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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Mar 04. 2016

답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답을 찾는 것과 만드는 것의 차이

삶은 '답을 찾는 여정'의 연속이다. 매 순간순간에 최대한 적절한 답을 찾아서 행해야 한다. 삶의 영역은 다양하며 그에 따라 답의 형식, 내용, 양태도 아주 다양하다.

답을 '찾는다'라는 말을 쓸 때 우리가 은연중에 가지는 믿음이 있다. '정해진 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답'이라는 개념 속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뭔가 맞는 것'이란 뉘앙스가 들어 있다. 여기엔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맞는 것'이다. 그렇기에 '찾는다'는 개념이 대응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맞는 것'을 찾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답을 만들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찾으려 하는 그 '기존(이미 존재)의 답'도 처음에는 우리와 같은 누군가가 '만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답을 찾는 게 아니라 내가 기존에 없던 답을 능동적으로 만든다는 프레임을 의도적으로 나누고자 한다.

답을 '찾는 것'과 '만드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기에 이렇게 구분을 하려고 할까?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이제부터 같이 살펴보도록 하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옳은 답을 찾는다' 관점의 단점


답을 구하되 '이미 존재하고 있는 답을 찾는' 관점은 여러 제한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물론 아주 분명하게 이미 답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사물에 대한 수치 측정이나, 수학적 문제의 답이라든가 공학적 결과 그리고 과학적 법칙 등이 그렇다. 이런 경우엔 그 공식, 과정, 절차 등을 잘 따라서 그에 맞는 답을 구하는 게 맞다.(하지만 이 때도 예외적 부분은 존재하는데, 수학과 과학 등에서도 어느 시점에서는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답이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보다는 과학이 좀 더 그러하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정해진 답을 구하는 태도와 방식이 지나치게 굳어지는 데 있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이미 정해진 답'이 있을 것이라 설정하고 그것을 찾으려 한다. 답을 구하는 기존의 '정해진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고 사용하고자 한다. 그게 편하니까. 또 나름 결과에 대한 보장이 있다고 여겨 안심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이 더 맞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과거에 정해졌던 유형의 답을 미리 목표로 삼기도 한다. 다른 답이 나올 수도 있는데 말이다.


사실 그렇게 심리적으로 의존하는 기존의 해결법과 답이란 것은 어떤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에 나와 같이 그 답을 찾던 이가 '만들었던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부분을 간과하며 우리는 무심결에 그 기존의 방법과 답에 절대성을 부여하곤 한다.



오류의 두 가지 원인


이러한 오류의 원인은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학습되고 고착화된 답 구하기 방법'이다. 즉, 어릴  때부터 답을 구하는 방법론을 '답이란, 모범적인 답이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걸 찾아야 하는 것'으로 배우는 것이다. 그게 습관화되고 패턴화 되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커서도 계속 같은 방식과 패턴으로 답을 구하게 된다. 물론 이게 효과적인 경우도 제법 된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사용하면 오히려 오류를 낳게 된다.


또 하나는, 내적인 믿음이다. 사실은 이게 더 본질적인 원인이다.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 바로 위에서 말했던 '답'이란 개념에 대한 정의이다. 즉, 어느 사안이나 경우이든 항상 '답'이 존재하는데, 그건 뭔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뭔가 '맞는 것'이란 무심결의 믿음이다.


아마 이렇게 말하면, "어, 그게 답의 본래 정의 아닌가?"하고 되묻고 싶을 것이다. "당연히 '있는 답'을 찾는 것이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글의 제목에서 이미 말했듯이 '답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기본 프레임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접근법도 달라지고 방법과 관점도 달라진다.




'답은, 만드는 것'이란 관점의 네 가지 장점


어떤 이는 '답이란, 만드는 것'이란 말이 너무 무책임하고 오만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럼, 누구라도 어떤 답을 만들어 놓고 "이게 답이오!"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냐고 말이다. 이 반문은 타당하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무책임한 의도로 '답이란, 만드는 것'이란 프레임을 소개한 것은 아니다.


답을 만든다고 할 때 전제되어야 할 것들이 분명 있다. 바로 '정확성, 타당성, 효용성'이다. 이것은 답을 찾든, 답을 만들든 동일하게 적용될 원칙이다. 그렇지 않은 답을 굳이 왜 구하겠는가. 이러한 전제를 공통 바탕으로 하고, 이제 '답을 만드는' 접근의 장점을 살펴보자.


첫째, '과거의 방법론과 답'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

: 인간은 과거에 쌓인 지식과 정보, 문화와 문명을 바탕으로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쌓으면서 왔기에 아주 빨리 발전된 문명을 구축해 올 수 있었다. 이것은 과거의 것을 이용하는 데서 오는 장점이다. 그러므로 충분히 활용할 부분이다. 다만, 그 도움받은 '과거의 것'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더 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을 때에도 여전히 그렇게 하는 경우가 문제이다. 그러므로 답을 찾는 게 아니고 만드는 관점은 그러한 과거에 얽매임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고, 그래서 더욱 다양하고 새로운 방식과 답을 얻을 수 있게 해 준다.


둘째, 답을 구함에 있어 능동성을 부여해 준다.

: 이미 정해져 있는 답 혹은 누군가가 만든 답을 찾으려 할 때 우리는 다분히 수동적이 되기 쉽다. 이런 경우엔 능동적이면 오히려 그 정해진 답을 찾지 못할 것이란 걱정까지도 하게 된다. 기존의 관점과 방법론의 권위와 힘에 눌리게 된다. 많은 경우엔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내가 답을 만들어 가는 것일 때, 나는 능동적이 된다. 왜냐하면 뭔가 더 적절하고, 정확하고, 효율적인 것을 찾되 이미 정해진대로가 아니라 내가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면서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에 답을 찾았던 그 이가 그랬듯이 말이다.


셋째, 계속 새로운 해결 과정과 답을 만들게 된다.

: 사실 답이나 그 해결 과정이 하나로 정해지는 영역은 제한된다. 수학과 과학 등 분야에 따라 그런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삶에서는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수학 영역에서도 많지는 않지만 다양성이 필요할 때가 있다. 과학은 훨씬 더 하다.

어떤 영역에서든 경우에 따라 '하나의 답을 주장하거나 강요' 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때 그리고 그렇지 않을 때이다. 엄중히 말하면 지나치게 그런 태도는 결국 경쟁이나 발전에서 우리를 뒤쳐지고 도태되게 만든다. 왜냐하면, 정해진 답 몇 가지에 머물지 않고 계속 새로운 해결과 풀이 과정을 만들어 가고 그리고 그에 따라 계속 좀 더 정확하고, 정밀하고, 효율적인 답을 만들어 가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당연히 더 뛰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답이란, 만드는 것'이란 관점은 우리를 그렇게 더 뛰어나고 발전되게 만들어 준다.


넷째, 답을 구하는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된다.

: 사실 그 어떤 경우든 답을 구하는 건 '즐거운' 과정이다. 애초에 답을 구하고자 하는 동기가 되는 그 '궁금해 함, 호기심, 알고 싶음' 등을 생각해 보라. 아이들을 봐도 알 수 있다. 뭔가를 신기해하고, 알고 싶어 하는 그 호기심과 궁금함이 얼마나 아이를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는지. 그리고 아이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이렇게 즐거운 '답을 구하는 과정'이 언제 힘들어지고 귀찮아지고 고통스러운 게 되는가? 바로 내가 스스로 만드는 답이 아닌 '이미 정해져 있는 (남의) 답'을 찾아야 할 때이다. 그것도 나의 방법이 아닌 타인의 방법으로 말이다. 물론 그 타인의 방법과 정해진 답이 무조건 나쁜 것이란 말은 아니다. 왜 그렇겠는가? 그 타인도 그것을 얼마나 즐겁게 만들어겠는가. 그래서 때로는 타인의 방법론과 정해진 답을 찾고 이용하는 것도 우리에게 큰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잘 활용할수록 좋다.

문제는, 그것을 불필요하게 억지로 해야 하거나 강제로 해야 하는 경우이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손에 맞지 않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익숙하지도, 친밀하지도 않다. 그래서 답을 찾는 과정도 전혀 즐겁지 않고, 지난 하고, 지루하고, 효율성도 떨어진다.

물론 기존의 방법론과 답도 최대한 잘 이용해야 한다. 핵심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더해서 나의 방법, 나의 답을 구하고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즐겁게 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아무리 답을 만들려 해도 아직 지식과 실력과 능력이 부족한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얼마든지 기존이 답이나 타인의 답을 찾으면 된다. 잘 이용하면 된다. 다만, 그럴 때에도 기본 마인드를 어떻게 가지느냐가 큰 차이를 만든다. 계속 그렇게 기존이 답을 찾는 방법만 사용할 것인가, 혹은 그 찾음 조차도 결국엔 내가 답을 '만드는' 과정의 하나로 여길 뿐인가. 물론 후자의 마인드가 당연히 권장된다.


'중간 단계의 답'도 항상 염두에 두면 좋다. 즉 꼭 '최종의, 마지막 답'이어야만 의미가 있거나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그 때에 적절한 답들도 있으므로 계속 구하고 또 잘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멈추진 않기. 또한 너무 최종의 답, 마지막 답을 내려고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상황에 따라서는 그런 답을 내고 그에 맞추어 일과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렇게 하자.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땐 빨리 답을 결정하려는 조급함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답을 만들고 사용하는 주체이지 답에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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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답은 찾는 것이기도 하고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찾는 것과 만드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본질적이냐면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찾는 것도 넓은 의미의 만드는 것에 포함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고 만드는 것으로 접근할 때 더 많은 이점과 효용성이 있다.


우리, 이미 과정과 답이 정해져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열심히 익히고 잘 사용해서 적절한 답을 잘 찾자. 그리고 동시에, 답이란 또한 내가 스스로 만드는 것임을 기억하자. 그래서 과거의 것을 잘 이용하면서도 동시에 '자유롭게, 능동적으로, 즐겁게, 새로운' 답을 만들자.


그리고 타인들도 그렇게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즐겁게 새로운 답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자. 나도 그렇게 하고 타인들도 그렇게 하도록 하자. 그리고 서로 그것들을 나누자. 때론 서로 공감, 지지, 격려하며 때론 서로 반대, 충돌, 논쟁도 하면서.


'답 만들기',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에 존재하는 최고의 즐거움 중에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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