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행복한 관계를 위해
'극성이 둘인 하나'라는 표현을 언제부터인가 떠올려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둘'의 자리엔 'N'이 들어갈 수 있으며, 이 N은 무한대까지 가능한 실수이다)
이것을 인간 관계에 적용해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너와 나, 별개인 둘이 아니라 '극성이 둘인 하나'이다.
예를 들어, 연인이나 부부가 있을 때 그들은 별개인 둘이 아니라 '극성이 둘인 새로운 하나'이다. 한 가족에 엄마, 아빠, 아이들이 있을 때 그들은 별개인 여럿이 아니라 '극성이 여럿인 새로운 하나'이다. 여러 사람이 연관된 그룹이 있을 때 그들은 별개의 사람들이 아니라 '극성이 그만큼인 새로운 하나'이다.
둘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지만 둘이다. 완전히 갈라진 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획일화된 하나도 아니다. '극성이 여럿인 새로운 하나'이다. 연인도, 부부도, 가족도, 그룹도.
그러면 이제 그 관계 혹은 집단의 궁극의 목표는 개별체 '나'의 행복이 아니라 그 '새로운 하나'의 행복이 된다.
만약 이 부분을 무시하고 여전히 분리된 별개로 착각하여 각각의 입장, 관점, 행복만 고집하면 그 새로운 하나는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연인 간에, 부부간에, 가족 간에 모두가 그렇게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결국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엄연히 존재하는 '새로운 하나'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따로인 극성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혹은 반대로 각 극성(개인)의 입장이나 행복을 고려하지 않고 전체(이 경우엔 '극성이 무시된 하나')만 생각해도 또 문제가 발생한다. 그 전체는 각 극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그 극성들이 없는 양 하기 때문이다. 극성은 엄연히 계속 존재한다. 그러므로 고려해야만 한다.
개인주의도, 전체주의도 결코 답이 되지 못한다.
'극성이 N개인 새로운 하나'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므로 서로 완전히 분리된 별개라는 환상인 '개체(나/너)'의 행복도 아니고 반대로 그 개체(극성)가 무시된 또 다른 환상인 '전체'의 행복도 아니다. '극성이 여럿인 새로운 하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순리이자 지혜가 될 것이다.
만약 연인 간의, 부부간의, 가족 간의, 구성원 간의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다면 상황과 필요에 따라 때로는 극성을, 때로는 하나를, 때로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법과 해결책을 유동적이고 능동적이고 지혜롭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
파트너가, 남편 혹은 아내가, 아이가, 엄마와 아빠가 내가 원하는대로 하지 않아서 힘들거나 불만스러운가? 그렇다면 혹시 나라는 극성 혹은 다른 한 사람이라는 극성의 입장과 관점만 고집하고 있지 않은 지 살펴봐야 한다. 나든 상대방이든 그 극성만을 중심으로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극성을 포함한 그 새로운 하나, 전체 하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자는 것이다. 본래 목표가 무엇인지 집중하자는 것이다.
많은 경우 '극성의 입장'을 버리지 못해, 나 하나의 입장에서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을 계속 고집한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관점이 아니라 비록 '이쪽 극성'인 나는 만족스럽지 않고 달갑지 않지만 그 고집을 잠시 내려놓고 '전체인 하나가 행복해지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전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해결책과 방법들이 보이고 떠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전체인 하나가 행복해 지면, 그 안의 한 극성인 나와 너도 함께 행복해진다. 또한 각 극성들이 고루 함께 행복해자면 전체인 하나도 행복해진다.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접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