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월감과 열등감은 항상 쌍으로 온다
살다 보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한다. 귀엽고 철없는 아이들만이 아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하게 되는 게 부러움과 질투이다. 과학, 기술, 학문 등 전문적인 영역에 있는 이들조차도 끊이지 않는 심리이다. 겉으론 안 그런 척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자기와 비슷한 혹은 뛰어난 이가 더 주목을 받거나 잘 나가게 되면 누구나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게 마련이다.
학교, 직장, 사업, 과학, 예술, 예능, 스포츠, 경제, 철학 등 모두 해당된다. 누가 나보다 더 성적이 좋을 때, 더 멋진 걸 가졌을 때, 승진이 빠를 때, 과학과 기술적 발명이나 발견을 빨리 했을 때, 사업에 성공했을 때, 창작을 잘 할 때, 생각과 말을 더 멋지게 할 때, 스포츠 경쟁에서 이길 때 우리는 그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한다.
사실 두 가지 모두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많은 경우 '질투는 나의 힘'이 되어 내가 뭔가 더 노력하거나 애쓰게 만드는 에너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런 긍정적이 기능이 있다. 하지만 결국엔 내 기분을 망치고, 힘이 빠지게 만든다. 왜냐하면 부러움과 질투는 기본적으론 부정적 심리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러움과 질투가 부담스러워 내가 멈추어 보려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쉽게 멈추지 못한다. 왜 그럴까? 이것은 멈추려 한다고 무조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부러움과 질투를 멈추고 싶다면 혹은 그에서 벗어나거나 자유롭게 되고 싶다면 제대로 된 방법을 취해야만 한다. 이제부터 그에 대해서 같이 알아보자.
부러움과 질투의 본래 감정이 '우월감'이라구?
그렇다. 투사 이론에서는 부러움과 질투의 그림자(본래의 원형적 감정)를 '우월감'으로 본다. 얼핏 듣기엔 이상할 것이다. 보통 누굴 부러워하거나 질투할 때는 내가 뭔가 부족하다 느끼거나 모자란다 여길 때이며, 이것은 오히려 열등감 쪽과 연관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월감이라구?
보통 부러움과 질투를 느낄 때는 '자기 자신 혹은 자기 상황과 조건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스스로를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혹은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상대방이 가진 그 무엇을 나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부족감'이나 '욕심'은 모두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기 부족감을 해결해서 혹은 욕심을 버려서 부러움과 질투를 멈추거나 없앨 수가 없다. 이것이 부러움을 없애려는 거의 대부분이 노력이 실패하는 주된 이유이다. 원인이 아니라 결과를 바꾸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부러움, 질투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진짜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눈치채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그 진짜 원인이 마치 그림자처럼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밖으로 투사(표출)된 감정이나 표현의 숨겨진 본래의 것을 '그림자'라고 하는 것이기도 한다. 사실은 감추어진 것이 아니다. 당사자나 타인이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본래의 감정과 원인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면 외부로는 계속 엉뚱한 것이 투사된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아이들이 막 떼를 쓸 때 그 아이의 진짜 욕구나 바람을 눈치채지 못하고 엉뚱한 것만 자꾸 가져다주면 아이의 울음이 그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즉, 외부의 대상을 향해 투사되는 '부러움과 질투'란 어쩌면 내가 나에게 떼를 쓰는 것인데, 앞서 아이처럼 그 순간 나의 진짜 감정이나 바람, 의도를 내가 눈치 못 채고 자꾸만 엉뚱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 처음으로 부러움과 질투의 본래 감정을 알아채 주는 작업을 해 볼 것이다. 내가 나를 알아주는 것이다. 제대로 알아채 주면 줄수록 투사는 점점 사라지게 되어 있다. 떼를 쓰던 아이가 만족감으로 잠잠해 지듯이. 쉽진 않은 작업이지만 결국 해낼 수 있다.
부러움과 질투의 본래 감정이 왜 '우월감'인가?
가만히 우리 마음을 살펴보자. 누가 좋은 것을 가지거나 좋은 상황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며 부러워할 때 우리 마음은 보통 '아, 나도 가지고 싶다'이다. 혹은 '아, 내가 저렇게 되고 싶다'이다. 그런데 이럴 때 나의 본마음은 '(너가 아닌)나야말로 그걸 가질 수 있는데, 가질 자격이 있는데'이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야말로 그렇게 우월한데'가 된다.
만약 내가 스스로 그렇게 여기지 않고, 자신이 부족하고 모자라고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면 나는 당연히 그것을 가지고 싶다든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도 많이 있다. 애초에 어떤 대상에 대해서 일체의 부러움이나 질투 등을 느끼게 되지 않는 경우 말이다. 전혀 그 대상에 대해서 관심이 없을 때도 그렇지만 내가 애초에 그럴 생각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할 때 그렇기도 하다.
질투는 내가 그것을 가질 가능성이 크거나 그 지점과 가까울 때 올라오는 감정이고, 부러움은 조금 멀 때의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물론 다른 경우들도 있지만 대략은 그렇다 볼 수 있다. 질투는 나의 내적 우월감이 좀 더 강할 때이고 부러움은 약할 때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내가 만약 부러움이나 시샘, 질투를 느낀다면 스스로 알아채도록 하자. '아, 내가 지금 우월감을 느끼고 있구나. 저 사람이 아니라 내가 저 상태를, 저 사람을, 저 선물을, 저 우승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있구나'라고 말이다. 결코 열등감이나 욕심이 아니다. 우월감이다. 잊지 말자.
우월감으로 인한 부러움과 질투가 왜 문제인가?
: 우월감과 열등감은 '쌍'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이 될 것이다. '우월감은 기본적으로 나에게 좋은 것 아닌가? 그런데 이게 왜 문제가 되지? 왜 이렇게 부러움이나 질투 같은 안 좋은 기분으로 취급하는 거지?'라고 말이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바로 우월감과 열등감은 쌍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실 우월감과 열등감만의 경우가 아니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감정 혹은 개념은 쌍으로 일어난다. 비유를 든다면 마치 자석에 N-S극이 동시에 존재하고, 전기의 (+)와 (-) 극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월감은 열등감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우월감-열등감' 쌍은 따로 존재하는 놈들이 아니라 '한 몸으로 존재하는 두 극성'이라 할 수 있다. 사실은 하나이다. 나타날 때도 쌍으로 나타나고 사라질 때도 쌍으로 사라지는. 그런데 보통은 둘 중에 하나만 주목해서 느끼거나 보기에 상대의 것은 '없다'고 착각을 많이 하게 된다. 사실 열등과 우월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그림자이기도 하다. 하나가 드러날 때는 하나는 숨겨진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숨겨져 있을 뿐 똑같이 작동하고 있다.
우월감과 열등감이 쌍으로 동시에 나타난다면, 그 본체 혹은 몸뚱어리라 할 만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 즉 두 개의 얼굴을 가진 그 몸체이다. 사실은 이 놈을 선명하게 보아야 이제 우리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다. 무엇이 그 몸체일까?
우월감의 몸체는 '끈적끈적한 비교 혹은 차별'의 마음이다.
: 이것은 오염된 것이다. 본래의 순수한 몸체는 '드라이한 측정'이다.
우리는 애초에 부러움과 질투라는 투사 감정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 투사의 본래 감정이 (숨겨진) 우월감임을 눈치챘다. 그리고 우월감은 독립되어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열등감과 쌍으로 존재함을 파악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알아도 아직 뭔가 해결되는 것 같진 않다. 왜냐하면 아직 베일을 벗겨 '몸체'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월감-열등감' 쌍의 본래 몸체는 아주 끈적끈적한 '비교 혹은 차별의 마음'이다. 즉 뭔가 비교하고 차별하는 마음이 있으니 그 결과로 더 낮다, 더 못하다의 우월과 열등이 생겨나는 것이다. 비교와 차별이 없으면 우월과 열등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러움과 질투를 느낄 때는 그 바탕에 우월과 열등의 감이 있는 것을 눈치채고, 그리고 그 우월과 열등감은 내가 비교와 차별의 마음을 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아직은 뭔가 찜찜하다. 그래서? 비교나 차별은 당연한 것 아닌가? 인간 중에 이렇게 뭔가를 서로 비교하는 행위를 안 하는 이가 있나? 비교를 해야 뭔가 차이도 알 수 있고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다만 한 가지만 제대로 파악하면 된다. 우월과 열등을 일으키는 '비교와 차별'은 사실 본래의 것이 아니다. 본래는 그냥 '드라이한 측정'이다. 즉, 어느 것이 더 길고 짧은지, 더 무겁고 가벼운지, 더 환하고 어두운지, 더 적합하고 비적합한지 등을 그냥 무심하게 재는 행위이다. 이러한 측정은 당연히 필요하며 측정이 정확할수록 좋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월등히 잘 하는 것이 바로 이 측정 능력이다.
문제는, 이 '드라이한 측정'을 우리가 자꾸만 '끈적끈적한 비교와 차별'로 오염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불필요한 '좋다/싫다'를 자꾸만 더한다. '우월/열등'의 반응을 덧칠한다. 이것이 심해지면 '집착/혐오'로도 간다. 물론 측정 후에 그 결과에 좋다/싫다는 감정을 붙이는 것이 꼭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반응에 따라 우리는 선택을 한다.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도 바닥을 기어가다가 뭔가 피해야 할 것이 있으면 다시 물러서 돌아서 가고 좋은 게 있으면 가서 붙는다.
문제는, 우리가 굳이 '좋다/싫다'를 그렇게까지 적용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적용하는 경우이다. 혹은 '좋다/싫다'를 넘어서야 하거나 얽메일 필요가 없을 때에조차 그에 붙잡히는 경우이다.
가령 상대가 내가 부러워할 만한 좋은 파트너랑 사귀고 있다. 그런데 그 '좋다'는 것은 이미 어떤 측정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가령 재력의 많고 적음이나 얼굴의 잘생김, 못생김 등이 되겠다. 재력은 돈 등의 양의 측정으로 그리고 얼굴은 얼굴의 미적 구조의 측정으로 어느 정도 가름이 된다고 하자. 자, 그러면 그냥 그것으로 끝이다. 돈이 좀 더 많고, 얼굴이 좀 더 균형이 잘 잡힌 것이다. 상대에게 그런 파트너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게 나와 내 인생을 결정하는가? 명백히 아니다. 그건 '그들의 일'일 뿐이다. 내가 스스로 굳이 그것을 나의 일로 만들지 않는 한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의 일을 가지고 나와 내 삶의 가치를 정하는 행위는 정말 아무런 이득도 없다. 그런데 왜 그 단순한 '측정'을 '비교'로 만들고, 그리고 우월과 열등으로 연결해 결국 부러움과 질투를 만들어야 하는가?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드라이한 측정이 일어난 후 그에 멈추지 않고 뭔가 더 들러붙은 끈적끈적한 비교와 차별의 마음이 있게 된다. 이제 그게 몸체가 되어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극성인 우월과 열등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실제의 숨겨진 우월감을 눈치채지 못한다. '내가 저것을 누려야 하는데. 내가 차지해야 하는데'라는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가져버린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으로 부러움과 질투로 외부 상대에게 투사되어 나타나며, 그때문에 나는 자꾸만 기분이 나빠지고 힘이 빠진다. 투사는 일종의 '가짜, 거짓 감정'이기 때문이다.
부러움과 질투에서 자유롭게 되는 방법
아마 여기까지 같이 왔으면 저절로 정리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부러움과 질투를 계속 느끼고 또 사용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 그렇게 크게 문제 될 것도 아니다. 마음이 힘들고 심리적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게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마음의 에너지를 뺏아가는 이 투사를 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방법이 있으므로 같이 해 보자.
이제부터는 내 마음에 부러움과 질투가 일어날 땐 즉시 그것이 내 안의 우월감의 투사임을 알아채자. 투사는 가짜 감정이다. 즉 실제로 나는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는 게 아니다. 그것의 본래 감정인 우월감을 느끼고 눈치채자.
그리고, 그 우월감은 불필요한 '비교와 차별'의 한 쪽 극성임을 파악하자. 마지막으로 그 비교와 차별은 본래의 것이 아니라 그냥 드라이한 측정이 오염된 것임을 알자. 본래는 그냥 측정일 뿐이다. 측정에는 아무 잘못이나 이상이 없다. 필요할 때 잘 이용만 하면 된다.
'비교하고 차별하는 마음'의 본래 모습이 그냥 '드라이한 측정과 판별의 마음'임을 의도적으로 파악하고 그 외 불필요한 것을 덧붙이지 않으면 나와 상대간에 일어나는 우월과 열등의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긴 것은 긴 것이고, 짧은 것은 짧은 것이지 무슨 우월하고 열등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설사 일어난다 해도 이제는 상관치 말자. 필요할 때 이외에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월감, 열등감 등이 당분간 계속 일어난다 해도 필요한 만큼 잘 사용만 하고 그 외에는 개의치 말자.
부러움과 질투는, 결국에는 위와 같은 마음의 훈련으로 일으킬 필요도 없게 만드는 게 우리 목표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설사 일어난다 해도 이제는 굳이 없애거나 부정하거나 멈추려 할 필요 없이 다만 그것의 정체가 '우월-열등'의 마음임을 눈치채기. 그 바탕이 '끈적끈적한 비교와 차별'의 마음임을 알아채기. 그리고 그러한 '비교와 차별'을 '드라이한 측정과 판별'로 본래대로 보기. 그래서 있어도 개의치 않게 되기. 그래서 점점 저절로 스러지기 되기. 이렇게 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쉽다곤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하면 되는 방법이다. 부러움과 질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우월과 열등의 비교를 넘어설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될 때까지 함께 해 보자. 중간중간 걸림이 있어도 포기하거나 멈추지만 않으면 결국 도달할 수 있으므로. 그것이 우리 마음의 힘이다. 사실 하고자 하는 마음만 꾸준히 가진다면 그렇게 어렵기만 한 것도 아니다.
<추가>
"그런데 비교 혹은 차별의 마음은 왜 생길까?"
이 질문은 이글의 주제에서 한 층 더 깊이 들어가는 내용이다. 부러움과 질투에서 자유롭게 되는 방법은 본문의 내용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드라이한 측정이 비교와 차별의 마음으로 왜곡되는 건 이미 이야기했다. 그런데 드라이한 측정이 비교와 차별의 마음이 되는 이유는 조금 더 정밀하게 봐야 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글로 쓰여질 주제가 되기도 하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보자.
그 이유는 '나'라는 추제의 설정 때문이다. 나라는 추제 설정 자체가 문제가 있거나 틀렸다는 게 아니다. 그 설정된 주체를 절대로 여기고 전부로 여기면서, 드라이한 측정의 결과들을 '나'를 중심으로 오역하거나 왜곡하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 있지도 않은 비교와 차별이 일어나게 된다. 그 '나'를 중심으로 해서 말이다. 이 문제데 해한 해결의 핵심만 말해 보자면 '그 비교와 차별로 우열을 느끼는 '나'란 결국 설정된 추체일 뿐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체 설정은 좋고 나쁜게 아니라 그 설정의 효용성을 봐야 한다. 분명 필요한 설정이다.
그래서 여전히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되 필요한 부분에서만 사용하면 필요치 않는 경우나 영역에서는 그 절대시나 전부로 여기는 것을 최소로 하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우선은 이 정도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