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무엇인가?
아(我),
'나'라는 것.
유아(有我)도 아니지만
무아(無我)도 아니다.
'무아'라고 하는 순간
'무아'라는 새로운 '아'가
만들어지는 것 뿐이다.
유아도, 무아도 모두
‘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있음'도 아니지만
'내가 없음'도 아니다.
'아(我)'라는 것,
'나'라는 것 자체를 보아야 한다.
이것은 만들어진 설정에 불과하다.
주체 설정이라는 설정.
'있다, 없다'라는 것도
만들어진 설정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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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정확한 질문은
'나란 것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나란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이다.
'나'의 정체를 찾는 게 아니라
'나'라고 그 주체 설정 행위,
이 설정 행위 자체, 그 정체를
눈치채는 것이다.
'나, 있음' 등을
이미 존재하는 무엇으로
믿거나 전제하는
우리의 자동화된 착오를
알아채는 것이다.
그것이 '나'로부터,
'있음'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방법이다.
(주의: 누가 알아채는 게 아니다.
'내'가 알아채는 게 아니다.
그러한 '나'가 설정임을
눈치채는 것이다.
주체 따위가 없어도
알아챔은 있음을.
그것이 '내가 알아챔'이어도
그 결과가 다름을.
결과가 다르므로
그 또한 '앎'일지라도
상관없이 의의가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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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이것은
'유아/무아', '있음/없음'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앎에 적용된다.
예외가 없다.
누가 적용하지 않아도
눈치채지 못해도
본래, 항상, 이미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