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자기 미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루 MuRu Oct 21. 2015

너와 나, 별개인 둘이 아니라 '극성이 둘인 하나'이다

제대로 행복한 관계를 위해

 '극성이 둘인 하나'라는 표현을 언제부터인가 떠올려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둘'의 자리엔 'N'이 들어갈 수 있으며, 이 N은 무한대까지 가능한 실수이다)


것을 인간 관계에 적용해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너와 나, 별개인 둘이 아니라 '극성이 둘인 하나'이다.




예를 들어, 연인이나 부부가 있을 때 그들은 별개인 둘이 아니라 '극성이 둘인 새로운 하나'이다. 한 가족에 엄마, 아빠, 아이들이 있을 때 그들은 별개인 여럿이 아니라 '극성이 여럿인 새로운 하나'이다. 여러 사람이 연관된 그룹이 있을 때 그들은 별개의 사람들이 아니라 '극성이 그만큼인 새로운 하나'이다.


둘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지만 둘이다. 완전히 갈라진 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획일화된 하나도 아니다. '극성이 여럿인 새로운 하나'이다. 연인도, 부부도, 가족도, 그룹도.


그러면 이제 그 관계 혹은 집단의 궁극의 목표는 개별체 '나'의 행복이 아니라 그 '새로운 하나'의 행복이 된다.


만약 이 부분을 무시하고 여전히 분리된 별개로 착각하여 각각의 입장, 관점, 행복만 고집하면 그 새로운 하나는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연인 간에, 부부간에, 가족 간에 모두가 그렇게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결국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엄연히 존재하는 '새로운 하나'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따로인 극성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혹은 반대로 각 극성(개인)의 입장이나 행복을 고려하지 않고 전체(이 경우엔 '극성이 무시된 하나')만 생각해도 또 문제가 발생한다. 그 전체는 각 극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그 극성들이 없는 양 하기 때문이다. 극성은 엄연히 계속 존재한다. 그러므로 고려해야만 한다.


개인주의도, 전체주의도 결코 답이 되지 못한다.

'극성이 N개인 새로운 하나'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므로 서로 완전히 분리된 별개라는 환상인 '개체(나/너)'의 행복도 아니고 반대로 그 개체(극성)가 무시된 또 다른 환상인 '전체'의 행복도 아니다. '극성이 여럿인 새로운 하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순리이자 지혜가 될 것이다.


만약 연인 간의, 부부간의, 가족 간의, 구성원 간의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다면 상황과 필요에 따라 때로는 극성을, 때로는 하나를, 때로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법과 해결책을 유동적이고 능동적이고 지혜롭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


파트너가, 남편 혹은 아내가, 아이가, 엄마와 아빠가 내가 원하는대로 하지 않아서 힘들거나 불만스러운가? 그렇다면 혹시 나라는 극성 혹은 다른 한 사람이라는 극성의 입장과 관점만 고집하고 있지 않은 지 살펴봐야 한다. 나든 상대방이든 그 극성만을 중심으로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극성을 포함한 그 새로운 하나, 전체 하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자는 것이다. 본래 목표가 무엇인지 집중하자는 것이다.


많은 경우 '극성의 입장'을 버리지 못해, 나 하나의 입장에서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을 계속 고집한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관점이 아니라 비록 '이쪽 극성'인 나는 만족스럽지 않고 달갑지 않지만 그 고집을 잠시  내려놓고 '전체인 하나가  행복해지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전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해결책과 방법들이 보이고 떠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전체인 하나가 행복해 지면, 그 안의 한 극성인 나와 너도 함께 행복해진다. 또한 각 극성들이 고루 함께 행복해자면 전체인 하나도 행복해진다.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접근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이들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