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을 넘어, 우리는 모든 설정의 주인이다
한 연주가가 멋진 음악홀에서
아름다운 첼로 연주를 하고 있다.
청중들은 빠져든 듯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누가 주인공인가?
아무도 주인공이 아니다.
동시에 모두가 주인공이다.
필요하면 주인공을 정한다.
그러나 굳이 필요치 않으면 정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내가 주인공이 되어 준다.
필요치 않으면 다른 이를 주인공으로 해 준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하나의 설정일 뿐.
연주자이든 청중이든 스텝이든 그 누구든
'주인공'이란 그 한정 혹은 제한과 상관없이,
주인공이라 여기든 아니든 상관없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존재할 수 있다.
삶에서의 어떤 관계, 일상,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주인공이냐 아니냐를 넘어
그 모든 설정의 주인이다.
모든 곳에 존재하는 '주인공 정하기' 게임
관계에서, 일에서, 일상에서 우리는 누가 좀 더 중요한 사람인지, 좀 더 중심이 되는 지, 좀 더 의미 있는 지 등을 끊임없이 따지곤 한다. 겉으로 드러내어서 하기도 하고 속으로 혼자 하기도 한다. 의식적으로 하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하기도 한다.
둘 만의 연인 관계, 몇몇 간의 친구 관계에서조차도 그런 구분이 존재할 수 있다. 다른 그룹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그렇다. 일종의 '비교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뭔가 사람의 의미나 가치를 결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친구들 그룹에서, 초중고등학교 교실에서, 대학에서, 직장에서, 그 외 모든 영역에서 존재한다.
이 비교의 습관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예들 들어 모든 이의 선망을 받는, 자타가 인정하는 '주인공'급의 사람도 만약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 간다면 거기서 또 새로운 주인공이 누구인지,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지 아닌 지를 따지게 된다. 최근에 뉴스에 나왔던 '미국 명문대생들의 증가하는 자살 문제'도 그러한 맥락이다. 각자의 위치에서는 최고로 대접받던 이들이 그렇게 한 곳에 모이자 그곳에서 또 누가 좀 더 주인공인지 자동으로 본능처럼 견주게 되며, 자기는 아니라고 느끼는 이들은 스스로의 능력과 위치와 존재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로 결국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삶의 주인공 정하기와 비교하기'는 모든 곳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마음의 게임인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자.
'주인공', '비주인공'이라는 이 설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게 정말 어떤 실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어떤 관계나 그룹, 상황 등에서 주인공 그런 거 별로 따지지 않는다고. 그러나 여기서 '주인공'이란 단어는 하나의 상징 표현이다. 다르게 말하면 '뭔가 더 의미 있는 사람, 더 중요한 사람, 더 가치 있는 사람, 더 대접받는 사람' 등을 말한다. 이런 것까지 따지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런 것 따지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어떤 관계든 어떤 상황이든 결국 좀 더 중요하고,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중심이 되는 사람은 전해지게 마련 아니냐고.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고 본능적인 것이 아니냐고.
맞다. 그런 현상이 존재하며 그건 자연스런 것일 수 있다. 문제는 그 현상 때문에 마음이 고통스럽게 되는 경우이다. 만약 아무런 고민도, 힘듦도, 불안, 불만도 없다면 그러면 괜찮다. 심지어 이 글도 읽을 필요 없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 같은 것이 되고 안 되고'에 의해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힘들고, 번거로운 것들이 일어난다면 그러면 그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답은 이렇다.
삶의 어느 순간, 어느 상황이든 주인공 따위는 없다.
그러므로 주인공 아닌 것도 없다.
하여 우리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항상 당당하고 떳떳하게 존재한다.
주의할 것은, 이것이 '주인공이 없다'는 말이 아니란 것이다. 그게 아니라 '주인공'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개념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상관치 않는다, 영향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애초에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그 상황에서 더 중요한 사람, 의미 있는 사람, 가치 있는 사람을 분별해서 그를 좀 더 특별하게 여기는 이름인 '주인공'과, 그렇게 이름을 붙이는'분별 행위 자체'를 넘어섬을 말한다. 그건 필요에 따라 하는 것일 뿐 절대적인 무엇이 아님을 눈치채는 것이다. 실제 주인공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고 없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필요하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아니, 엄연히 좀 더 활동적인 사람, 더 많이 아는 사람, 더 적극적인 사람, 더 중요한 사람이 분명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그렇다, 그런 사람이 있는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굳이 '주인공'같은 이름을 붙여 그렇게 한정하는 것은 실제의 그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주인공이 아닌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이 없으면 주인공이 아닌 사람도 없다. 그런 제한, 설정, 한정이 있든 없든 우리는 그와 상관없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좀 잘 하는 사람이든, 좀 못하는 사람이든 그냥 그럴 뿐 그것 때문에 추가로 더 뭔가 우쭐해 지거나 뭔가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들이 일상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누가 주인공이냐 하는 것보다는 '나는 주인공이 아니야' 즉 '나는 별 것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느낌과 생각이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심리에서는 예외가 없다. 이곳에서는 주인공이던 사람이 저 곳에 가면 또 아무것도 아니게도 된다. 결국 누구든 처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특히 자신이 관계를 맺고 속한 여러 곳에서 연이어 이 '주인공이 아닌 즉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면, 보통은 그때부터 우울함, 심리적 위축감, 자괴감, 자기 비하, 자기 실망, 무기력감, 무능력감, 외로운 등을 느끼기 시작한다. 바로 이게 문제이다.
유명인들 중에 공황장애성 증상을 겪는 이들이 종종 있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각광 받을 때 자아감이 과도하게 커졌다가, 사람들이 더 이상 환호를 보내지 않게 될 때 크게 무너지면서 일어나는 증상인 셈이다. 물론 일반인들도 나름의 상황에서 비슷하게 겪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는, 실제 유명해지거나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가지는 예기적 불안 즉 '아, 이렇게 사람들에게 잘 한다고 인정받다가 나중에 아무 것도 못하는 내 실체를 알게 되면 어쩌지?'하는 식으로 겪게 되는 경우도 있다.
가상의 '원'과 '유리판'을 눈치채기
사회 생활하는 어른들도 겪는 문제이지만 특히 학교에서 아이들이 이러한 부정적 심리의 희생자가 많이 된다. 최근에 한국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몇몇 설문조사 결과가 신문에 나왔던 적이 있다. 한국 사회의 아이들은 특히 남들과의 비교, 경쟁에 의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 심리'로 힘들어하는 정도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매우 높게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불필요한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각자의 능력이나 취향, 성향 등의 차이로 여기저기서 '좀 덜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경험들을 할 수 있다. '좀 더 중요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건 그냥 그럴 뿐이다.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여기서 없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주인공, 좀 더 중요한, 의미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 의식적 '설정, 분별, 비교'과 그에 대한 믿음이다.
비유하자면,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안 그려진 흰 바닥 위에 서 있는데, 갑자기 내 주위에 둥글게 원을 그린 후에 혹은 누군가에 의해 원이 그려진 후에, 이제 스스로 그 원 안에 갇혔다고 설정하는 것이다. '주인공'이라는, 그리고 '비주인공'이라는 원이다.
문제는, 그 원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므로 필요할 땐 그리지만 필요치 않을 땐 그냥 있든 없든 상관치 않거나 혹은 나와 버리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못 나간다고 믿고 있는 것'일 뿐이다. 나아가, 그 원을 꼭 없애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원이 그려져 있어도 상관없다는 것을 알면 된다. 다만 필요에 따라 그 원을 이용하는 것이다.
'유리판 실험'으로 알려진 다음의 한 유명한 실험이 있다.
유리병 안에 파리 한 마리를 넣고, 그 입구 위에 같은 투명한 유리판을 덮어 놓는다. 파리는 몇 번에 걸쳐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다 계속 유리판에 부딪혀 결국 나가지 못한다. 이제 파리는 유리병 안에서 그냥 맴돌며 날아 다닌다. 그리고 유리판을 치운다. 이제 입구는 열려 있다. 그러나 파리는 유리판 근처 리까지만 갔다가 다시 병 안쪽으로 날아가기만 할 뿐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이것은 실제 실험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메타포(비유)일 수도 있다. 실제 실험에서는 혹시라도 날다가 얼결에 유리병 입구 밖으로 나가는 파리도 확률상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비슷한 다른 실험으로 해서 얼마든지 곤충이나 동물의 조건 반사적 행태를 만들 수 있으며, 그 안에 갇히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가령,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인 개의 훈련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훈련소에서, 특정 명령에 의해 절대 집 밖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훈련을 시킨 개는 차후 집에 돌아와서도 같은 행동 양식을 보인다. 분명 거실의 창문이 열려 있는데도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다시, 누가 주인공인가?
이제 다시 처음의 첼로 연주 장면으로 가 보자.
누가 주인공인가?
만약 그 자리가 첼로 연주자의 중요한 연주회라면 그러면 연주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하면 된다. 만약 그 자리가 생일 축하 자리이거나 결혼식 피로연 혹은 장애 아동 등의 특별한 관객을 위한 경우라면 관객들이 주인공이 된다. 역시 상황과 필요에 따라 정하고 사용하면 된다.
주인공이라는 설정을 부정하거나 거부하거나 없다고 할 필요가 없다. 필요하면 그 설정을 만들어 사용하되, 필요 없으면 '다만 설정일 뿐임'을 눈치채는 것이다. 점점 더 선명히 눈치채면 챌수록 불필요한 반응들은 저절로 서서히 사라진다. 물론 어느 정도의 애씀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 연주회이든 모두가 고유의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연주는 듣는 청중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청중은 연주자가 없으면 또한 의미가 없다. 행사 진행과 장소 관리를 하는 스텝들도 마찬가지다. 또 악기는 어떤가? 그리고 연주 소리 자체도 그 역할을 한다. 이 모두가 어우러진 결과가 그 연주회이다. 어느 요소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들을 연주자, 청중, 스텝, 악기 등으로 나누는 것은 사실은 편의상의 것일 뿐이다. 모두가 동시에 필요하다. 즉 주인공, 비주인공의 구분은 본질적으론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이 하나하나의 새로운 첼로 연주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연인 관계, 가족, 친구들, 모임, 학교, 회사, 여러 공동체 그리고 그 상황들.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어나는 현상, 관계, 일들을 우리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기꺼이 경험해 주면 나아가자. 불필요한 설정들, 백지에 그려진 원 안에, 있지도 않은 유리판 안에 갇히지는 말자. 그려져 있다고 해도 상관이 없음을 알자.
우리는 그 설정과 원을 만들고 그린 주인이지 그 안에 갇힐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갇히는 게 오히려 불가능하다. '주인공'이라는 설정마저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