진짜 위험한 것이 아닌데 내 자기보호본능이 나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구나'는 식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호랑이가 없지만 내가 다시 호랑이에게 잡혀 죽을 까 봐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구나. 나름 애쓴다. 기특하다.'라고 자각해 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래, 고맙다. 나를 위해 최선을 다 해 줘서. 덕분에 내가 살아간다. 계속 그렇게 나를 보호해 줘. 그런데, 지금은 그럴 필요 없어. 지금은 그 덤불이 아니고 또 그때처럼 저 뒤에 실제 호랑이가 있는 게 아니야. 내가 확인도 했어. 그러니 지금은 안심해도 돼. 그런데 불안해 해도 괜찮아. 그건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니. 다만 이젠 괜찮다는 것은  알아줘. 괜찮아, 정말. 그러니 쉬어도 돼.'라고 해 주는 것이다. 


발표 불안이라면 '그래. 내가 또 이전처럼 발표하다가 실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당하고 곤란하게 되는 상황을 겪지 않게 하려고 이렇게 미리 조심시켜 주는구나. 고맙다. 그건 정말 두렵고 힘든 상황이 맞지. 날 보호해 주려고 그러는 거지? 나도 잘 알아. 그런데 이젠 괜찮아. 이젠 내가 나름대로 준비도 잘 하고 대응도 잘 할 테니까 더 이상 네가 나에게 신호를 주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날 보호하기 위해 계속 긴장과 위험의 신호를 보내 주는 건 잘 알겠어. 고마워.' 정도의 내용이 되겠다.


비록 실제 전문적인 치유 과정에서는 좀 더 많은 과정과 구체적인 방법론이 쓰이기도 하지만, 혼자서도 이러한 자기인식적 자각을 통해 자신의 내적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큰 힘이 된다. 많은 경우 이러한 자각을 선명하게 하면  할수록 그 자체로도 완전히 트라우마성 반응이 치유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실제 상담 중에도 바로 이 '선명한 인식적 자각'을 일으키기 위해 여러 방법론을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 느낌과 경험'의 재반복, 재강화가 필요한 경우와 필요치 않는 경우를 구분한다


실제 위험한 경우엔 원시적 생존본능과 자기보호본능의 발동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래야 다음에 또 조심하고 스스로도 보호되기 때문이다. 핵심은 그 '정도(degree)'가 되겠다. 너무 과도하지 않게, 필요한 만큼 하기.


그런데 실제 일상에서는 그런 기능이 별로 필요치 않는 경우들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사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다. 왜냐하면 사회 구조적으로, 정책적으로 여러 안전 장치가 마련되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안전 장치들도 완전하진 않으며, 아직은 위험하고 부족한 부분들이 있다. 인간의 문명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불안전 부분들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할 것이다. 여러 물리적인 구조나 상황들도 그렇지만, 인간관계나 조직 등에서도 여전히 의도하거나 혹은 의도되지 않은 위험들은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조심해야 한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게 당연히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들이 아님에도 우리가 여전히 두려워하는 경우이다. 


어떤 경우가 있을까?


예를 들면, 사람들과의 관계나 일상의 상황에서 겪는 불쾌한 경험들이다. 그 경험들 자체가 아니라 경험 후의 '강제적 재반복'을 말하는 것이다. 계속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조금 심한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소소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강도가 차이가 있을 뿐 같은 기제이다. 내가 굳이 떠올리려 결심하거나 의도하지 않지만 내 뇌가 혹은 의식이 자동으로 자꾸만 당시의 불쾌한 느낌과 생각들을 되새김질 시켜주는 것이다.


물론 트라우마성이 심한 경우는 당연히 정식 치유 과정을 가지는 것이 좋다. 혼자 힘만으론 쉽게 그 기억이나 상처가 극복되지 않는 경우들 말이다. 도와줄 수 있는 이들의 도움을 받는 건 결코 주저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가령 몸의 상처나 몸이 다친 경우에 병원에 가는 걸  부끄러워하는가? 아니다. 마음도 같다. 사람들은 흔히 마음은 자신의 정체성, 자존감, 자존심 등과 연결된다 여겨서 남에게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럽다 여기곤 한다. 아니다. 몸의 보호와 치료를 의료인들에게 의지하는 게 자연스럽듯이 마음과 같다. 정신 혹은 의식도 똑같이 최선의 방법을 다해 보호하고 치료해야 할 대상이지 몸과 별다르게 너무 '나'와 강하게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몸을 강화하고 치료하면서 결국 스스로 자립하게 만들 듯이 마음도 역시 필요할 땐 그렇게 도움을 받으면서 결국 자립하게 만들면 된다. 물론 몸이든 마음이든 혼자서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이는 혼자 할 수도 있다. 자신의 상태와 상황에 따라 선택할 문제일 뿐이다.


그러면 이 장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정적 느낌과 경험의 재반복과 재강화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는 어떤 경우들일까? 


강도가 강하고 약한 경우 모두가 해당된다. 즉 제법 충격과 영향이 큰 상황들과 어느 정도 이하로 약한 상황들 모두가 포함된다. 사실 관계나 일상에서 과거에 겪은 부정적 경험들이 반복해서 떠오르는 건 '불필요한 프로세스'이다. 우리 본능이야 그런 재반복을 통해 우리를 조심시키고 준비시키려는 의도이겠지만 실제론 불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풀이 해서 떠올리는 것은 실제 아무런 실효가 없기 때문이다. 효용성이 없다. 실제 이익이 없는 것이다. 처음 몇 번은 떠올리면서 다시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고 주의하고 다짐을 하는 건 물론 필요하다. 그래서 그런 용도로 사용하면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상으로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것들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이 엄밀히 봐서 효과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우리 뇌의 깊숙한 부분은 아직 그 정도로 진화되지 않아서, 혹은 대뇌 전전두엽이나 피질에서 가해지는 조절이 아직은 변연계 등의 뇌 깊숙한 부분에 어느 정도 이상 영향을 줄 수 없기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부정적 느낌, 경험'들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멈추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떠올라도 상관치 않기, 개의치 않기, 무심하기


그럼 아무 방법도 없는 것인가? 아니다, 물론 방법이 있다. 


위에 쓴 것처럼 '선명한 자각'으로 이러한 기제를 이해하고, 그 이해한만큼 이제 점점 그 되풀이를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더해서 핵심적인 방법이 바로 바로 '떠올라도 상관치 않기'이다. 개의치 않기, 무심하기이다. 


떠오른 내용 자체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떠오름 그 자체에 대해서 특히 그렇게 하면 좋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내용들을 통해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부정적 과거 일이 떠오르는 그 기제 자체의 정체를 알기 때문이다. 진짜 필요해서 떠오르고, 뭔가 중요해서, 의미가 있어서 떠오르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냥 일종의 '무용한 자동반응'일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떠오르지 않기, 느껴지지 않기, 기억되지 않기를 굳이 기대할 필요 없다. 떠올라도, 느껴져도, 기억되어져도 그 재생 자체, 기억 자체, 느낌 자체, 떠오름 자체를 심드렁하게 넘겨버리는 것! 심각한 무엇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없어야 되는 게 아니라 있어도 상관없게 되는 것.


과거에는 나에게 자꾸 떠오르고 느껴지면 그걸 무심결에 '중요한 일'로 여겨서 그 사람, 그 상황을 한참 회상한다. 재경험한다. 그러면 뇌는 그 기억과 체험이 또 강화된다. 하지만 떠올라도 그건 그냥 나의 뇌의 하나의 '자기보호본능'의 기능이라 눈치채고, 필요한만큼만 쓰고 더 이상은 개의치 않게 되면, 심드렁 하면 그러면 그 후의 반복이 점점 적어지고 그에 대한 나의 감정 반응도 점점 약해진다.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대응 방법이다.




일상의 관계에 적용하기


특히 우리에게 중요한 '관계'의 문제에서,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거나 불쾌함을 느끼는 상대들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내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또 나에 대한 타인들의 심리와 마음의 패턴도 미리 알아 놓으면 좋다. 사실 우린 서로 비슷한 반응을 주고 받는 것이다. 이왕 사람들과 만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데 굳이 계속 부정적인 마음으로 임할 필요는 없다. 상황과 심리를 이해하면, 되도록이면 서로가 좀 더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 게 좋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대를 무조건 좋아하라거나 그가 나에게 저지르는 무례나 불편함을 참으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대응할 것, 응대할 것은 모두 제대로 하면서 동시에 아래의 측면들을 살펴 보는 것이다. 


* 내가 생각하는 상대의 과거의 호의와 무례의 횟수와 정도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본다.
: 보통 우리는 호의보다 무례를 더 많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의 무례보다는 그들의 호의에 의도적으로 더 집중한다.
: 물론 자기 보호를 위해 자신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은 정당하게 지적하고 대응하고 처리해야 함은 물론이다. 대응이 필요한 부당한 무례는 그렇게 처리하면서, 일반적인 경우엔 호의에 좀 더 집중하는 것이다.

* 상대가 나의 호의보다 무례나 무관심을 더 기억하더라도 서운해하지 않는다.
: 상대도 나와 같은 본능적 심리 반응 패턴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나의 호의나 좋은  뜻과 행동을 상대방에게 말해 줄 필요가 있다면 의도적으로 말 해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 우리는 '서로' 그렇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한다. 즉 호의보다는 무례를 더 신경 쓰고 기억하는 것은 서로 같은 입장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관계를 나누는 것과 이해하지 않고 관계를 나누는 것은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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