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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Aug 16. 2016

슬픈 음악은 왜 치유 효과가 있나?

'슬프지만 동시에 슬프지 않음'의 마법

슬픈 음악을 들으면 슬프면서도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슬픈 일이 있을 때도 그렇고 아무 일 없을 때도 그렇다.


슬픈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슬픔은 순전히 슬픔만 느낄 때의 감정과는 다르다.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모순되는 표현인 듯 하지만 실제 음악을 들을 때의 우리의 뇌와 마음의 상태가 그렇다. 혼자 슬픔에 잠길 때 그냥 슬프기만 하며 점점 더 깊어지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사실 슬픈 음악을 들으면서 슬픔만이 아니라 왠지 모를 마음의 위안을 함께 느끼게 되는 건 확실한 이유가 있어서다. 뇌와 의식에서 어떤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음악 만이 아니라 여러 다른 예술, 문학 작품들 그리고 영화와 연극 등을 통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적 시원함과 연결되는 기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심리적 치유의 기제와도 관련 있다.




'통증'과 '고통'은 다르다
실제 감각과 그에 대한 심리적 반응은 별개의 것


통증과 고통이 있다. 통증은 실제 우리의 감각기관이 느끼는 물리적 감각이다. 몸의 통각이 자극되고 감각 신경 시스템을 통해 뇌에 전달되어 뇌에서 통증으로 감각하는 부위와 활성화 되면서 통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은 무엇일까?


고통은, 사실 실제 감각이라기 보다는 느껴진 감각에 대한 '심리적 반응' 혹은 '심리적 인식'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감각으로 통각을 통증으로 느끼는 뇌의 부위와, 어떤 자극에 대해서 '아프다! 못 참겠다. 위험하다'는 식으로 인식적 반응인 고통 심리의 뇌의 부위가 다르다는 말이다. 이는 실제 여러 뇌과학 연구에서도 나타난다.

(#주: 이 글에서의 통증과 고통의 구분은 사전적 의미는 아니다. 감각에 해당하는 것은 통증으로, 인지와 반응에 해당하는 것은 고통으로 의도적으로 설정해 본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아니, 통증을 느끼면 누구나 고통도 느끼는 것 아닌가? 두 가지는 별개의 현상이 아니라 동일한 현상인 것 같은데?'. 이건 일종의 의식적 착각이다. 즉 통증의 감각과 그에 수반되는 고통의 심리적, 인식적 반응이 거의 자동적으로 연속해서 일어나다 보니 같은 현상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실제론 별개로 일어나는 것인데 다만 우리가 무심하게 그걸 즉각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같은 통증에 대해 누구는 고통으로 느끼지만 누구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많은 케이스가 있다. 심지어 동일인이라도 다르게 느낄 때도 있다. 통증에 대해 무심해지는 최면 훈련을 한 사람들이, 화학적 마취 없이 타인최면이나 자기최면으로만 무마취 수술을 받는 케이스는 인터넷을 검색하면 제법 많이 나온다. 실제 촬영된 동영상들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옛 장수의 고사(여러 버전이 있다) 중, 팔에 맞은 화살을 별 다른 조처 없이 외과적 수술로 제거하는 이야기가 있다. 장수는 자신이 좋아하는 바둑을 두며 몰입하고, 그 사이에 의원은 그냥 팔을 절개하고 화살을 빼내는 것이다. 통증이 느껴지더라도 그에 대해 무심해 지는 것이다. 섹스와 연관된 현상 중에 '사디-메저키즘'에서는 채찍이나 기타 고통을 주는 자극으로 성적 흥분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통증이 고통이 아니라 흥분이 되는 것이다. 혹은 아이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본 엄마가 자신의 몸에 상처나 큰 통증이 생기는 줄도 모르고 어머어마한 힘으로 아기를 구출했다는 사례도 해당된다.


화살의 경우는 실제 팔 수술의 통증 보다는 주의의 초점을 바둑에 두어서 그 통증에 무심해지는 기제이고, 사디-메저키즘의 경우는 통증의 자극을 오히려 성적 쾌락의 자극으로 느끼게 전환시킨 경우이고, 아이 구출하는 엄마는 화살의 경우처럼 마음의 초점이 아기 구출에만 가 있는 효과와 흥분과 관련된 호르몬 등이 통증을 둔화시키는 효과가 합쳐진 경우일 것이다.


뇌과학, 그리고 위 이야기 속의 사례들은 우리가 몸의 감각 신경으로 느끼는 실제 물리적 감각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심리적 반응(으로서의 감각)이 실은 따로 떨어진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우리가 계속 무의식적으로 자동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연동되어 일어나는 현상으로 느껴지는 것이지, 만약 어떤 의도를 가지고 훈련과 연습을 하거나 혹은 특별한 상황에서 무심하게 되거나(주의: 감각적으로 안 느끼는게 아닌다. 주의를 돌려 그 감각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다른 반응으로 전환시키거나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사실 똑같은 일이나 자극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심리, 입장, 처지, 상황 등에 따라서 다르게 감각되거나 다른 심리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도 일상에서 자주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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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노는 '몸의 수분 부족'과 '갈증 해소'


몸의 수분 부족과 그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갈증에 대한 흥미로운 최근의 연구 결과도 있다.


갈증을 느끼는 것은 몸의 수분 고갈 상태를 반영하지만, 갈증이 해소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갈증이 날 때, 같은 양의 물이지만 좀 더 '차가운' 물을 마실수록 갈증이 해소되었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심지어 실제 마시는 물 없이 얼음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주어도 그 자체로 갈증 해소 효과가 꽤 된다고 한다. 동물 실험에서는, 수분 부족인 생쥐가 물은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은 차가운 금속 막대를 많이 핥는게 관찰되기도 한단다.


이러한 현상의 구체적인 이유는 구강의 냉각수용체가 '차가운' 자극을 느낄 때, 그것을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물 등의 액체가 들어온다는 신호로 여겨서 뇌의 갈증중추에 미리 신호를 보낸 결과라고 한다. 실제로 물 없이 차가운 자극만으로도 갈증이 완화된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몸의 수분 부족이 확연하면 그러한 갈증의 해소감도 곧 사라지고 다시 갈증이 일어나면 물을 찾게 되겠지만 여튼 몸의 수분 부족과 갈증이라는 인식 혹은 반응의 분리된 측면을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여기서 '몸의 수분 부족'은 위에서의 '통각'에 그리고 '갈증 해소의 감각 혹은 심리'는 위에서의 '고통'에 해당되는 셈이다. '통각-고통'의 관계와는 좀 다르지만 '수분 부족-갈증의 해소' 관계 역시 어떤 별도의 요소인 것이다.


인간의 감각과 인지 반응의 대응에서는 이렇듯 별개의 프로세스임을 보여주는 많은 케이스들이 있다.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그 감정을 안 느끼는게 아니라, 느끼지만 괜찮게 되는 것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내용들과 '슬픈 음악의 치유 효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보통 우리는 '슬프니까 슬프다'라고 여긴다. 즉 내가 슬픔을 느끼는 어떤 정황과 나의 슬픔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여긴다. 슬픔과 나의 동일시이다. 그러나 엄연히 이야기하면 외부의 슬픈 상황과 내부의 나의 슬픔(의 감정, 심리 반응)은 별개의 것이다. 


뇌에서는, 외부의 그 상황을 인식하는 부위와 그에 대해서 슬픔의 감정이 일어나는 부위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통증과 고통이 별개인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적으로 그 둘을 연결시키고 있고, 그래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자동으로 연속해서 일어나므로 우리는 그것을 같은 현상으로 느낀다. 그래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다. 그냥 '무조건, 당연히 슬픈 것'이다.


사실 슬픔만 그런 게 아니다. 우울함, 불안, 공포, 흥분, 분노의 반응도 다 똑같다. 그 감정의 대상, 감정이 일어나게 되는 상황(의 인식)과 그 감정들은 본질적으론 별개의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대상 때문에, 그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절대적으로, 당연하게, 본래' 그런 슬픔, 우울함, 불안, 공포, 흥분, 분노를 느낀다고 여긴다. 그렇게 믿는 것이다. 내 부정적 감정의 원인은 철저히 저 대상, 저 상황에 있다고 여긴다. 이것은 어떤 믿음, 고집, 습관, 습성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우리의 감정 반응이 말이다.


일상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 대상이 미우면, 그 상황이 불안하면 그냥 속절없이 미움과 불안을 느끼고 그 감정에 매몰될 뿐이다. 사실 이러한 '감각과 반응의 연속 반응'은 나 자신이 일으키는 것인데, 그걸 잊어 버리고 마치 절대적인 반응인 양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주인이 주인 자리를 빼앗긴 셈이다.


그러면 슬픈 음악을 들을 땐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 것일까?


바로 '슬프지만, 진짜로는 슬프지 않는' 놀라운 반응이 일어난다! 혹은 '슬프지만, 슬프지 않음을 아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왜 놀라운 반응이냐면, 보통 우리는 '슬프면 슬픈 것으로 끝!'이기 때문이다. 다른 여지가 없다. 그런데 슬픈 음악을 들으면서 슬픈 감정을 느끼지만 동시에 사실은 지금 내가 하는 건 슬픈 음악을 들으며 슬픔을 느끼는 것이지, 실제 나에겐 슬플만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안전한 상황'임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슬픈 감정이 일어나면서 동시에 '괜찮음. 안전함. 아무렇지 않음'의 감정과 반응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감정 혹은 반응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즉, 평소엔 우리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거나 혹은 이 글과 같은 설명으로만 듣던 '감각과 반응의 별개성'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즉 슬픔과 나의 분리가 나도 모르게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기존처럼 슬픔에 매몰되어 하나가 되지 않는다. 슬픔이 분리, 대상화, 객관화 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냥 체험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뇌신경망에 변화를 준다는 것이다. 즉, 기존에 슬픔을 슬픔으로만 느끼던 기제에 '슬픔이 슬픔인 것만은 아니다. 슬픔과 나는 별개다. 슬퍼도 괜찮다. 슬퍼도 나는 안전하다. 슬퍼도 고통스럽지 않다. 슬퍼도 편안하다'는 식의 인식 혹은 통찰이 더 해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실제 슬픈 일이 있는 가운데 슬픈 음악을 들을 때는 치유 효과까지 만들어 낸다.


음악 등 없이 그냥 슬픔을 느낄 때의 기제는 다음과 같다. 슬픔 이외의 것을 느끼지 못하고 슬픔만 느끼게 된다. 그리고 점점 더 깊어지게 된다. 그러면 신경망도 슬픔의 신경망만 점점 더 강화된다.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강도가 옅어지는 흐름은 있겠지만 기본적으론 슬픔의 패턴을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며 부정적 생각과 감정들이 이어진다. 이렇게 되면 보통 슬픔은 점점 더 심해진다. 이것과 비교해 보면 슬픈 음악과 그 비슷한 것들의 치유 효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능동적으로 새로운 신경망의 길 만들기


보통 외부의 어떤 자극에 대해서 자동적 심리 반응이 나오게 되는 것은, 과거의 경험들에서 그러한 반응의 신경망을 계속 구축해 왔기 때문이다. 즉 신호가 흐를 길을 점점 더 선명하게 닦아온 것이다. 그래서 그 자극원이 발동하거나 존재하면, 이제 마치 전기선에 전기가 흐르듯 닦여진 신경망으로 신호가 쫙 흐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자동으로 해당 감정을 느낀다.


사실 그 자극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내가 과거에 그러한 신경망을 만들지 않았거나 적게 만들었으면 아예 느끼지 않거나 약하게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같은 자극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느끼거나 혹은 나 자신도 경우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이치이기도 하다. 신경망의 회로와 밀도가 다른 것이다.


일상에서도 우리가 꾸준히 이러한 '자극과 반응의 별도성'을 알아차리며, 어떤 자극에 대해서 내가 무조적적인 반응만을 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다른 반응을 하거나 혹은 아예 반응을 멈추어 버리는 식으로 하면 기존의 반응이 바꿀 수 있다. 주로 불필요하거나 부정적이거나 상처가 되는 자극에 대해서 아주 유용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워낙이 '내가 느끼는 것은, 단지 느낌이 아니라 절대적 사실이다'는 믿음이 강해서 이러한 시도를 거의 하지 못한다. 또 평소에는 그럴 여력도 없다. 내가 지금 고통을, 슬픔을, 불안을, 분노를, 흥분을 느낀다면 그건 절대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의 나의 반응도 과거에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데 그렇게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멈추거나 새로운 반응으로 바꿀 수 있는데도 애초에 그 가능성을 간과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무의식 중에 계속 기존 반응을 고수하거나 혹은 새로운 부정적 반응들을 만들어 낸다. 즉 스스로 하면서 그리고 스스로 할 수 있으면서, '나는 내 감정 반응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고 여기는 것이다.


슬픈 음악을 들으면서 이제 우리는 처음으로 슬픔의 기존 감정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괜찮다'는 것도 느낀다. 그래서 기존의 슬픔의 뇌신경망 회로에 '괜찮음'의 회로가 함께 만들어진다. 혹은 기존의 슬픔의 회로가 끊어지거나 약해진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로 충분히 감성적으로 몰입해서 음악을 듣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시원해지고, 편안해 진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체험적으로 일어나는 형상이기에 강력하기도 하다.


슬픈 음악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여러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며 배설하게 해 주는, 즉 소위 카타르시스적인 반응을 일으켜주는 모든 작품과 상황들이 다 해당된다. 심지어 그렇게 해 주는 사람들도 말이다. 여기엔 '공감의 기제'도 물론 크게 작동한다. 특히 사람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 보면 결국 공감이라는 것도 '어떤 감정을 느끼지만, 느끼면서도 괜찮다'는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공감 기제와 효과의 전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이든 문학 작품이든 영화든 사람이든 내가 느끼는 것을 함께 느껴주면서 동시에 '하지만 괜찮아. 느껴도 되. 느껴도 괜찮아' 해 주는 모든 것이 같은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한국 양궁 대표님의 훈련법에서도 이러한 부분이 보인다. 특히 멘탈적 훈련법에서였다. 물론 말이 멘탈이지 사실은 이 역시 신경 반응이다.


양궁 선수팀의 훈련법 중에, 실제 양궁 경기장과 같은 환경 즉 여러 가지 소음, 관객의 환호나 야유, 이런저런 번잡한 요소들을 모두 갖춘 후에 활쏘기 연습을 시킨 부분이 있다. 아마 선수 입장에서 불안이나 긴장 혹은 흥분 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주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선수들은 그런 부정적 자극이 실제 일어날 때 차분하고 무심하게 활을 쏘는 훈련을 많이 했다고 한다. 즉 '자극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자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을 조절하는' 훈련을 한 것이다. 그래서 관중들이 소음 등을 만들어 내거나 내가 활쏘기에서 낮은 점수의 활을 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불안해 하거나 불편해 하지 않고 오히려 '괜찮음, 안정감, 편안함, 무심함, 상관치 않음, 개의치 않음, 보내버림' 등의 반응을 계속 반복해서 일으키는 것이다. 뇌 신경망 회로에 그러한 회로가 강하고 선명하게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차후 실제 경기 중에 같은 부정적 자극이 와도 나는 이미 만들어진 차분함의 회로로 자동 반응을 하게 된다. 이런 훈련을 하지 않은 선수들은 자동으로 부정적 반응을 한다. 둘은 같은 기제이다. 학습된 반응이 나오는 기제.




심리치유 중 가장 큰 기제,
'그 감정을 느끼지만 동시에 괜찮음'


아무 것도 안 느끼는게 하는 게 아니다. 혹은 과거의 그 경험이나 그 상황이 없어져야 하는 게 아니다. 그 대상이나 사람이 죽거나 사라져야 하는 게 아니다. 기억나지만, 느껴지지만,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함, 편안함, 개의치 않음, 무시함, 상관 없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느끼지만 동시에 괜찮음이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 '괜찮음'은 아무렇지도 않음이 아니다. 그런 걸 목표로 하거나 추구하면 오히려 역효과 난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야 해!'라고 하면, 자기에게 계속 과거 기억이나 상처, 감정이 떠오를 때, 그 떠오름 자체가 자기를 더 힘들게 한다. 우리의 뇌는 만약 아직 그 기억과 감정에 대한 신경망 회로가 남아 있다면 무작위로 떠오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안 느끼거나 안 떠오르는 건 목표로 삼으면 안 된다. 그게 아니라 그 '떠오름 자체, 떠오른 것 자체'에 대해 괜찮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떠올린 ' 대해서 괜찮게 된다고 해도 된다. 


이 '괜찮음'은 괜찮다, 안 괜찮다에서의 괜찮음이 아니다. 그냥 허용하는 것이다. 허락하는 것이고, 수용하는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고, 개의치 않는 것이다. 무심한 것이고, 무관심한 것이다.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했지만 공통적인 어떤 심리 요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괜찮단'는 근거가 없어도 괜찮아 지기. 괜찮음과 안 괜찮음의 그 인위적 설정 자체에서 자유로워져 버리기이다. 


물론 단순히 "그렇게 하세요!"라고 해서 바로 되는 건 아니다. 판에 박히거나 타성에 젖은 위로나 격려, 충고 등도 힘이 약하다. 힘이 되거나 효과를 줄 때도 있지만 보통 그런 건 듣는 사람에게 아무런 반응이나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이유는, 사람은 어떤 것이 자기에게 맞고 좋은 것이라 해도 '그렇게 할 만한 타당성이 있어야 그렇게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기억과 감정의 처리도 그렇다.


사실은 '그냥' 처리하면 되는데 우리의 마음은 '이유가 있어야, 근거가 있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에 사로잡혀 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치유든 타인 치유든 치유란, 마음이 그 문제를 넘어서 버리는 데 있어 스스로 납득할 만한 그 이유와 근거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냥'의 이유이지만, 쉽지 않으므로 여러 타당한 근거를 만들어 주는 셈이다.


그래서 상담가, 치유가 등은 계속 고민을 한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납득해서 기존의 감정, 기존의 반응을 버리고 새로운 감정과 반응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기존의 감정과 반응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사실은 아주 전문적인 영역이며 많은 경험과 훈련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감각적 방법론'으로 할 수도 있고 '인식적인 자각이나 통찰' 등으로 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을 잘 하는 상담가와 치유가가 능숙하고 좋은 치유자인 것이다. 부모나 선생이나 친구로서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담가 등만이 아니라 앞서 말한 문학 작품, 예술 작품, 영화와 연극 등에서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사람들이 그런 걸 보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나아가 '자가 치유'도 가능하다. 즉 작품이든 사람이든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게 아니라, 이와 같은 마음의 기제, 심리의 기제, 신경의 기제를 눈치채고 난 후에 이제 스스로 적용하고 활용해 보는 것이다. 나 스스로 하든 타인이 하든 치유 기제는 동일하다.


기존처럼 속절없이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일어나는 자기의 감정 반응, 감각 반응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무조건 절대 사실화 하지 않고, 나와 동일시 하지 않고, 높은 중요도를 부여하지 않고, 의미 있다고 여기지 않기. 능동적으로 파악하고 대응하기. 외부 대상과 상황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반응에 대해서 . 둘 다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반응에 대한 대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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