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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Feb 19. 2016

붓다의 가르침과 '메타 사유'

생각에 대한 생각. 사유에 대한 사유

저의 다른 매거진인 '의식의 블랙홀'과 다소 겹치는 영역도 있지만, '메타 사유'라는 제가 만든 나름의 고유한 한 영역으로 새로운 매거진 글을 써 나가보고자 합니다.

가만히 살펴 보면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인간의 종교, 철학, 사상,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공통으로 존재하는 '메타 사유'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중 많은 이가 이미 사유하고 또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아주 오래 전, '언어의 사용'이 인류를 동물과 유인원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갈라져 나오게 한 거대한 변화였다면, 이후에는 '메타 사유'의 흐름이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인간의 개인 의식과 집단 의식에 이전 '언어의 사용' 사건만큼 큰 변화가 만들어질 것이라 저는 예상해 봅니다.

그런 발견들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고, 논해 나가는 것은 큰 기쁨이겠습니다.




붓다나 노자 등의 가르침 그리고 여러 깨달았다 여겨지는 이들의 가르침은 사실 '메타 사유'라 이름 붙여 볼 수도 있다. 기존에 비슷한 용어가 다른 의미로 쓰였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필자가 나름대로 한 번 만들어 보고 그리고 풀어보는 고유한 개념이다.


(몇몇 철학적 사유에서도 비슷한 것을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철학적 접근들은 보통 한계가 뚜렷하다. '메타(meta-)'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더 높은, 초월한, ~을 넘어서'의 뜻을 지닌다. 그래서 그 용처도 다양하므로, 경우에 따라 어원적 뜻에 바탕해서 적절히 해석하면 된다)  


메타 사유를 조금  풀어쓰면 '사유에 대한 사유'라 할 수 있다. 혹은 '생각에 대한 생각'이 된다.


많이들  오해하는 것이, '그럼 그것도 사유인가? 생각인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에 대한 사유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그게 아니다. 여기서 사용한 '사유', '생각'이라는 단어는 빌려다 쓴 것일 뿐. '사유에 대한 사유'는 우리 인간의 '사유 기능' 그 자체의 정체와 본질을 꿰뚫어 보겠다는 의도이다. 생각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메타 사유의 영역에서도 사유와 생각을 사용은 하지만, 그 자체가 중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임시적, 인위적 도구일 뿐이다. 즉 그 '말의 내용'은 본질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종종 메타 사유에서는 여러 비언어적 방법론이나 수단이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어떤 행동이나 상황 등을 사용하는 경우이다)




붓다와 관련된 고사를 보면, 깨달음 직후 붓다가 스스로 생각하길 이 가르침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서 가르침을 펼치치 않겠다고 결심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리고 그 후 범천신 등의 요청에 의해 가르침을 펼치기로 한다.


개인적으로, 이 고사는 약간 변형된 게 아닐까 추론해 본다. 즉, 깨달음을 얻은 직후 처음엔 붓다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안내했을 것이다. 사람에겐 이렇게 좋은 것은 가르치고 또 안내하고자 하는 본능과 욕구가 있다. 일종의 자동 이타적인 본능이라 할 수 있는.


그런데, 붓다의 가르침은 말하자면 그 시대와 그 지역엔 없었던 '메타 사유'적인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추측된다. 붓다가 가르친 이들이 나름 수행을 하는 이들이었을 것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처음에 붓다는 약간 포기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리고, 그리고 깨닫지는 못했지만 깨달음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이들이 붓다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해서 이렇게 내부와 외부의 두 가지 요소가 맞물리면서 이제 법륜을 굴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필자의 순수한 추론이다)




메타 사유의 어려움은, 이것이 '사유를 이용하되 결국 사유를 넘어섬'의 기제와 과정이기 때문이다. 즉 생각을 이용하되 생각을 넘어서기.


대부분의 경우엔, 결국엔 끝끝내 그 '사유' 기능, '생각' 기능 안에서 맴돌게 된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의자 위에 앉아서 의자 들기' 라고도 한다. 꿰뚫고 나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고 명명백백한 것인데, 그 지점을 지나기 전에는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느낀다. (그래서 부분적으론 '말장난'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말장난이 아니라 '말을 넘어섬'인데, 이 의도와 과정을 잘 모를 땐 그런 오해가 또 당연히 있을 수 있다)


메타 사유의 가르침 혹은 안내에서의 필수는, 그 가르침의 원천이 이미 메타 사유의 끝을 본 사람, 실제 넘어선 사람, 깨친 경우여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그런 가르침이 글이나 기타 수단으로 적혀 있거나 전달되는 경우이다.


그렇지 못한 그 어떤 경우도 아무리 정교하고 현란하게 사유와 생각을 펼친다 해도 결국 사유와 생각의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게 된다. 말하자면  '꿈속의 꿈'이다. 결국 사유, 생각의 정체를 꿰뚫지 못하게 되고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이면서 전자의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이다. 가르침을 전달하는 경우나 받는 경우 모두 해당된다.


가르치는 경우의 자기 착각은, 첫째 솔직함의 결여가 원인이다. 둘째 실제의 '메타 사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가 원인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속아도 자신은 자기를 안다. 그러나 솔직함이 결여되면 자기도 자기에게 속을 수 있다. 혹은 실제의 '메타 사유'가 아니라 엉뚱한 것을 그것으로 착각해도 '모르면서 아는 척' 가르침을 펼치게 된다. 이 경우 양 측 모두 결국 혼란에 빠지게 된다.


가르침을 받는 경우의 혼란은 첫째, 불교식으로 말하면 법등명과 자등명 중에 자등명(내적 지혜)에 스스로 약하거나 혹은 소홀히 하고 너무 법등명(외적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원인이다. 둘째, 역시 '메타 사유'에 대한 냉철한 접근이 부조하고 또 무지한 경우이다. 혹은 엉뚱한 것에 더 관심이 있거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내적 지혜를 꾸준히 계발하고 강화시켜야 한다. 외적 지혜는, 거기에 무조건 매몰되거나 빠지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지혜를 완성시키기 위한 도구와 과정임을 선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아무리 외부의 가르침이 엉터리고 거기에 속았다 해도 결국 그 진짜 원인과 책임자는 자기 자신이다. 외부의 것들이 아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떤 엉뚱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 건 아닌 지 자가 점검을 해야 한다. 이럴 때는 스스로도 엄중하고 솔직해야 하며 자등명(내적 지혜)을 발휘해야 한다.




가만히 살펴 보면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인간의 종교, 철학, 사상,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공통으로 존재하는 '메타 사유'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우리 중 많은 이가 이미 사유하고 또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언어의 사용'이 인류를 동물과 유인원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갈라져 나오게 한 거대한 변화였다면 이후에는 '메타 사유'의 흐름이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인간의 개인 의식과 집단 의식에 '언어의 사용' 사건만큼 큰 변화가 만들어 질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다.


이것이 인류의 진정한 진화이다. 




(# 주: 아마 '메타'라는 용어는 비슷한 용도로 여기 저기 사용되어 왔기에 '메타 사유'도 어느 정도는 뜻이 공유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구성하고 풀어가는 건 나름 고유하게 가는. 이전에 있던 게 아닌. 물론 '메타 사유'라는 주제를 굳이 설정하고 풀어가는 목표는, 구축되는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의식에 대한 '자극과 흔들기'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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