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좀 더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방법
두려움은 나약함의 상징이자 사악함이다.
- 힌두개혁가 비베카난다(1863~1902, 글 끝에 소개글)의 말
두려움을 나약함의 상징이라 한 건 이해가 된다.
그런데, 두려움이 왜 사악함이 되는 걸까?
그리고, 왜 이 문장이 두려움을 넘어서는 방법과 연관이 있다는 걸까?
우선 다음 과정을 필자와 함께 해 보자. 이 작업은 이 글의 주제인 '두려움을 넘어서는 방법'과 관련된 것이므로 진지하게 집중해서 함께 해 주기 바란다.
먼저 '두려움은 나약함의 상징이자 사악함이다'는 문장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 지 잘 살펴 보자. 처음에 별 느낌이 없었더라도 다시 찬찬히 잘 느껴보면 된다. 사실 앞 부분의 '나약함의 상징'이라는 말은 두려움과 자연스레 연결되는 말이므로 여기서는 큰 의미는 없다. 그것보다는 '두려움은 사악함이다'는 말을 잘 느껴보자.
여기서 '느껴본다'는 것은, 저 문장을 되뇌일 때 나에게 느껴지는 비언어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감정이나 기분일 수도 있다. 몸의 느낌일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는 의식적인 느낌이라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모순되는 느낌으로서 황당함이나 뜬근없음이 느껴질 수 있다. 혹은 뭔가 말이 안되는 느낌, 아무 의미가 없는 느낌 그래서 약간 멍하거나 텅빈 느낌이 있을 수도 있다.
주의할 것은, 느낌의 영역에서는 정답이나 오답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느껴야 하고 느끼면 안 된다는 없다. 여하간의 것이든 본인이 느낀 것, 그것이 바로 정답이다.
어떤 이들은 '두려움은 두려움이지 그게 어떻게 사악함이 될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말이 안된다는 반감도 가능하다. 사실 '두려움=사악함'은 일반적으론 잘 떠오릴 수 없는 배치다. 그런데 또 어떤 이는 이 두 가지의 연결에 대해서 '아, 그래서 두려움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니 그건 사악함과 연결될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간단한 예로, 두려움은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본능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일면 이기적인 측면도 있고 그 두려움에 져서 여러 가지 비겁하거나 악한 행동도 할 수 있으니, 그렇게 본다면 사악하다 할 수도 있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이것은 일부러 급하게 만들어 본 연결이긴 한데, 하지만 예를 들어 2차 대전 때 독일군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국민을 괴롭히는 역할을 맡았던 프랑스의 매국노들이나, 일제 시대 일제의 파워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국민을 괴롭히는 친일 행위를 한 경우들에 대해서 '두려움은 사악하다'는 문장의 적용이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여기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의문이나 해석과는 상관 없이 '두려움은 나약함의 상징이자 사악함이다'라는 저 문구를 보면서 자신에게 이제 '두려움'이란 것이 어떻게 느껴지는 지를 보는 것이 핵심이다. 특히 이 문구를 보기 전과 비교해서 뭔가 달라진 것이 있는지. 아주 미묘한 차이에서부터 제법 큰 차이까지 모두 가능하다.
저 문장 자체에 대한 느낌과, 그로 인해 '두려움'에 대해 달라진 나의 개념이나 느낌의 변화나 차이를 잘 관찰해 보는 것이 여기서의 핵심이다. 만약 어느 정도 이 작업을 했다면 그러면 아래 글로 넘어가자.
'두려움은 사악함이다'라는 말이 주는 효과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의 느낌과 반응은 그것대로 모두 그대로 받아주자. 모두가 나름의 정답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상태에서 이제 아래의 내용을 보자.
두려움에 가장 상응하는 개념은 '나약함'이다. 그래서 비베카난다도 먼저 '나약함의 상징'이라고 했다. 소심함이고 겁 많음이다. 자신 혹은 자신과 연관된 것들의 안위, 안전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이다. 그런데 두려움에 대해 우리가 평상 시 생각하는 기존의 연관 감정, 생각, 개념들은 다시 반복하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극복 등에 별 다른 영향을 주진 못한다.
두려움을 가지지 않기 위해 나약함을 극복해야 한다거나, 대범해 지라거나, 겁 먹지 말라거나 하는 조언은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내가 두려워 하는 대상이나 상황과 대면했을 때 혹은 그것을 상상할 때 나에게 느껴지는 심리적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 하는 노력도 대부분의 경우 크게 효과를 만들지 못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이라는 기존의 개념을 이미 받아들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미 두려운 대상이고 상황이며, 그러므로 나는 이전에 경험했던 혹은 상상하고 있던 그 두려움을 그대로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떨쳐내려 한다는 것, 극복하려 한다는 것, 없애려 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은 느끼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좀처럼 눈치채기 힘들고 벗어나기 힘든 아주 교묘한 마음의 게임과 같다.
그런데 '네가 느끼는 두려움은 곧 사악함이다!'고 한다면 어떨까?
사실 이 문장을 처음 볼 때, 우리의 마음은 잠시 멍~할 수 있다. 왜냐하면 두려움과 사악함은 상식적으론 연관시켜 떠올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겁먹고 두려워 하고 있는데 내가 사악하다고? 나는 약하고, 수종적이고, 소심하기만 한데? 오히려 사악해져 봤으면 좋겠네!라고 반응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마치 '밝은 어둠', '하얀 검정', '뜨거운 차가움' 같은 말과도 비슷하다. 실제 우리는 밝은 어둠과 하얀 검정, 뜨거운 차가움 같은 걸 떠오릴 수 없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다. 하지만 상상과 느낌으로 뭔가 여러 느낌을 만들어 보거나 떠오릴 수는 있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처음에 혹은 기본적으로 깔리는 어떤 멍~한 느낌, 허공성, 무상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게 애초의 본질적인 느낌이다.
사실 '두려움은 사악함이다'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과 효과는 의외로 아주 크다. 이 문장은 '두려움'이라는 개념 자체를 무력화 시키거나 흔들어 버린다.
어째서 그런가?
보통 우리가 '두려움'이란 개념을 처음 떠올리면 그에 이미 전제되고 연결되는 여러 다른 느낌, 감정이나 사유들이 자동으로 떠오르거나 혹은 떠오르기 위해 잠재되어 있게 된다. 위에서 이미 말한 나약함, 소심함, 겁 등이다. 그런데 그 순간 '사악함'이 떡허니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악함에서는 일단 나약함, 소심함, 겁 등이 바로 연상되지 않는다. 그런 연결고리는 아주 약하다.
오히려 '사악함'에는 뭔가 어둡지만 강력한, 결코 물러서지 않는, 앞에 걸리는 것들은 다 쳐내고 나가는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 물론 여러 부정적 느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느낌이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느낌은 아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사악함'에서 나오는 여러 느낌과 감정은 '두려움'에 붙어 있던 느낌과 감정들을 상쇄시키거나 중화시키거나 오히려 반대로 만드는 기능을 한다.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얼마나 이러한 과정을 더 강하게 경험하느냐에 따라 두려움에 대해 가졌던 기존의 개념과 느낌에서 자유롭게 될 수도 있다.
사실 두려움은 이겨내거나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은 넘어서는 것이다.
물론 그 '넘어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확실한 방법은 '두려움'이라는 이 만들어진 개념, 그 설정성, 그에 대해 만들어진 느낌과 믿음의 정체를 눈치 채는 것이다. '두려움'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우리가 두려움이라 이름 붙이고 만든 어떤 본래의 현상과, 그 현상에 덧붙여진 '부가 설정'을 선명히 구분해 내는 것이다.
실제로는, 어떤 현상은 있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것은 단지 그 현상에 추가된 이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이름에 여러 가지가 덕직덕지 또 붙어서 최종적인 개념의 덩어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 두려움은 아주 큰 주제이다. 그것의 경험도 그렇고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이겨낼 것인가에도 관심들이 많다. 그리고 여러 해결책들이 제시되기도 한다. 모두 나름대로 유용하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두려움을 넘어서려 해도 그 방법들은 모두 '상대적' 방법들이 될 뿐이다. 무슨 말이냐면 두려움이라는 개념의 설정을 기존의 것 그대로 전제하면서 그를 극복하기 위해 취하는 모든 방법들은 결국 그 두려움이라는 의식 혹은 개념의 프레임 안에서 행해지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뭔가 두려움을 이겨내거나 벗어나는 듯 하지만 결국엔 다시 그 안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미 두려움이란 설정이 '전제'로 깔리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두려움은 분명 본능적으로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인데 그럼 그것을 '없는 척'이라도 하란 말인가? 그런데 그게 그렇게 한다고 없어지는 것인가? 두려움의 반응은 모든 동물들이 가지는 생리적 반응이기도 한데, 그것을 없다고 여긴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맞다. 두려움의 여러 생리적, 본능적 반응은 살아있는 개체가 자신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보호 본능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제대로 해석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 동안 간과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바로 '본래의 두려움 반응'과 '만들어진 두려움 반응'이다.
'본래의 두려움 반응'은 앞서 말했던 개체의 자기보호 본능으로서의 여러 오감적 반응, 생리적 반응이다. 만약 숲 속에서 사슴이 풀을 뜯고 있다가 건너 풀 숲에서 부시럭 소리가 난다면, 순간 포식자가 아닌가 하면서 몸을 긴장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면서 몸 전체의 근육이 긴장되고, 심장이 빨리 뛰고, 눈의 동공도 커지며 여차하면 튀어갈 준비를 하게 된다. 즉 자기보호를 위해 긴장에 관계되는 교감신경반응들이 활성화 되는 것이다.
아마 사슴의 경우라면 거의 몸의 긴장 반응이 전부일 것이다. 정서적 반응은 있긴 있겠지만 사람같이 선명하진 않을 것이다. 사람의 경우는 여기에 확실한 정서 반응도 더해진다. 물론 이 정서 반응 역시 여러 호르몬의 분비 등의 과정과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 '만들어진 두려움 반응'은 무엇인가?
뇌과학에서는 객관적 '통증'과 주관적 '고통'을 느끼는 뇌의 부위가 다르다는 것이 오래 전에 관찰되었다. 즉, 만약 팔에 바늘 같은 것을 꽂는다고 할 때 그 통증을 느끼는 부위와 그것을 '아, 아프다. 싫어. 무서워.'라며 고통 혹은 불안으로 느끼는 부위가 별개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어떤 사람이 몸의 어느 부위에 상당히 심한 통증이 느껴질 때, 어떤 방법(최면이나 주의 돌리기 등)을 사용해서 고통스럽다거나 싫다, 불안하다 등의 감정과 심리 대신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하거나 편안한 상념에 잠기게 의식의 초점을 돌리게 되면, 그는 그 통증은 느끼되 그에 대해서 무심해 지거나 무관심해 질 수도 있다.
만약 이러한 의식의 전환 작업이 잘 되면, 보통 보여 주는 주관적 고통의 반응 즉 아프다고 소리친다거나 얼굴을 찡그린다거나 참을 수 없다고 뿌리친다거나 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된다. 가령 유명한 옛 고사 중에 어느 장수가 전쟁터에서 팔에 맞은 화살을 뽑는 수술을 하는데, 맨 정신으로 수술을 받는 동안 앉아서 무심히 바둑을 두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그 맥락이며, 뉴스를 검색해 보면 순수 최면유도에 의한 마취(화학 마취 없이)로만 외과 수술을 받는 사례 등을 찾을 수도 있는데 모두 같은 현상이다.
여기서 '본래의 두려움 반응'이 객관적 통증 반응과 같다면 '만들어진 두려움 반응'은 주관적 고통 반응과 같다.
즉 본래 오감과 생리적으로 느끼는, 그리고 여러 호르몬의 분비로 인해 느끼는 것들이 '본래의 두려움 반응'이라면, 여기에 사람이 자신의 경험과 상상, 추측, 예상, 설정, 짐작 등등에 의해 더해진 여러 감정 반응과 생각들이 '만들어진 두려움 반응'인 것이다. 물론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도 자기 수준에서 이러한 '만들어진 두려움 반응'이 충분히 더해질 수 있다. 사람은 이게 가장 심하다 볼 수 있다.
두려움을 좀 더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방법은,
첫 번째, 우선 '본래의 두려움 반응'과 '만들어진 두려움 반응'의 차이를 알아차린다.
: 개념적으로도 그리고 실제 느낌과 경험적으로도. 그래서 본래는 단지 신체, 생리적인 두려움 반응일 뿐임을 자각한다. 더하여 일어나는 정서적, 심리적 두려움은 추가 반응임을 눈치 챈다. 이 추가 반응은 실제 두려움이 아니라 설정되고 만들어진 것임을 눈치 챈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동으로 이 만들어진 추가 반응을 '실제 두려움'으로 착각하고 있음을 알아 챈다.
두 번째, 한 단계 더 나아가 궁극적으론 '두려움'이란 개념과 그와 연관된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임을 눈치 챈다.
: 단지 '만들어진 두려움 반응'만이 아니라, '두려움'이란 개념 자체가 만드러진 것임을 알아 챈다. 애초에 그리고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건 신체적, 오감적 긴장 반응일 뿐임을. 그것은 '두려움'이라는 개념과 아무 상관이 없다.
세 번째, '두려움은 나약함이다'가 아니라 '두려움은 사악함이다'는 문장을 대할 때와 같이 '두려움'이라는 기존의 설정 자체를 의도적으로 흔들고 무너뜨려 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한참을 머무르며 그 어떤 텅빔의 느낌, 중립적 느낌, 초기화의 느낌과 감각을 누리고, 향유하고, 즐기고, 만끽해 본다. 잘 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 사실 제대로 눈치 채면 흔들고 무너뜨릴 것도 없다. 필요하다면 '두려움'이란 단어를 배우기 전의 어린 시절 상태를 상상해 보는 방법도 좋다. 꼭 그 단어만이 아니라 어른들이 두려움의 감정과 반응을 주입하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 단어를 몰라도 비언어적으로 먼저 형성된 '두려움'이라는 감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마저도 없었던 때를 말한다. 이것은 '상상'이므로 자신이 그런 상태였던 때를 상상으로 만들어 상상으로 경험하여도 충분하다.
추가 사항: '두려움'의 넘어섬 등과 전혀 상관 없이 만약 그러한 느낌, 상황에서 여하간의 어려움, 고통, 힘듦, 곤란함을 처리하기 위해 해야 할 필요가 있는 행위들이 있다면, 가장 적극적이고 지혜로운 행동을 취한다. 가만히 있거나 두려움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은 자유롭게 다 하면 된다.
참고: 비베카난다는 인도 힌두교의 정신적 지도자, 개혁가였다고 한다. 비베카난다는 사회개혁을 중시했는데, 브라마 사마지에 가입해 조혼제도 철폐와 문맹퇴치를 위해 노력했고, 여성과 하층계급에 대한 교육을 확대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뒤에 모든 종교의 근본적 일치를 천명한 라마크리슈나의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되었다. 그는 언제나 독단적 교리보다는 봉사에 대한 신념과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만연된 평화주의의 강조보다는 인도의 정신을 서양에 전함으로써 인도 사상에 활력을 불어넣으려고 애썼다. 그는 미국과 영국에서의 베단타(우파니샤드의 해설) 운동을 뒷받침하는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