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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Nov 04. 2016

인간관계에서 나에게 부담스러운 사람에 대처하는 방법

내 이미지로 만든 그 사람이 아니라 실제 그 사람을 보기

삶 속에서 맺는 인간관계에선 우리가 부담스럽게 느끼는 상대가 가끔 생긴다. 그 부담은 주로 부정적인 경우가 많으며 가끔 긍정적인 경우도 있다. 누구를 심하게 혐오하게 되거나 두려워하거나 싫어하게 되는 등이 부정적 반응들이고, 과도하게 좋아하게 되거나 빠져들게 되는 게 긍정적 반응일 것이다. 특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건 부정적 반응을 느끼게 되는 이들이다.


이럴 경우 명심하면 좋은 말이 있다. 


내가 부담을 느끼는 그 사람은 실은 그 정도의 꺼리나 인물이 아니다


즉 많은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실제 중요도나 위협 혹은 혐오성보다 훨씬 더 심하거나 강하게 그를 느낀다. 사실은 그가 '그 정도의 사람이나 인물'이 되지 못하는데도 말이다.(주로 부정적 경우이지만 긍정적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다시 부연한다. 왜냐하면 두 가지 모두 착오임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종종 상대를 본래보다 더 과도하게 느낄까? 더 크게 혹은 강하게 혹은 위협적으로 혹은 혐오스럽게 혹은 우습게 여기게 될까? 또한 반대로, 더 중요하게, 매력적이게, 위대하게 느낄까?


이유는 내가 과거에 경험한 관계와 사람의 이미지를 그에게 덧씌우기 때문이다 


특히 어릴 때 경험했던 부모나 기타 사람들이 나에게 했던 행동이나 경험을 지금의 그에게 무의식적으로 투영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경우가 그렇다. 그러니 본래보다 더 강하게, 환상을 더 해 그를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느낌이 맞다고 여긴다.


어릴 때 자신에게 부정적 말과 행동을 많이 한 부모님들이 있는 경우, 어느 정도 나이가 들거나 성인이 되어서도 그들의 목소리가 내 안의 목소리가 되어 내가 나를 계속 위축시킨다. 그리고, 다른 관계와 상대가 나타났을 때 혹시 그가 과거의 부모들과 비슷한 특성 등을 보이면 나도 모르게 상대에게 과거 인물(이 경우는 부모)을 투영한다. 하지만 무의식적인 과정이라 내가 그렇게 하면서도 스스로 눈치채지 못한다. 


부모만이 아니다. 삶의 과정 중에 어떤 경우든 우리는 '부담스러운 상대'들을 만나게 되어 있다. 만났다 헤어진다. 그런데 과거 그 사람 때문에 경험한 불쾌한 '관계 경험'에 대해 우리는 자기보호 기제를 발동시킨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다음에 또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안 돼. 저런 사람은 위험해!'라고 각인시킨다. 그리고 후에 비슷한 경향의 사람을 만나면 실제 그 사람이 아닌 '과거 사람의 이미지'를 그에게 그만 덮어 씌워 버리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그 결과 상대가 과도하게 부담스럽거나 두렵거나 혐오스럽기 시작한다. 그는 그냥 한 말이나 행동인데 나는 크게 위축되거나 반응한다. 혹은 그가 실제 내가 느끼는 부정적 행동을 한 경우라도, 실제 느껴야 할 정도보다 한참 크게 그걸 느낀다. 


이것이 왜 문제냐면, 이렇게 되면 이제 정상적이고 효율적인 반응보다는 과도하고 빗나간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말과 행동에 대한 나의 해석에 오류가 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적절하고 효율적인 분석과 반응을 놓치게 된다. 이것은 결국 나의 손해가 되고, 결국 상대에게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내가 맘 속에 가진 '상상의 이미지'를 그에게 씌우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의 경우와 비슷하지만 또 조금 다르다. 앞에서도 일종의 상상의 이미지를 그에게 투영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과거의 인물'의 이미지였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꼭 내가 실제 경험한 과거 인물이 아닌 '상상의 이미지'이다. 


여기서도 부정적, 긍정적 이미지 모두 해당된다. 동화나 소설, 종교 등에서 나타나는 정형화된 인물이나 존재들을 생각하면 된다. 범죄자, 악당, 악마. 그리고 반대로 영웅, 천사, 신 등이 그런 이미지의 상징들이다. 실제 완전히 악마이거나 완전히 천사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이미지를 곧잘 상대들에게 덧씌우곤 한다. 왜냐하면 그게 더 손쉽기 때문이다. 반면 상대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당한 판단을 하기 위해 내가 좀 더 애를 써서 알아보고, 주의해서 판단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의식적 게으름의 문제이다. 


부정적 이미지 씌우기에서 주로 많이 나타나는 건 상대방에 대한 과도한 악마화이다. 즉, 상대를 본래 보다도 훨씬 더 나쁘게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상대의 오류와 잘못을 지나치게 과대화 하는 경우도 해당된다. 물론 실제 상대가 어떤 잘못이나 오류를 행한 부분은 분명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실제 한 만큼이 아니라 지나치게 악마화, 오류화 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나 분석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 결과 나는 오판을 하게 되고, 이것은 나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다. 


덧씌워진 긍정적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에 대한 과도한 영웅화, 천사화, 위대성 부여는 결국 여러 가지 오류를 낳게 만든다.  



해결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 째,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투영된 내 안의 과거 인물의 흔적을 선명히 눈치채고 그것을 최대한 지우거나 멈추고 상대를 보는 것이다. '상상의 이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상대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과거의 인물과 섞어서 보지 말고.


내가 상대에게 제대로 반응하고 있는지 혹은 과거 이미지를 투영하거나 상상의 이미지를 덧씌워서 반응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판정해 볼 기준이 하나 있다. 바로 '나의 과도한 감정 반응'이다. 


내가 정상적으로, 상식적으로 상대에게 느끼거나 보일만한 감정 반응보다도 뭔가 더 과도하고 지나친 듯한 반응이 느껴질 때 스스로 의심해 보아야 한다. 혹시 내가 과거의 경험, 과거 누구의 이미지를 그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 지 말이다. 만약 정상적이고 적절한 감정 반응이라면 물론 상관 없다. 이를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느낌과 판단, 생각을 절대시 하는 본능이 있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그러나 실제는 오류와 착오가 많다. 어느 정도 자신의 느낌, 판단, 생각을 신뢰하고 그에 바탕에 살아가는 것은 당연히 기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즉, 비록 내 느낌과 판단이지만 나 스스로 잘 살펴서 '아, 지금 느낌과 생각은 이렇지만, 실제 상황은 아닐 수도 있'는 때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좋다. 


실제 그 사람이 아닌 내 내면의 과거 이미지, 과거 투영에 기반한 관계 맺음은 나와 상대 모두에게 해가 되고 불필요한 고통이나 충돌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이 환상적 투영을 최대한 줄이거나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봐야 할 것이 있다. 앞서 말한 '과거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과거 당시 혹은 그 후에 내가 '상상의 이미지'를 덧씌운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즉, 과거의 해당 경험 중에 실제 그 사람 자체보다 뭔가 더 과대하여 그에게 어떤 이미지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 인물의 느낌, 영향을 계속 그대로 유지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에게 내가 과도하게 준 이미지가 있다면 이제라도 덜어 버리거나 축소하거나 없애 버리면 된다. 그게 나에게 이롭다.


둘째, 상대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다 취한다. 


위에서처럼 내가 부담을 느끼는 상대들에 대해 내 안의 '과거 이미지'가 원인이 되는 부분을 잘 살펴보라고 해서, '상상의 이미지' 부분을 보라고 해서 상대에 대한 나의 느낌과 판단을 모두 무시하고, 상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게 아니라 오히려 더 효율적이고 정확한 느낌과 판단을 가지자는 말이다. 그래서 더 바람직한 관계를 맺자는 것이다. 환상보다는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면 볼수록 더 나은 관계가 형성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론 '상대에게 투영된 나의 부정적 과거 인물 이미지, 상상의 이미지'를 알아채고 눈치채긴 하되, 그와 별도로 만약 내가 상대에게 취할 정당하고 적절한 행동이 있다면 최대한 취하는 것이다. 


상대를 무시하거나 무심할 수도 있고, 정당하게 항의할 수도 있고, 상대에게 화를 낼 수도 있다. 만약 필요하다면 상대와 싸울 수도 있다. 가장 효율적이고 필요한 행동을 선택해서 취하면 된다. 아무 제한이 없다. 핵심은, 만약 내가 느끼는 과도한 두려움, 분노, 혐오 등이 실제 그의 모습보다는 나의 투영인 부분이 크다는 게 느껴지면 나의 반응을 줄이거나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의할 부분이 있다. 어떤 구도이든 항상 100% 는 없다는 것이다. 즉, 나의 내부 이미지는 나의 책임이지만 상대는 또 상대대로의 책임과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원인'과 '상대의 원인' 모두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이다. 


사실 우리의 본래 목표는 이 둘째 해결책이다. 즉, 내가 상대에 대해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롭고 적절하고 효과적인 관계를 맺는 것, 이것이 목표이다. 첫째 해결책인 내 안의 이미지, 과거 이미지, 투영된 이미지, 상상의 이미지를 눈치채는 것도 결국 이것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 이해에 오류가 있으면 그만큼 나의 대응과 관계 맺음도 원만하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실제 그 사람이 그렇다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필요 없으면 무시하고, 필요하면 마땅한 대응을 하면 된다


어떤 경우엔 상대방이 실제로 지금 내가 느끼고 파악한 그런 사람일 수 있다. 그렇게 힘들거나, 두렵거나, 짜증 나거나, 혐오스럽거나, 매력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내가 투영한 이미지만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그에 맞추어 가장 적절한 반응을 하면 된다. 언제나 '아냐, 내 판단이 틀릴 수 있어'라고 하라는 말은 아니다. 굳이 이 글에서 과거 인물의 투영이나 상상의 이미지 투영을 말한 이유도 사실은 실제 그의 모습, 실제 그의 상태를 최대한 제대로 보기 위함을 잊지 말자. 


그러므로 아무리 분석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에 대한 나의 느낌과 분석이 맞다면 최대한 적절한 대책과 행동 방식을 찾아서 그에게 대응하도록 하자.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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