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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Aug 18. 2016

자기 말을 남의 말 듣는 듯 들어 보기

자기 말을 너무 무시하거나, 혹은 자기 말에 너무 빠질 때

보통 자기 생각과 말은 자기가 '듣는 게' 아니라고 여긴다. 그냥 남들에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말도 자기가 듣는 것이다.  


첫 번째 청자가 자기 자신인 것이다. 이것을 의식하고 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런데 스스로 생각과 말을 하면서, 그냥 그것을 남들에게 하는 것으로만 여기지 않고 내가 나의 말을 듣는 것으로 의식적으로 하기 시작하면 여러 변화와 이점이 생긴다.


우리가 자신의 말을 '듣는 것'으로 인식하고 못하고 생각과 말을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오류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자기 목소리에 대한 믿음이 지나친 경우이다. 너무 빠져드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점검'으로 풀어야 한다.


이 경우에는 자기가 한 생각과 한 말을 거의 절대적으로 여긴다.


물론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생각과 말에 대해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하고 또 선명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필요할 때는 강하게 주장해야 하고 또 실현도 해야 한다. 이런 경우를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건강하게 자신의 주장할 수 있는 건 권장되는 것이다. 문제는, 자기 생각과 말에 대한 믿음이 과도하게 되는 경우이다.


즉, 그럴 필요가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해를 끼치게 되기까지 한다. 이것 여시 성격적인 부분과 성장 과정 중의 영향 등이 모두 있을 수 있다. 성격적으론 '주도형'적인 경우가 많고 성장 과정에서는 지나치게 그 사람 위주로 키운 것이 될 수 있겠다. 이 경우는 앞서와는 반대로 또 타인들의 목소리를 지나치게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억합하거나 왜곡하기도 한다.


살면서 자신은 그냥 평소대로 하고 있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말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자꾸 자신을 피하거나 부담을 느끼는 것이 느껴진다면 십중팔구는 이 경우이다. 자신의 생각과 말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경우이다. 본인은 평생에 걸친 습관이 되었거나, 혹은 어떤 사회적 파워를 가지게 되어 더 이상 타인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게 되어 그렇게 되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타인들의 목소리가 없는 게 아니다. 단지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런 경우에도 '자기 목소리를 타인 목소리 듣듯이 듣는 것'이 도움이 된다. 자기 생각과 말만 중요시하고, 그것만 듣던 버릇을 눈치채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만들어진 하나의 관성임을 알아채는 것이다. 생각과 말은, 자기의 것과 타인의 것을 합칠 때 자기에게도 가장 이익임을 아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생각을 고집할 경우조차도 말이다.


꼭 성격이 주도형인 경우만이 문제가 아니다. 성격이 어떻든 상관 없이 그냥 자기 생각을 너무 믿는 경우는 다 해당된다. 심지어 소심한 성격조차도 그럴 수 있다. 내 생각과 말을 남의 것 듣듯이 하면 나 자신도 많이 가벼워진다. 특히 부정적인 생각과 말의 경우에 그렇다. 보통은 자기에게 떠오르는 것을 절대시, 전부시하면서 그만 그 생각과 말에 완전히 매여버린다. 그래서 다른 여지가 없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럻지 않다. 현실은 나의 생각과 말로 모두 포착되지 않는다.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내 생각과 말이 곧 현실 전부이다'라고 믿고 있으므로 스스로의 생각에 스스로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내 말을 남의 말 듣는 듯이 한다는 것은, 절대시와 전부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남의 말을 가볍게 듣는 듯이 할 때의 그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존중은 해 주지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냥 '아,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라고 하듯이 내 것에 대해서도 '아,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필요 이상으로 매몰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타인들의 생각과 말에 대해선 곧잘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의 생각과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둘째는 타인의 생각과 말을 더 우선시하고, 자기 생각과 말을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도 무시하는 경우다. 이것은 '자기 존중'으로 풀어야 한다.


이런 경우는 자기 생각과 말에 왠지 확신이 없다. 자기 말보다는 타인의 말이나 기존의 의견에 항상 더 의존한다. 왠지 저 사람의 생각이 더 맞는 것 같고 그의 의견과 관점이 더 타당한 것 같다. 내 생각과 말은? 아직 내가 뭘 잘 모르는 것 같고, 만약 이것을 주장했다가는 부족함 부분을 지적받을 것 같고, 엉터리임이 탄로 나고, 반론을 받을 것 같아 걱정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타인들의, 상대방들의 생각과 말도 그냥 나의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나나 그쪽이나 약하고 혼란스러운 인간이기는 매일반이다. 그러면 저쪽과 그의 생각과 말은 왜 저렇게 확신과 자신감이 가득한 듯 보이냐고? 그렇다. 실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보고 느끼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항상 자신의 생각과 말에 대해 스스로 조심하고, 주의하고, 항상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고, 다른 생각과 의견이 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껏이다. 그러한 '자기 주의'의 관점은 항상 바탕에 깔되, 그 바탕 위에서 나는 또 나만의 최선을 다한 고유한 탐구와 탐색 그리고 모색을 통한 중간 중간의 결론과 통찰, 주장 등을 선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의도적으로 '중간'이라고 했다. 너무 급하게 '최종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알고 취합한 정보와 상황은 제한적이며 항상 그 이상의 정보와 자료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해 계속 더 탐구와 모색, 공부를 멈추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다 결정하세요'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그게 아니라 항상 그 자리에서의 최선을 다한 '중간 정답'을 만들고 찾고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자신의 목소리, 즉 자신의 생각과 말에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이제부터 자신의 말을 타인의 말인 듯 들어보자.


이제까지 내가 의존했던 타인의 목소리들도 사실은 나의 목소리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대로 움직인다. 다만 타인의 목소리를 나의 것으로 삼았을 뿐이다. 이것을 무의식적으로 행했던 것이다. 이제 이것을 의식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나를 위해서.


타인의 목소리를 나의 목소리인 듯 듣게 된 것은, 성격적 요소도 있을 수 있고 성장 과정 중에 나도 모르게 만들어진 기제인 부분도 있다. 주로 어릴 적 권위적인 부모 아래에서 자라면서 부모가 자기 목소리를 아이에게 강요하는 등의 경우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목소리로 살아가야 하므로, 어느 순간부터 외부의 목소리, 타인의 목소리, 세상의 목소리를 자기 목소리로 착각하고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의 가장 큰 문제는, '실제 자기 목소리'가 상당히 약해진다는 것이다. 잘 내지도 못할뿐더러 내어도 스스로 무시하게 된다. 왜? 이미 타인과 세상의 목소리를 자기 목소리로 여기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 외부의 목소리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에게 필요한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의 화자들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 주된 외부 목소리가 한 사람의 것이든, 여러 사람의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여하튼 나에게 필요한 일관성이 떨어진다. 그들은 그들의 상황과 입장과 필요에 의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고, 그것이 나에게 맞는 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집단적 목소리가 있을 수 있으며, 많은 개인들이 비슷한 입장과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한 목소리를 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런데 그런 경우조차도 모든 내용이 완전히 같을 순 없다. 효율성을 위해, 파워를 위해 같은 것을 말하되 그 와중에도 항상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 즉 생각과 말은 가지고 있으며 필요할 땐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도 살고 그 집단도 산다. 무조건 집단적 목소리에 순응하고 그것만 따르고 그것만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집단에 최선인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기 목소리를 타인의 목소리인 듯 듣는다는 것은 내가 의존해 왔던 타인들의 목소리를 듣는 듯이 하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이제 내가 타인들과 세상의 목소리에 과도한 중요도를 부여해 온 것을 눈치채고, 또 내 목소리를 스스로 간과해온 것을 알아채며 동시에 내 자신의 생각과 말을 제대로 들어주고 대접해 준다는 의미이다.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대응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목소리든 타인의 목소리이든 똑같이 공정하게 대접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대접하는 것과 과소하게 대접하는 것 모두 멈추어야 한다. 외부의 목소리에 대한 과도한 중요시도 멈추어야 하지만 내 목소리에 대한 무시나 억압, 회피도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말을 하면 이제 잘 들어주자. 이제까지 습관처럼 자기도 모르게 무시하거나 별 것 아니라 여기던 것을 눈치채자. 그리고 내 생각과 말 역시 타인들의 것처럼 중요하게 생각해 주고 존중해 주어야 할 것임을 알고 그렇게 하자. 그렇게 해 주면 해 줄수록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성은 점점 더 선명해질 것이다.




생각과 말은, 너의 것이나 나의 것이나 '단지 생각과 말일 뿐임'은 동일하다.


너의 목소리라고 해서 뭔가 더 중요하거나, 절대적이거나, 대단한 것만도 아니며 또한 나의 목소리라고 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생각과 말은 생각과 말일 뿐이다. 도구일 뿐이다. 기능일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최대한 적절하게 사용해 주는 것이다. 과도하게도 또 과소하게도 하지 않고 말이다. 필요하고 적절하다면 잘 듣고,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것이다. 필요치 않고 적절하지 않다면 가볍게 제쳐주는 것이다.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무심결에 일어나는 나의 생각과 말을 남의 것 듣는 듯이 한번 해 보자. 필요에 따라서 때론 더 존중해 주기도 하고, 때론 스스로 적당히 제쳐주면서 말이다. 그게 나에게 더 유용하고 이익이 된다. 결과적으로 타인들에게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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