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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Oct 12. 2017

사람의 가치는 그가 가진 능력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능력과 가치의 분리. 그리고 가치를 넘어섬.

한 사람의 능력과 뛰어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 두 가지를 가진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를 가진 경우도 있다.


그 영역은 아주 다양하다. 외모가 뛰어난 경우, 운동 능력이 뛰어난 경우, 음악이나 미술 능력이 뛰어난 경우, 춤과 섬세한 동작에 뛰어난 경우. 그리고 수학적 능력이 뛰어난 경우, 기계 공학적 능력, IT 관련 능력, 분석 능력이 뛰어난 경우, 상상력이 뛰어난 경우.


경제 구조에 대한 파악 능력이 뛰언나 경우, 인문적 사유 능력이 뛰어난 경우, 심리 파악 능력이 뛰어난 경우, 인간에 대한 이해 능력이 뛰어난 경우, 암기 능력이 뛰어난 경우, 암기와 암기된 것의 통합과 유추 능력이 뛰어난 경우, 노력하고 애쓰는 능력이 뛰어난 경우, 성실성이나 인품 능력이 뛰어난 경우.


대화 능력이 뛰어난 경우, 집안 일 능력이 뛰어난 경우, 아이 보기 능력이 뛰어난 경우, 요리 능력이 뛰어난 경우, 타인 배려 능력이 뛰어난 경우, 사업 능력이 뛰어난 경우, 남의 말을 잘 듣는 능력이 뛰어난 경우, 자기주장 능력이 뛰어난 경우, 혼자 하는 능력이 뛰어난 경우, 남들과 함께 있는 능력이 뛰어난 경우 등등 많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착각 하나는, 이러한 능력과 뛰어남의 유무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가 가진 능력의 정도는 그의 가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능력은 하나의 '기능'에 불과하다. 물론 능력이 좋을수록 그 개인은 여러 이점을 누리며, 성취도 더 많이 하게 되고 당연히 사회에 끼치는 영향도 크게 된다. 이런 것을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잘 보면 된다. 그가 가진 능력이 주위 사람과 조직, 사회 등에 좋은 기여를 했다면 그에 해당되는 만큼 적절한 대가를 주면 된다 그것은 돈이 될 수도 있고 지위나 사회적 존경 등도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문제는 그 능력과 그에 의한 성취 등을 그 사람의 '가치'와 동일시하거나 연결시키는 부분이다.


인간의 가치와 그의 능력(과 성과)을 동일시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냐면, 그 동일시가 심하면 심할수록 불필요한 반응과 과정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가령 누가 어떤 능력이 없다면 그건 그냥 '그에게 그런 능력이 없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를 인간적으로 비하하거나 개인적, 사회적 가치를 낮추어 버리면 이제 우리는 그에게 부당한 대응과 대접을 하기 시작한다. 물론 우리도 타인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는다. 이것은 상호 작용이다. 반대로 누가 어떤 능력이 뛰어나게 있다면 그것도 그냥 '그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는 것' 뿐이다. 그런데 그걸 넘어 과장되게 그를 높이거나 중요시하게 되면 역시 여러 부작용이 생긴다. 일상에서 우리는 양쪽 모두의 사례를 자주 보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러한 측면을 완전히 모르는 것도 아니다. 즉 누군가 자신의 능력 부족을 자신의 가치로 연결시켜 스스로 너무 비하하거나 위축되는 모습을 볼 때, 누구도 그게 잘 하는 것이라고, 정상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고 싶어 하고 가능하다면 그런 심리에서 빠져나오도록 돕기도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자신의 능력과 뛰어남에 도취되어 스스로 과대 자아를 가지게 되는 모습을 보면 다들 속으로 뭔가 잘못되고 가당치 않은 모습임을 느낀다.(다시 말하지만, 능력에 대한 정당하고 객관적인 응대나 대접, 대가의 지불 등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걸 뭐라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빠지는 오류는, 우선 '나에게 적용될 때'의 문제이다. 타인들에게는 잘 적용하던 객관적인 그 잣대를 나에게는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능력이 부족할 때와 내가 능력이 뛰어날 때는 위에서 말한 과도한 위축과 과도한 도취에 쉽게 빠지곤 한다. 즉 '내 능력의 유무와 내 가치의 유무'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 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 동일시는 '오류, 그 자체'이다. 또한 스스로 주의하지 않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에게도 같은 오류를 쉽게 범하게 된다. 즉 타인에게도 그 잣대를 들이대서 능력에 따라 비하하거나 환호하는 것이다. 대상만 나와 타인으로 다를 뿐 같은 오류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나든 타인이든, 사람의 능력과 그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더 선명히 인식해야 한다. 우린 이미 이걸 알고 있지만 자칫하면 둘을 동일시하고 그 부작용을 고통스럽게 겪기 때문에, 돌이켜지지 않게 확실히 인식해 두는 것이다. 억지로 그렇게 믿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당연한 것을 더욱 선명히 다지는 것이다.




혹자들은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능력과 사람의 가치를 완전히  분리시키면 여러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느냐고. 가령,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그런 동일시에서 스스로 위기감이나 필요성을 느끼고 그래서 더 노력해서 해당 능력을 키우거나 갖추는 것에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다고 말이다. 또 능력이 뛰어난 이도 과도하든 말든 사람들과 사회에서 환호와 대접을 받는 것은 필요한 게 아니냐고, 동기 부여 등도 된다고 반론할 수 있다.


아니다. 둘 다 필요 없다. (실용적인 용도에서 '자기 발전'이나 '자기 조절'에 쓰이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과도한 위축이든 과도한 도취이든 둘 다 필요 없다. 오히려 여러 부작용만 만들 뿐이다. 앞서도 분명히 말했다. 능력은 '기능'이다. 기능은 잘 발휘하면 될 일이다. 만약 부족하다면 더 갖추고, 만약 충분하다면 능력으로 그 결과를 잘 만들고,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으면 될 일이다. 그냥 하면 된다. 어느 경우든 하면 된다. 그런데 만약 '사람의 가치'와 동일시하게 되면, 같은 걸 하면서도 괜히 위축된 마음으로 혹은 괜히 들뜬 마음으로 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할 필요가 있는 일은 하면 된다. 능력은 발휘하면 된다. 그러면서 불필요한 위축이나 들뜸을 굳이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어차히 할 것을 하는 건 동일하므로 쓸데 없는 걸 더할 필요가 없다.


또 혹자들은 반문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그렇게 하려고 해도 사람들이, 세상이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능력이 없으면 어쨌든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을 받고,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손해를 본다고. 그것은 이렇게 해결이 가능하다.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 부분은, 어차피 그것은 나만 타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게 아니다. 즉 우리는 서로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타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럼 어쩔 수 없으므로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 아니다, 그 반대이다. 같은 입장이므로 사람들의 반응을 너무 과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좀 더 마음이 당당해지고 자유로워지고 여유로워지는 것이다. 가벼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바탕에서 이제 타인들의 생각과 태도가 아직 바뀌지 않더라도 나는 바뀌는 것이다. 점점 더 그렇게 할수록 나의 내외적 힘도 커져간다. 힘이 커져가면 이제 점점 타인들의 부정적 반응을 내가 통제하거나 넘겨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결국 '용기'의 문제이기도 하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그럴 충분한 용기가 있다.


사회적으로 보는 손해 부분은, 일단 만약 그런 조건이 존재한다면 인정하자. 다만 그게 끝은 아니다. 그 어디에 살든, 우리는 끊임없이 부당한 사회적 차별과 착취, 잘못된 제도와 관행 등을 함께 고쳐 나가야 한다. 우리 사회를 비롯한 여러 사회에는 아직도 능력의 차이에 따른 정당한 대가의 구분이 아니라 과도하고 부당한 차별과 착취가 존재한다. 만약 그것이 개인과 사회의 건강성을 해치는 정도가 심하다면, 그러면 당연히 공동체 전체의 건강을 위해 고칠 건 고쳐야 한다. 그게 우리보다 앞서 그런 길을 간 사회들이 한 일이다. 복지를 비롯한 여러 사회 안전망의 확충과 여러 양극화의 해소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온당한 배려 등이 그것이겠다. 복지만이 아니다. 부당한 차별과 착취가 없어진 사회일수록 더욱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산업 시스템, 경제 시스템을 발전시킬 여력이 있게 된다. 일종의 선순환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됨으로써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손해'라고 여겼던 부분도 상당 부분 해소하거나 수정할 수 있게 된다. 이게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겠다.




마지막으로 볼 것이 있다. 이것은 좀 더 근본적인 접근이다. 


도대체 그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가치'는 무엇인가. 


위에서는 사람의 능력과 가치는 동일시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능력의 유무와 별개로 가치는 훼손되거나 흔들리거나 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했다. 인간의 가치는, 그 어떤 조건이나 능력과도 상관없이 본래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접근으로 '능력에 의한 가치 결정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다.


하지만 잘 보자. 애초에 '인간의 가치'라고 할 때 그 '가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런 게 정말 존재하는가? 어떤 절대적인 무엇인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당연히 아니다. 


'가치'라는 건, 더더구나 '인간의 가치'라는 건 그냥 인간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자 설정일 뿐이다. 그런 게 어디 있나. 다만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오용될 때이다.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서 환상이거나 없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진 것이든 아니든 '효용성, 유용성'은 얼만든지 존재할 수 있다. 우리의 문제는, 그러한 효용성, 유용성이 없을 때에도, 심지어는 반대로 부정적 효과를 가질 때에도 그 개념과 설정을 절대시 하는 것에 있다. 그에 의존하고, 그를 고집하고, 그를 믿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바보짓이다.


'인간의 가치'라는 건 없다. '있다, 없다'에서의 없다가 아니라, 애초에 그것이 만들어진 것임을 눈치채야 한다는 말이다. '가치'라는 건, 다른 말로 하면 '유용성' 정도 되겠다. 혹은 위에서 썼던 '기능'이라는 말도 되겠다. 능력도 결국은 기능이다. 그냥 드라이한 기능에 불과한 것을, 우리는 능력이라고 1차 오염을 시키고 나아가 가치라고 2차 오염을 더 시킨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괴로워하고 상대도 괴롭히는 것이다.


눈치챈 이상 더 이상 그럴 필요 없다. 그럴 이유도 없다. 각자가 가진 능력을 기능으로서 잘 활용하자. 필요하면 더 키우고, 잘 한다면 누리자. 하지만 불필요하게 위축되거나 도취될 건 없다. 본래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 그런 것이면 그렇게 하면 마음도 편해지고 사람들도 이상하게 안 볼 것이다. 하지만 안 그렇지 않은가. 본래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든 많든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할 필요 없다. 누구라도 자신만의 능력 영역이 있다. 그것을 잘 찾고 잘 개발하는 게 필요할 뿐이다. 그 시기때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누구든 그의 능력과 상관없이 흔들리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넘어선 가치'를 지닌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본래의 상황이다.


그리고 나아가, 애초에 인간이 존재하는 데 '인간으로서의 가치'나 '존재 가치' 따위는 존재하지 않음을 눈치채자. 그런 게 '없다'가 아니라, 그런 게 '상관없다'는 것을 말이다. 필요하면 쓰겠지만 필요치 않으면 그냥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가 스스로 만든 개념이자 설정에 불과하기 때이다. '실체'가 없다. 도구이다. 도구는 도구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면 된다. 과도하게 대접해 줄 필요 전혀 없다.


누구든 능력과 상관없이 가치가 있다.

그리고, 누구든 가치와 상관없이 잘 존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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