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를 살아라'는 말에서 만약 '지금'을 과거, 현재, 미래애서의 '현재'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여기'를 저기와 여기 중에서의 '여기'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완전히 오해한 것이 된다.
광대무변한 시공간에서 '지금, 여기'라는 고작 한 점에만 살겠다는 의미와 같기 때문이다. 그런 뜻이면 저 말은 아무 의의가 없다.
'지금, 여기를 살아라'에서의 지금과 여기는 다만 도구로 사용된 임시 이름일 뿐이다.
이 때 말하는 '지금'은 그 때, 나중, 지금에서의 지금이 아니다. 인간이 인위적(임시적)으로 만든 것에 불과한 '시간'이라는 개념과 더 이상 상관 없는 지금이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더 이상 개의치 않는 지금이다. 그에 의존하지도, 기대지도, 기반하지도 않는다. 어느 것에도 사로 잡히지 않은 지금이다.
상대적 효용상 만들어 쓰는 '시간성'이란 설정에 더 이상 사로 잡히지 않는 지금이다. 비한정의, 자유로움의 지금이다. 영원보다도 더 길고, 찰나보다도 더 짦은 지금이다.(물론 정히 말을 하면 그렇다는 것이지 영원, 찰나와도 아무 연관이 없다).
이 때 말하는 '여기'는 공간이라는 인위적 설정을 떠난 여기이다. 저기, 거기, 여기에서의 여기가 아니다. 공간이라는 가상의 설정에 기반하는, 의존하는, 기대는 여기가 아니다.
역시 상대적 효용상 만들어 쓰는 '공간성'이라는 설정에 더 이상 잡히지 않는 여기이다. 비한정의, 자유로움의 여기이다. 무한대의 허공보다도 넓고, 무한소의 궁극의 미립자보다도 작은 여기이다.(정히 말로 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무한대소와 아무 연관이 없다).
'지금, 여기를 살아라'는 문구를 음미(명상)할 때 우리가 할 것은, 이렇듯 기존에 무심결에 혹은 무의식적으로 혹은 자동으로 '의존하던, 기반하던, 기대던' 시공간이라는 이 설정을 잠시 떠나서 존재해 보는 것이다. 잠시 지워보는 것이다.(물론 '존재'라는 개념 자체가 논리적으로 이미 시공간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잠시 빌려 쓸 뿐이므로 그에 개의치 않고 하면 된다)
그래서 아주아주 가벼워져 보는 것이다.
상대적 편의상, 효용상 시간성과 공간성을 만들어 쓰곤 있지만, 본래는 그 어느 순간에도 실제 그 안에 갇힌 적이 없음을 만끽해 보는 것이다. 애초에 없는 것에 어떻게 갇힐 수 있는가.
(#주: 사실 이건 이렇게 노력하거나 애써서 느껴야 하는 그런 건 아니다. '본래 그런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본시 그러함'을 눈치채어 항상 그러함을 알아채는 것이다.
다만 기존의 '시공간 설정의 절대성'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너무 단단하므로 그것을 한번 부드럽게 풀어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지금, 여기를 살아라'도 하나의 방편이 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