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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자기 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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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Oct 16. 2015

16. 나는 얼마나 나를 '기꺼이' 경험해 주고 있나?

먼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기꺼이 경험해 주기


우리는 스스로에게 확인해 보아야 한다.

"나는 얼마나 나를 '기꺼이' 경험해 주고 있나?"


그래서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

나를 기꺼이 경험해 주는 것이다.


모른 척하거나

부정하거나

없는 듯 여기거나

억압, 회피하지 말고

잘 나고 못난 부분들 모두

기꺼운 마음으로,

기꺼이 경험해 주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 것.

기꺼이라는 말이

본인이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수동적으로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만약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할 것이 있고

또 바꿀 것이 있다면

다 하자. 자유롭게.

그러면서 그 과정 중의

자신과 타인과 모든 세상 역시

기꺼이 경험해 주고

겪어주는 것이다.)




'나를 기꺼이 경험해 준다'는 것의

진짜 뜻은 무엇일까?


이미 눈치챘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기꺼이'이다.


'기꺼이 경험해 준다'는 것은

불필요한 긍정과 부정의 판단과 마음 없이

쿨하게, 드라이하게 '겪어준다'는 말이다.


그 경험의 파도를 타 준다는 것이고,

그 경험의 동굴을 통과해 준다는 것이고,

그 경험의 들판을 지나가 준다는 것이고,

그 경험의 게임을 즐겨 준다는 것이다.


내 몸, 내 감정, 내 생각, 내 행동,

내 환경과 상황, 내 존재 자체.


내가 경험하는 나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해

스스로도 무지, 무시하거나, 

피하거나, 억압하거나

혹은 왜곡하거나 하지 않고

내가 먼저 '기꺼이' 경험해 주고, 받아주고,

인정하고, 느껴주고, 인정해 주고, 누려 주는 것.



하나, 내 몸을 보자


나는 내 몸을 얼마나 기꺼이 경험해 주고 있는가?


물론 사람마다 타고나는 몸의 여러 특징이 있다.

당연히 다 다르다.


어떤 이는 키가 크고 다른 이는 작다.

어떤 이는 피부가 하얗고 다른 이는 색깔이 진하다.

어떤 이는 머릿결이 좋고 다른 이는 푸석푸석하다.

어떤 이는 몸집이 크고 다른 이는 몸이 유연하다.

어떤 이는 이빨이 튼튼하고 다른 이는 눈이 좋다.

어떤 이는 머리가 좋고 다른 이는 손발이 좋다.


이것은 누가 우월하고 누가 열등하고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다양성과 자유로움, 자연스러움의 일이다.


그런데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의 몸의 특성들에 대해

현재의 것이 아닌 다른 상태를 꿈꾸며

그것을 부러워하고 동시에 자기 몸을 외면하려 한다.


그럴 필요 없다.

부러움은 내 삶의 에너지만 낭비시킨다.

옛 어르신들은 남 부러워하는 것은

'있던 복도 나가게 한다'고도했다.

지혜로운 통찰이다.


그러지 말고,

이왕 타고난 몸이고, 평생 같이 살 몸이니

'기꺼이' 경험해 주면 된다.

설사 100% 마음에 들지 않고

다른 몸적 특징을 바라긴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기꺼이' 경험해 주며 살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선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다.


'기꺼이 경험한다'는 것은

조건이 좋아서, 맘에 들어서, 우월해서

경험해 준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좋은 건 좋은 대로 더욱 기꺼이 경험해 주면 된다.


'기꺼이 경험한다'는 것은

좋고 싫음,

잘나고 못남,

우월과 열등,

맘에 듦과 안 듦

이 모두와  상관없이

경험해 준다는 것이다.

그것들, 그 조건들을 모두 품고 넘어서서

당당히 경험해 주겠다는 뜻이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기가 쉽겠냐고?

아무도 쉽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정말 할 만한 일임엔  틀림없다.

어렵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꺼이 경험해 주기'가

점점 마스터되는 삶은

얼마나 신나는 삶이 되겠는가.

그러니 용기 내어 한 번 자기 것으로

만들어 볼 만한 미션임엔  틀림없다.



둘, 내 감정을 보자


혹시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스스로 잘 챙겨주지 못하거나

무시하거나,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있지 않은가?


내 감정과 기분과 느낌은

나에겐 '생명의 목소리'인데,

이 생명의 소리를

타인과 세상의 영향으로

혹은 나 스스로의 설정으로

스스로 '그렇게 느끼면 안 돼'라고 하면서

혹은 스스로 무시하거나 멸시하면서

억압하거나 피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선 안된다.

타인과 세상이 뭐라고 하든

나의 감정, 느낌은 나에겐 우주적 진리다.


주의할 것은, 이 말이

내 감정, 기분에 매몰되고 휘말리고

그것만이 최고이고 절대선이라 여기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감정의 주인이 내가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알아주고, 느껴 주고,

받아 주고, 챙겨 준다는 뜻이다.


그러면 내 감정들은

스스로 피어나고, 스스로 치유되고, 스스로 지나간다.

사실 감정은 오히려 가지 못하게 잡는 게 불가능하다.

생리적으로도 감정의 신경신호의 수명은

아무리 길어도 1분 30초라고 하기도 한다.

다만, 그렇게 지나간 감정을

우리가 다시 반복해서 잡거나 떠오릴 뿐이다.

그래서 그냥 계속 보내주고 후속 반응을 점점

줄여가면 된다.


그리고

나도 나에겐 공평히 대해줘야 할

타인이다. 

그러니 공정하게 대해주자.


물론 이러한 과정이 매번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다.

계속 시도하면 점점 그렇게 된다.

안 해볼 이유가 없다.


감정은 내가 아니다.

감정은 삶을 유용하게 살아가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내가 감정의 주인이며

어떤 감정이 느껴지고 흘러가든

나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또한, 

나의 좋은 감정과 기분은 잘 받아주면서

나의 부정적이거나 안 좋은 것들은

내가 스스로 쳐 내거나 무시하거나 없는 것인 양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지 말자.

부정적인 감정, 느낌도 또한 나의 것이다.

그것들에 붙잡히고, 영향 받아

내가 부정적인 상태가 되어라는 말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게 아니라,

내 몸의 상처도 나의 것이고

그것을 잘 보살피고 치유해서 낫게 하는 것처럼

내 마음의 상처인 부정적 감정, 느낌들도

또한 나의 것이므로

몸의 상처와 같이 알아주고, 받아들이고,

잘 보살펴 주고 치유해 주는 것을 말한다.


감정과 나를 동일시해서

감저에 붙잡히거나 매몰되지 말고

주인으로서 잘 알아채 주고, 잘 느껴주고,

잘 보다듬어 주고, 잘 인정해 주면

그러면 감정은 지나가고 풀어진다.


잘 안 될 때마다

'1분 30초의 법칙'을 기억하자.



셋, 내 생각을 보자


깨어있는 하루 동안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 마저도

생각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지나간다.

사실 거의 뇌의 자동 기능이다.

내가 생각을 한다기 보다는

생각들이 저절로 생겨나

내 의식의 스크린을 지나가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내 생각들을

얼마나 기꺼이 경험해 주고 있는가?


생각을 기꺼이 경험해 준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우선은 나의 생각들을 잘 알아주는 것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음은, 생각의 정체를  눈치채는 것이다.

내가 생각의 주인이지 생각이 내가 아님을.

생각은 나와 삶의 도구일 뿐임을.


그래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 지나가든

그 생각을 부정하거나 혹은 그에 매몰되지 않고

건강하고 당당하게 나의 모든 생각을

기꺼이 경험해 줄 수 있다.


그래서, 

각이 떠오르는 대로

내가 자동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활용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그 생각이 유용하고 필요하면 잘 사용하고

만약, 떠오르긴 했지만 별 소용없다면

그러면 그냥 흘려보내고 지나 보내 준다.

그러면 생각은 지나간다.

내가 붙잡지만 않으면 그냥 지나간다.


물론 불필요한 생각이 계속 다시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아, 또 떠오르네'하고 알아주면서

그에 대해서 부정의 마음도 긍정의 마음도 없이 그냥 보내준다.

'또 만나서 반가웠어. 잘 가~!'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 생각은 내가 아니므로.


이렇게 내 생각을 기꺼이 경험해 줌이

잘 되면 잘 될수록

나는 점점 생각의 주인이 되어 생각을 사용하고

더 이상 생각의 노예가 되어

생각에  이용당하지 않게 된다.



넷, 내 행위와 환경과 상황을 보자


행위, 환경, 상황. 


이 세 가지에 있어선 

하나의 법칙을 잘 활용하면 된다. 


'나의 일과 신의 일의 구분'이다. 


우리는 보통 나의 행위의 의미와 결과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한다. 

과연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의미가 있는지

그 결과는 좋을지 등을 말이다. 


그리고 주위의 환경과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특이 이 환경에는 '타인'이라는 요소도 들어간다. 


타인들의 반응,

타인들의 감정과 생각과 행동이

내가 바라는대로 되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들 또한

최대한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는대로

구성되고 흘러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일과 신의 일을 

명백히 구분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의 일'은

종교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의 일'이 아닌 모든 일을 말한다. 


행동의 결과, 타인, 환경, 상황에 대해

우리는 주제넘게 나의 일이 아닌 것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마저도

'나의 일'인양 착각하고 

안절부절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엔 분명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나의 일도 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신의 일'들도 많이 있다.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신의 일을 나의 일로 삼아

애쓰기 시작할 때

우리의 고통은 시작된다. 


나는 '나의 일'만,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최선을 다해 해 주면 된다. 

그다음 '신의 일'은 

신에게 맡겨버리라. 

그도 할 일이 있어야 하니

그에게 줘버리라. 


그럼 내 일이 아닌 모든 일들은

그 흐름대로 흘러갈 것이다. 

이 삶의 지혜를 항상 기억하자.



마지막으로, 나의 존재성을 보자


사실 앞서 같이 본 내 느낌, 생각, 행동과

그 이상의 모든 것의 총합이

바로 나의 존재성이기도 하다.


나는 내 전체 존재성을 기꺼이 경험해 주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부분들은 받아들이지만

어떤 부분들은 계속 스스로 부정하며

피하고 무시하고 없는 척하고 있는가.


만약 여하 간의 부분이든 그런 게 있다면

이제 하나씩 하나씩 기꺼이 경험해 주기로

점령해 나가자.


물론 타인과 세상에 바꿔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역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바꿔 나가자.

이것은 우리 모두가 당연히 가지고 있는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니까.

그런 능동적인 대응과 행동 역시 

기꺼이 경험해 주기에

포함된다.


그리고 그러는 동시에

타인과 세상과  관계없이

나는 나의 모든 것을

기꺼이 경험해 주는 삶을 살자.


그리고,

마침내

타인과 세상까지도

기꺼이 품고

기꺼이 넘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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