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자기 미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루 MuRu May 07. 2016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함부로 내는 한 번의 짜증이다

살인과 강도가 아니다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살인도 강도도
전쟁도 아니다.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함부로 내
'통제되지 않은 짜증'이다.


개인과 집단에서 공히 그렇다.


애초의 그 작은 짜증들을 멈추지 못하면
결국 싸움과 살인과 전쟁이 일어나고

그 짜증이 다스려지면
개인과 관계와 가정과 사회와 인류의 평화가
확보되는 것이다.


무슨 어마어마한 윤리, 인격이 필요한 게 아닌
실로 일상과 관계에서의 그 작은 짜증 하나이다.


짜증 낼 자격 있는 아무도 사람 없고

짜증 받을만하다고 무시될 사람 아무도 없다.





*(주 1): 짜증을 참아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부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면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은 다 하면서, '짜증의 정체와 그 결과'를 선명히 눈치채고 알아채서, 그 눈치챈만큼 저절로 다스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짜증이 뭐고, 또 함부로 부리면 그 결과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뼈저리게 알아채는. 이렇게 하지 않고 그냥 참기만 하면 오히려 병이 됩니다.


*(주 2):

또한 '반성' 모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반성' 모드로 가는 게 오히려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 반성 모드가 나쁘다거나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효과'가 적은 것 같다는 말이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반성 모드로 자주 가냐면, 아직 우리가 알아채야 할 것이 선명히 알아채 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어요. 사실은 반성이 아니라 그냥 '선택'이어야 하는.


가령, 우리가 누군가의 심장을 칼로 깊숙이 찔렀습니다. 그럼 이제 피 철철 나고, 돌이킬 수 없이 상대는 죽습니다. 만약 그런 걸 실제 경험하고 나면, 뼈저리게 알고 나면, 선명하게 알아채고 나면 이제 다시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칼로 심장을 찌르는 경우는, 사실 우리가 직접 그런 일을 하진 않지만 간접적으로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고 알게 되죠.


조금 덜 치명적이지만 비슷하게 뭔가 좀 심한 결과가 나오는 다른 상황들도 있죠? 그러 경우에는 직접 해 보고 나서 그 '돌이킬 수 없는 결과' 혹은 '황당한 결과'를 뼈저리게 한 번 경험하고, 이제 '그게 뭔지 아니까, 알아챘으니까' 다시는 그 행위를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짜증'은, 말하자면 아직 우리가 그걸 선명히 보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만약 짜증이, 칼로 심장을 찌르는 것과 같이 사실은 정말 치명적인 일이고,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정말 알아챈다면, 그러면 칼로 상대를 찌를 수 없듯이 짜증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참는 게 아닌 못 찌르는 것인. 안 찌르는 것을 당연하게 '선택'하게 되는.


그러니까 '짜증이 보이고. 무조건 휩쓸리는 게 아니고. 부릴 것인지 아닌 지 선택이 가능한' 그런 것. 혹은 '심지어 짜증 부린 후라 해도 뭔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근데 이렇게 되면 그냥 짜증을 부리고 안 부리고가 아니라, 잘 아시겠지만 시야가 넓어지고 여유가 생겨요. 그래서 단지 짜증을 참고 아니고만이 주제가 아니라 그 전에는 못 보고, 선택하지 못했던 여러 흐름들이 보이고 느껴집니다. 그러면 훨씬 더 여유롭고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


사실 누구나 다 각자의 상황과 범위에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삶의 지혜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구요. 다만 같은 사람이라도 그 긴장, 스트레스, 피로, 상황의 복잡함 등의 정도에 따라 어느 때는 쉽게 되고 어느 때는 쉽게 되지 않고 할 것이구요. 이 상황, 이 사람에게는 잘 되는데 저 상황, 저 사람에게는 잘 되지 않기도 하게 되구요.


저는, 이것도 각 상황에서의 '알아챔의 선명함, 알아챔의 파워'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찌르면 어떻게 될 지에 대한 알아챔의 차이. 그 순간 간과할수록,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만 힘을 못 쓰게 되는.


--------


또 하나는, 가만 보면 우리가 짜증을 낼 때는 '나는 이 상황에서, 저 사람에게 짜증낼만한 자격이,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의식이 있는 셈인데, 사실 '나'는 그런 자격, 권리가 없습니다.


이건 또 조금 다른 관점이긴 한데요. 제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자격과 권리도 없는데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짜증을 낸다는 걸 인식하는 건데요.


이 경우에는 분명히 '상대'들에 대한 모종의 '무시' 감정이 들어가게 됩니다. '너는 나의 짜증을 맞을 만한 존재야'라는. 근데 누구의 짜증을 당할만한, 누가 함부로 대할만한 그런 사람은 사실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런 것을 이론이나 생각이 아닌, 실제 느끼는 것.


그러면 또다시 참는 걸 말하는 것인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러므로 짜증 대신 '다른 좀 더 적절하고 지혜로운 걸' 하게 되는.

매거진의 이전글 감정에 대한 감정, '부정적인 2차 감정' 해결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