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적 의존이 아니라 수평적 사랑을
“모세, 예수 그리스도, 무함마드, 라마, 붓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지상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어.”
“그럴 리가 없어. 이들 모두에게는 지금까지도 수백, 수천만의 숭배자들이 있는데?”
“숭배한다는 것은 곧 의존한다는 것이야. 그런데 의존이 사랑을 의미하지는 않아. 의존은 사람에게만 있는 ‘생각의 힘’을 앗아갈 뿐이야. 사람이 누군가를 의존한다는 것은 자기를 비하하고 자기를 배반하는 것이고, 오히려 그 의존의 대상에게서 멀어지는 것이야.”
일전에 읽은 어느 책의 한 구절이다.
위 글에서는 ‘숭배’라는 말을 썼지만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의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것은 의존이 아닌 사랑이다. 예수와 붓다들마저도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했던 것은 사랑이었다. 그들은 아마 자신에게 직접 오는 숭배 즉 의존은 모두 거절하였을 것이다. 불경이나 성경에도 그런 예화가 많다. 왜냐하면 일방적 의존은 서로 간의 진정한 교류와 사랑을 방해할 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초점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려 보자. 우리 중에는 상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는 그를 의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관계에 의존의 요소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 자신과 상대 모두 점점 힘들어진다. 의존과 사랑을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수직적 의존은 우리를 긴장시키지만 수평적 사랑은 편안함과 자유를 선물해준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를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아도 그 패턴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내면의 두려움이 건드려지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의존할 사람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럴 때는 관계를 떠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의존을 사랑으로 말하는 것은 상대에 대해 솔직하지 못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만남과 관계에서의 다소 혼란스러운 이런 상황에 대해 매번 두려워하거나 피해 버리면 이후의 또 다른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관계를 멈추는 것도 아니고 계속하는 것도 애매한 상태에 머물게 된다. 관계를 떠나면 나와 상대 모두에게 자유와 새로운 기회가 올 수도 있지만 서로에게 깊은 상처와 원망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지혜로운 것일까?
물론 표면적인 선택지는 관계를 유지하거나 떠나는 것 중 하나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택하든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마음이다. 즉 그러한 의존의 구조를 알아차리고 더 이상 그와의 관계를 의존으로 맺지 않게 되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관계를 계속할지 안 할지, 상대를 떠날지 말지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다.
의존 관계를 해결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먼저 ‘떠나는 것’만을 고려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그것을 ‘회피’라 느끼기도 한다. 또한 관계를 끊으면 상처와 원망이 남을까 염려도 된다. 또 헤어지는 것이 옳은 방법인지 아닌 지 고민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은 스스로 아직은 ‘내면의 마음’이 아닌 ‘외부 행동’에 더 중요성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내면의 마음이다.
물론 내부 마음은 외부 행동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떠남으로써 내면의 복잡했던 심리가 정리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마음의 정리와 병행하지 않은 채 외부 행동만 변화시키는 건 미봉책에 그칠 여지가 많다. 관계에 위기나 어려움이 왔을 때 무조건 떠나는 것만을 해결책으로 하면, 이후에 비슷한 상황이 올 때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또다시 피해버리는 것이 반복될 수 있다. 물론 떠아야 할 때는 떠나고, 헤어져야 할 때는 헤어져야 하겠지만 위기나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고 그 후에 더 깊은 사랑과 관계를 나누는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그 관계를 끊을지 말지 결정하는 것과 별개로 먼저 내 마음에서 관계의 목표를 선명히 세워야 한다.
그 목표는 ‘수직적 의존’이 아닌 ‘수평적 사랑’이다.
관계에서 ‘의존’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양쪽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존적 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존하는 측은 주로 심리적 의존과 삶에서의 책임전가, 그리고 의존받는 이는 존재감 인정과 고양되는 자존감 등이 주 이익이다. 즉 진정한 사랑이 ‘상대방이 잘되도록 서로가 서로를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라면, 의존은 ‘나의 잘됨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는 메커니즘’이라는 뜻이다. 관계가 지속될수록 서로에게 이익이 되기보다는 양측이 모두 희생되고 고통받게 되는 구조다. 때로 겉으로는 화려하고 멋있는 관계로 보인다 할지라도, 실제 각자의 내면은 그 반대로 가게 된다. 그러다 결국 파국을 맞으면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본래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의존하거나 의존받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동등하게, 수평적으로, 편안하게 사랑을 나누는 존재이지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높아지거나 낮아지며 그에 수반된 수직적 관계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는 왜곡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선 나의 내부에서, 기존의 의존이 아니라 성숙한 상호 나눔을 시도해보자. 의존을 하든 의존을 받든 ‘의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아직 내가 한 인간으로서 건강하고 성숙하게 홀로 서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외부적으로 떠날지 말지, 헤어질지 말지는 부수적이다.
의무나 강제는 아니므로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안 되면 무리해서 할 필요도 없다. 일종의 연습으로서 시도해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가 먼저 내면에서 이제까지의 ‘의존 메커니즘’이 아닌 ‘사랑 혹은 동등한 상호 나눔’을 할 수 있는 힘을 일으키는 것이다. 상대방 또한 나처럼 나약하면 나약하고, 또 강하면 강한 똑같은 존재임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와 그, 두 사람 모두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한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임을 선명하게 인식하면서 서로를 만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힘들 수도 있지만 인내를 가지고 계속해가면 중간중간 위기가 오더라도 점점 성숙한 관계로 바뀌어갈 것이다. 이것은 관계와 삶을 위한 훈련이다.
그런데 나는 나름의 노력을 통해 의존적 관계를 많이 벗어나고 있는데 상대에게는 의존 관계의 관성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상대는 아마 나의 변화를 거부하거나, 내 변화에 분노하거나, 관계를 끊으려 할지도 모른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말하자면 그의 한계가 거기까지인 셈이다.
이럴 때 선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내를 가지고 계속 나와 그의 변화가 함께 일어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억지나 강제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고통스러워하면서 할 필요도 없다. 이 모든 노력은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의 행복을 위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계속 인내하며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둘은, 관계를 멈추는 것이다. 수직적 의존을 수평적 사랑으로 바꾸려는 나의 노력에 상대방이 결국 함께 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강제적으로, 억지로 헤어질 필요는 없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지도록 하면 좋다.
이렇게 관계를 정리한 다음에도 차후에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 서로 상처받을 가능성이 고민스럽고, 그래서 과연 내가 진정한 사랑을 만들 수 있는지 염려될 수 있다. 그러나 의존과 사랑의 본질적 차이를 선명히 알아차리고, 내면에서부터 어느 정도 정리된다면 이러한 걱정은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므로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하루빨리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현실적 상황도 있을 것이다. 내면이 정리되길 기다릴 여유가 없는 경우다. 그런 정도라면 관계를 억지로 이어갈 이유는 이미 없어진 셈이다. 그러면 능동적으로 관계를 멈추자.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내부적으로 계속 나와 상황을 성찰하면 된다. 반드시 ‘관계 안’에 있을 때만 성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렇게 해서 관계에 대한 통찰을 갖게 되면 다음에 비슷한 패턴이 반복될 때 훨씬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의 실패나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후의 관계를 더욱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수직적 의존이 아닌 수평적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