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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Dec 16. 2018

'실체가 있다/없다' 모두 아니다. '절대시'가 문제다

모르고 행해지는 '앎의 절대시'가 독화살이다. 알고나면 다만 도구일 뿐.

'실체가 있다'도 아니지만 '실체가 없다'도 아니다. 혹은 '사실이 있다'도 아니지만 '사실이 없다'도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실체' 혹은 '사실'의 유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절대시(絕對視)' 자체를 돌이켜지지 않게 눈치채는 것이다. '있음', '없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행한다고 여기는 '나(주체)'도 마찬가지다.

'절대시'란, 글자 그대로 뭔가를 절대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절대시는 본래 인간이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를 잊어버리고 절대화한 절대시가 개인과 집단의 모든 고통과 충돌의 근본 원인이 된다. 이는 물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실체시, 실재시'가 문제가 아니라 '절대시'와 그 함정에 빠짐이 문제이다.

이 글을 통해 이러한 인간의 무의식적 '절대시'의 근본 원인과, 절대시가 어떤 문제를, 왜 야기하는지 밝힌다. 그리고 인류 전체가 빠져 있는 이 절대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안내한다.

(그리고 이 모든 말은, 아무 것도 말 하지 않은 것이다)


1. 인간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실체론자 혹은 실재론자이다.


'실체(實體)'라는 말이 있다. 철학적인 뜻은 다음과 같다. '언제나 있으며 없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변전(變轉)하는 것의 근저(根底)에서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본체(本體)라고도 한다. 생각하는 것,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나 보거나 만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한다(위키백과에서 가져옴). 이와 연관하여 '실체론(實體論)'도 있는데, 사전적 뜻은 '현상과 작용의 뒤에 실체가 있다는 이론'이다.


'실체'라는 말에 대해선 이렇듯 철학적인 뜻도 있지만 일상적인 뜻으로 이해해도 좋다. 즉 우리가 뭔가를 인지 및 인식하거나, 혹은 그에 대한 해석과 분석을 통해 개념을 붙이는 행위를 할 때, 우리가 붙이는 이름과 개념들과 상관없이 그 대상이 되는 '본래의 무엇'이 있다는 관점이다. 다른 말로는 '실제로 뭔가 있다. 사실이 있다'는 표현도 가능하다. 그 이름과 개념들은 모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설정'이지만, 그 설정이 붙게 되는 '본래의 무엇'이 당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위의 사전적 의미에서는, '표현은 가능하나 보거나 만질 수 없는 것'이라고 했지만 일상적 의미에서는 표현도 하면서 동시에 실제 보이고 만져지는 경우들도 '실체'라고 지칭한다 할 수 있다. 여기서 철학적, 사전적 뜻과 일상적 뜻이 상관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인간이 그것을 감각 및 인식할 수 있든 없든 두 경우 모두 '여하 간에 거기에 뭔가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는 믿음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있음'에 대한 믿음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의 대부분은 이러한 '실체론 혹은 실재론, 사실론'을 받아들이고 또 믿고 있다. 여기에 대해 "어, 그건 믿음이 아니라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분명 저기에 뭔가가 있고, 인간은 오감이든 오감을 보조하는 기구를 사용하든 그것을 실제로 감각하고 있다. 아무리 인간의 개념이 붙어 있다고 해도 그 개념이 붙는 '애초의 무엇'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 아닌가. 이것을, 이 생생한 '있음'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지? 이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라고 반응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 경우 대부분은 '이것이 사실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러한 것이 바로 '실체론 혹은 실재론'이다. 마치 물속의 고기가 자신이 물속에 있는지도 모른 채 있듯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모른 채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실체론, 실재론이 '절대 사실'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믿음 혹은 생각'일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인간으로서는 실체론 혹은 실재론의 절대성을 의심하기가 무척 힘들다. 너무나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 거의 모두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학습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내가 실체론 혹은 실재론을 믿고 있다. 사실이란 것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라고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인식도 없이 (그냥, 무조건, 처음부터) "어쨌든 저기에 뭔가(실체, 사실)가 있음은 결코 의심하거나 부정될 수 없다"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가 믿고 있는 실체론, 실재론을 대상화하기 힘든 또 하나의 이유는 '주체의 문제'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행위자, 존재자, 당사자 문제'이다. 즉, 우리가 실체론을 믿을 땐 그와 동시에 '뭔가 실체, 실재, 사실이 존재한다고 믿는 나(설정된 주체)'가 존재한다는 것도 믿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야 한다. 이 '나'라는 주체는, 한 치도 의심할 바 없이 존재한다고 모두가 느끼고(사실은 믿고) 있기 때문에 그냥 간과된다. 즉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 나는 실체다. 나의 존재는 사실이다'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행위자, 존재자, 당사자의 뜻을 지닌 '주체'라는 것, 그 '주체 설정'이 들어간 것일 뿐 이 역시 실체론에 기반한 믿음의 하나이다. 즉 '나, 내가 있음'과 실체론은 동일한 놈이다.


자기 자신을 대상화(객관화) 하는 것은 사실 쉬운 자각이 아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자의식'은 인간 모두가 하고 있다. 심지어 지능이 비교적 뛰어난 몇몇 동물들도 자기 인식은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러한 자기 인식이 아니다. 자기 인식을 하기 전에 먼저 만들어지는 '나, 주체, 존재자, 행위자, 당사자'라는 느낌과 앎을 말한다. 동물의 경우엔 이것이 비언어적 앎으로 존재할 것이고, 인간은 그 비언어적 앎에 언어적 정의가 더해져서 더 강해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주체 의식'은 오감에 바탕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대상으로 자각하기가 힘들기도 하다. 우리는 '느낌(오감)은 사실이다'는 믿음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언어적인 생각보다는 미세하지만 느낌도 하나의 만들어진 앎일 뿐이다.


우리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애초에 이러한 실체론, 실재론적 관점이 '하나의 관점'이란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 있기만 하기 때문에 '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내가 물속에 있다'는 것을 따로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물 밖'을 체험해 보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물과 물속을 인식하려면 물 아닌 것과 물 밖을 실제로 경험하고 알아야 가능하다. 실체와 실재라는 만들어진 앎을 '본래 있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고 따로 대상화시키지 못하는 인간 인식의 어떤 한계적 상황이 이와 비슷하다.


그 근본 이유는 애초에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인식의 모델'을 '실체가 있다. 실재가 있다. 사실이 있다'라는 실체론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인식의 관문이 실체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프로그램 코딩을 하는데 모든 코딩이 실체론이라는 기본 코드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어떤 복잡하고 거대한 프로그램이라도 모두 실체론의 바탕 위에서 만들어져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인식의 주체라 여기는 '나 자신'마저도 포함해서). 다른 비유로 하면, 색칠을 하는데 어떤 색을 칠해도 실체론이란 색이 들어가 버리는 것과도 같다.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사실 아무 문제가 없다. 아주 유용한 도구일 뿐이다. 문제는 그 '실체론이 들어간 프로그램'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는 것이다. 다른 프로그램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심지어 프로그램이 없어도 상관없음에도, 오직 한 가지 프로그램만 사용할 수 있다 여기고 절대화하는 것이다. 즉 '프로그램이 프로그램일 뿐임'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이 모든 것을 인식하는 '나'도 그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라는 인식은 전혀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다른 모든 만들어진 인식과 같은 'one of them'일뿐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 혹은 한계를 어떻게 깨뜨릴 수 있을까? 평생 물속에만 있어 자신이 물속에 있는지 모르는, 아니 자신을 둘러싼 '물'이란 것 자체를 모르는 이 상황에서 비로소 '물, 물속'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 말이다. 더구나 더 큰 문제는 물속의 물고기라면 물 밖을 체험시켜주면 되겠지만, 인간의 인식의 경우라면 물 밖 즉 '인간의 인식 밖'의 것을 체험시켜 주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실제로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실체, 실재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러한 믿음이 정말 문제이기만 할까? 아니다. 사실 이러한 인식 구조는 하나의 좋은 도구이다. 인식의 진화 과정에서 발생한 효과적인 기능인 셈이다. 실체와 실재 자체와 그 대상으로 삼은 것들은 인간에게 하나의 '기준점'들이 된다. 인간은, 그렇게 '그것이 실재한다'고 한 후에, 그 설정을 중심으로 그리고 그 대상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추가 활동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고 집중도 더 잘하게 된다. 문제는, 이것의 도구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이 생각 혹은 믿음을 '절대시'할 때 발생한다. 즉 '본래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본래 절대적이지 않은 것을 절대화하는 것', '본래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히 그에 수반되는 부작용을 일으킨다. 그 부작용이 바로 우리 인간이 가지는 고통, 혼돈, 충돌들이다. 절대시 자체가 그런 부작용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불필요하거나 쓸데없을 때 일으키는 절대시가 특히 그렇다. 여기서 잘 봐야 할 것은, 그 근본 원인이 실체시, 실재시가 아니라 '절대시'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까지 인간 철학사 상에서 '실체론, 실재론'과 그에 반대되는 여러 '론(관점론, 관념론, 유식론 등)'들 간의 논의에서 간과되어온 핵심 부분이다. 


다시 말한다.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 실재가 있느냐 없느냐'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 쪽을 말해도 본질적인 게 못 된다. 실체시와 실재시는 다만 유용성을 지닌 인식의 기능에 불과하다. 어느 쪽을 주장하고 선택하든 모두 동일한 함정(혹은 결론)에 빠진다. 그것이 바로 절대시이다.


절대시가 핵심이지만 동시에 실체시, 실재시의 문제도 존재한다.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함께 접근하고 풀어야 한다. 이 문제가 풀려야 비로소 개개 인간이, 인류 전체가 공통으로 빠져 있는 고통, 혼돈, 충돌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된다. 그렇지 않은 접근과 해결책은 모두 '상대적인 해결책'이다. 유의할 것은, 상대적이라고 아무 효용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상대적이지만 잘하는 만큼 효과를 발휘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그 해결의 범위는 상대적, 부분적, 제한적이 된다. 그 결과, 문제는 되풀이되며 고통과 혼돈과 충돌은 그 양태와 내용이 달라질 뿐 또다시 반복된다. 이것이 수많은 철학, 사상, 종교 등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아래에서 이 과정을 진행할 것이다.


(주의: 이 글 하나로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제대로' 된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다. 이 글을 보는 이 중에 그렇게 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해당 내용들을 듣거나 보아도, 기존에 알고 있던 혹은 기존에 믿고 있던 생각들이 먼저 작동하게 된다. 그래서 쉽게 인식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기존의 앎(믿음)'이 워낙 강하게 자리 잡고 있고, 앎은 단지 앎일 뿐인데 우리 인간은 그 앎과 자신(역시 앎이다)을 동일시하며, 앎을 지키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것이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이러한 글은 '씨앗'이 된다. 의식 속에, 마음속에 심어지는 '자각과 각성의 씨앗'이다. 이 씨앗이 제대로 심어지고, 토양이 좋아서 싹을 틔운다면 그러면 결국 열매까지 맺힐 수 있다. 그러므로 서두를 것 없다. 또 다른 씨앗, 다른 기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다만 어느 경우든 안내하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 제대로, 진실되게 탐구하면 되겠다. 그러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2. '실체, 실재가 있다. 사실이 있다'는 것은 홀로 설 수 없는 단정이다
: 실체론, 실재론, 사실주의 이전에 숨은 전제들이 있다.


앞서 우리 인간은 거의 모두 '무의식적 실체론자, 실재론자'라고 했다. 다만 그렇게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실체론자가 되려면 '뭔가가 실재한다. 그 사실은 명백하다'라고 해야 한다. 


문제는 이 '실체, 실제가 있다. 그 사실이 있다'는 단정이 홀로 설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이 주장은 스스로 확립될 수 없다. 즉, 우리는 '여하 간의 것이라도 실체, 실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라고 하지만 이 단정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전제들이 여럿 깔려야만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말이다.


어떤 전제들이 깔리는 걸까? 예와 함께 보자.


우리가 '뭔가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언급이나 단정이 될 수 없다. 인간이 가진 인식 중에 '있음'이라는 만들어진 인식이 가미되는 것이다. '있음(과 없음)'도 만들어진 인식이다. 그래서 절대적인 무엇이 될 수 없다. 언어적 영역은 물론 비언어적 영역에서의 앎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있음'의 설정성을 눈치채는 것은 쉽지 않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여길 뿐, '있음'이라는 것도 만들어진 인식임을 파악하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상의 탐구만 있으면 눈치챌 수 있음도 물론이다. 다만 그런 탐구의 기회가 없거나 안 하기에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또한 없음과 있음은 상대적인 의미로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결국 동시에 생겨나고 동시에 없어지는,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는 '쌍개념'이다. 없음은 '없음이 있음'이다. 즉 없음도 있음이다. 같은 것을 다르 게 표현할 것일 뿐, 둘은 상호 의존적이고 연결된 것이지 하나만 따로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전제되는 인식이 있다. 바로 '나' 즉 '주체'라는 인식이다. 말하자면 '행위의 주체, 존재의 주체, 감각의 주체'가 되겠다. 행위자, 존재자, 감각자이다. '나'가 먼저 있어야 비로소 '내가 실체가 있음을, 사실이 있음을 안다'가 성립된다. 즉 '사실이 있다'는 것은 혼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내가 인식하는) 사실이 있다'의 구조인 것이다.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주체가 없다면 무슨 실체며, 사실이 있겠는가.(그런데 '사실이 있음'이라는 것이 인간의 인식이듯 '나 혹은 주체가 있음'이라는 것도 인간의 인식이다.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그러한 개념을 만들어 세운 후에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란 말이다.)


즉 '저기에 뭔가가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 실체가 있다. 실재가 있다. 사실이 있다'는 것은, 그 문장 하나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무엇이 아니고, 이 문장 혼자 세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전에 '있음'과 '나, 주체'라는 만들어진 인식을 먼저 전제해야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의존적인 단정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사용되는 '실체, 실재, 사실'이라는 것도 본래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인식이다.




3. 불교 등에서 '실체가 없다'는 식의 표현을 강조하는 이유


이러한 부분을 깨치게 하기 위해 불교나 혹은 그 외 몇 영역에서 '실체가 없다'는 식의 말을 하곤 한다. '자성이 없다. 마야(환영)이다. 꿈이다' 등 다른 여러 표현들도 있지만, 결국 모두 우리가 평소에 '나와 타인 그리고 이 세상이 모든 것이 실재하는 것이고, 사실이고, 실체가 있는 것이다'라고 여기는 그 믿음과 반대되는 표현들임은 동일하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실체가 없다'는 표현의 원래 목적은 실제로 '실체가 없다'는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부분이다(실체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 인간이 워낙이 '실체가 있다'는 인식을, 그 인식을 하는지도 모른 채 절대적으로 믿고,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고도 있지만 동시에 수많은 고통과 충돌을 일으키니, 우선 그 믿음 자체를 '자극하기 위해, 스스로 돌아보게 하기 위해, 흔들기 위해, 대상화시키기 위해' 그 반대되는 개념인 '없다'를 의도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있음과 없음은 한 몸이라 했다)


이것은 마치 불교에서 '유아(내가 있음)'을 똑같이 흔들기 위해 '무아(내가 없음)'을 의도적으로 주장했던 것과 같다. 같은 목적과 용도인 것이다. 실제는 유아도, 무아도 아니다. 내가 있음도 아니지만, 내가 없음도 아니다. 둘 다 '나'라는 설정의 정체를 모른 채, '나'라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그렇다.


'나'도, 그리고 '있음, 없음'도 모두 만들어진 것이다. 유아든 무아든 둘 다 '나'라는 인식(개념, 설정, 앎, 분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실로 하고 있다.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이러한 '나라고 하는 인식을 사실시, 실체시' 하는 그 인식 행위 자체를 눈치채는 것이지, '나'라는 것이 먼저 전제되고 그 위에서 '나가 있다, 나가 없다'를 논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현황에 대한 자각의 진행은 그냥 시작되는 게 아니라 처음에 기존에 무비판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믿고 또 받아들이고 있던 '유아(나라는 것이 있다)'가 인간의 인식에서 대상화되어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자신이 속해 있는 그 '물'이라는 것을 대상화할 수 있어야 비로소 '물' 자체를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그 방편으로, 그 전에는 감히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무아'를 사용해서 일종의 눈치챔을 일으키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는 주장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다시 말하지만 '실체가 없다'를 주장하는 게 목적이 아니며, 결론도 아니다. 기존에 믿으면서도 믿는 줄 몰랐던 '실체가 있다'는 이 무의식적 믿음을 자각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아는 유아를 깨기 위해 사용하는 것일 뿐, 결국은 유아도 무아도 아니듯이,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했듯이, '실체, 있음, 없음' 등이 모두 만들어진 인간의 인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체가 있다'와 '실체가 없다' 어느 것을 주장하고 어느 것을 믿어도 발생하는 근본 문제가 있다. 이것을 눈치채는 것이 중요하다. 있다 해도, 없다 해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은 둘 다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근본 문제가 바로 '절대시'이다. 이 절대시가 왜 문제가 될까?




4. '실체가 있다, 실제가 없다'가 아니다. '절대시'가 문제이다.


여기서 사용한 '절대시'는 '우리가 무언가를 절대시 한다'라고 할 때의 그것이다. 뭔가를 절대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여지를 주지 못한다/않는다'이다. '않는다' 보다는 '못한다'가 더 적절한데, 그 이유는 스스로 절대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어쩔 도리 없이 그냥 그렇게 믿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 함정에 자기가 빠지는 것이다. 다른 놈이 범인이라 하며 찾고 있는데 사실은 자기가 범인인 셈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절대시'는 상대적인 게 아니라 근본적인 것이다. 가령 어떤 사안에 대한 해석이 A, B, C 세 가지가 있다고 하자. 누구는 A를 절대시 할 수 있고, 누구는 B나 C를 절대시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상대적 절대시이다. 인간이 일상과 삶의 많은 부분이 이러한 상대적 절대시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근본적 절대시는 무엇인가?


근본적 절대시는 인간이 자신의 '인식, 인지, 감각, 분별, 개념, 생각, 감정' 등을 절대시 하는 행위 그 자체를 말한다. 줄여서 '앎'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자신의 앎을 절대시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앎은 인간의 감각, 인지 영역 모두를 포함한다. 가령 위의 예에서는 A, B, C 어느 것을 선택하든 절대시 행위를 하는 것은 동일하게 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그냥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내 생각, 내 관점, 내 주장, 내 가치관, 내 입장, 내 편의, 내 신념 등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바로 그 행위이다. 그 현상이다. 이것을 나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두가 하고 있으므로 인간 공통의 행위라 할 수 있다.


내 생각 등에 내가 자신이 없거나 확신이 없을 때도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있다. 그래서 타인이나 사회의 생각 등을 따르는 경우 말이다. 자, 이 경우에도 그 '타인이나 사회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바로 나의 생각이다. 내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절대시 하는 행위는 동일한 것이다. 특정인의 특정 생각이 아니라 '생각 그 자체'임을 유념해야 한다.


'실체가 있다/없다, 실재가 있다/없다, 사실이 있다/없다' 등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실체, 실재, 사실 등은 모두 효용성이 있어서 만들어 쓰는 개념에 불과하다. 물론 각 개념에는 단지 하나의 개념으로서만이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여러 다른 개념들과 또 일어나는 현상들까지 포함된다. 뭔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는 실체시, 실재시, 사실시는 다만 유용한 도구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을, 그 도구성을 눈치채지 못하고 '실제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라고 여기는 절대시이다.


좀 더 일상적 표현으로 말하면 '나만 옳다. 나만 정의다. 나만 합리적이다. 나만 정상이다'는 느낌, 주장, 믿음이다. 물론 '나'만이 아니라 타인의 어떤 주장, 세상의 어떤 말에 대해서도 '그것이 절대적으로 맞다'는 식으로 여기는 경우가 다 해당된다. 다시 주의하라. 특정 생각과 주장, 앎 등에 대해서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생각이라는 것 자체, 앎이란 것 자체를 말한다.


이런 절대시는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가?


사실 실체시, 실재시, 사실시, 절대시 모두 무슨 악이거나 잘못이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모두 '도구'에 불과하다. 뭔가를 실체시 하면서 절대시 해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이것은 인류가 오래전에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 바로 그 목적이기도 하다. 동물들이 행하는 실체시와 인간의 그것은 같지만, 언어 덕분에 인간의 실체시는 좀 더 강화되고 복잡화되었다 할 수 있다.(언어를 쓰기 전에도, 언어와 상관 없이 비언어적 실체시가 존재함에 유의하라)


예를 들어 우리가 길에서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는데 앞에 큰 물체가 있다면 그것을 사실로 여기고, 절대로 여겨서 비켜 나감으로써 안전하게 된다. 상대방이 내가 하는 말에 불쾌해하는 게 보이면 그것을 사실로 여기고, 절대로 여겨서 내가 하는 말을 멈추거나 사과를 할 수 있다. 그래서 관계의 악화를 막는 것이다. 인간 문명의 모든 행위가 이 실체시, 실재시의 유용성 위에서 만들어진다.


언제가 문제인가? 바로 절대시가 필요 없을 때에도 그것을 적용하는 때이다. 그거 사실이고 절대적이라 믿는 것이 오히려 나나 상대방을 괴롭게 만들 때에도 기존의 관성을 이기지 못해 절대시 하면서 결국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가령, 상대방이 나에게 한 말이 나를 비판하려고 한 게 아닌데 나는 내 마음속의 모종의 원인 때문에 그것을 나에 대한 비판이라고 사실시 하고 절대시 할 때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서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서 상대방은 나에게 한 말이 아니라 자리에 없던 제삼자에게 한 말이거나 혹은 다른 뜻으로 나에게 한 말인데 내가 그것을 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한 것이 밝혀졌다 하자.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끝끝내 혼자서 내가 처음 느끼고 해석한 '나에 대한 비판'을 사실시 하고 절대시 하는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오히려 내가 괴롭게 되고 또 나의 오해로 상대도 힘들게 된다.


여기서는 간단한 예를 말했지만, 일상의 수많은 부정적 일이 이 구도에서 발생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개인과 집단의 모든 인간사가 이 '절대시'에 달려 있다. 특히 고통과 두려움, 불안, 슬픔, 충돌, 다툼 등의 상당 부분이 '불필요한 절대시, 부적절한 절대시'에 기인한다. 그렇지 않은가?


실체시, 실재시, 사실시가 도구이듯이 또한 절대시도 하나의 도구이도 하다. 문제는 '절대시의 도구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무조건 절대적이다. 본래 절대적이다'라고 믿는 그 무의식적 믿음에 있다. 물고기가 물이 물임을 모르고 물속에 있듯이, 절대시가 도구적으로 행해지는 절대시임을 모르고 행하고 있는 것이다.


(주: '절대시가 문제이다'는 주장이 그 자체를 절대시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맞는 지적이다. 그런데 다른 모든 앎의 절대시와 차이가 있다. 이것은 '절대시를 깨는 절대시'이다. '절대시가 문제다'라는 절대시를 사용하지만 동시에 그 자체도 그에 포함시키기에 그 마지막 절대시가 무너지는 것이다. 즉 다시금 앎의 윤회에 빠져드는 앎이 아니라, 앎과 그 윤회 자체를 해체시키는 앎인 것이다. '나'라는 앎, '나'라는 절대시를 포함하여. 그리고 '나' 이전의  마지막 '있음'이라는 앎과 그 절대시도 포함하여.)



5. 우리는 사실과 비사실의 선을 명확히 그을 수 없다.

실체, 실재, 사실을 절대시 할 때 발생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사실과 비사실을 구분하는 선을 선명하게 그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 아래에 있는 에셔(Maurice Cornelis Escher)의 그림 하나를 보자. 참고로, 에셔는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통찰과 연결시킬 수 있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던 작가이다. 그가 실제 어느 정도로 깊이 통찰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작품 자체는 아주 유용하게 여기에서의 설명에 사용될 수 있다.(그의 다른 작품들도 많으므로 찾아보기 바란다)



에셔의 작품은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이 모든 논의의 '전체 구도'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즉 특정 주장이나 특정 관점과 접근만이 아니라 그 모두를 포함하면서 그들이 전체 구도 속에서 어떤 위치와 어떤 의의를 지니는 지를 '한 번에,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과 비사실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는 말에 대해, "아니, 무슨 말인가? 그냥 일상에서 아니 지금 당장 우리는 얼마든지 사실과 사실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는데?"는 반문이 들 것이다. 이 글의 제목도 "'실체가 있다, 실체가 없다' 두 가지 모두 아니다"이다. 비슷한 논의로 '관점(관념)주의와 사실주의의 대립'도 있을 수 있다. 에셔의 그림 혹은 이와 같은 논의에서는 사실 그 무엇이든 '대립되는 두 가지'의 경우에 모두 적용될 수 있다. 선과 악, 사실과 환상, 관점과 사실, 있음과 없음 등 모두 가능하다.


여기서는 '실체가 있다/없다'를 글의 주된 소재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와 관련해서 '사실주의와 관점(관념)주의의 대립'을 이용해 보자.


본래 관점주의(觀點主義, perspectivism)는 니체(Nietzsche)가 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철학적 논의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므로 '관점주의'란 말을 어느 정도 일반화시켜 빌려온 것으로 보기 바란다. 또한 '사실주의'라는 말도 본래 쓰이는 용도가 있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일반적인 관점주의에 대응한 개념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기 바란다.


편의를 위해 여기서 관점주의와 사실주의에 대한 이 글에서의 정의를 간단히 내리고 시작하자면, 관점주의는 글자 그대로 '모든 게 관점이다'는 것이다. 좀 더 추가한다면 '어떤 절대 사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그것에 대한 인간의 관점이다'는 접근이겠다. 사실주의는, 그에 반해서 '명백한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좀 더 추가하자면 '인간의 어떤 관점, 해석, 인식이 있든 그와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무엇 즉 사실이 있다'는 접근이겠다.


인류사에서 인간이 갖추어 온 거대한 인식의 두 기둥이 사실 관점주의와 사실주의라 할 수도 있다. 즉,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앎, 모든 것이 인간의 인식이므로 결국 인간의 인식 그 자체가 핵심이다'는 것과, '아니다. 인간의 인식, 개념, 분별 등은 있지만 그와 상관없이 저기에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사실, 진리, 실제 등)은 명백히 존재한다'는 생각의 대립인 것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이 두 가지 관점을 항상 함께 쓰며 산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유용한 도구이다. 경우에 따라 관점주의를 주되게 적용할 때가 있고, 반대로 사실주의를 적용할 때가 있기도 하다. 


어떤 대립되는 두 가지 개념, 생각, 사상, 철학 등이 서로 싸울 때, 많은 경우 각 주장은 자기 논리대로 해서 끝까지 갈 수 있다. 끝까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서로 상대방이 빠져 있는 모순이나 한계 등도 얼마든지 찾아내고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모순점이 있으면 자기가 옳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논리나 근거로 상대측의 모순 등을 지적하며 스스로 쾌재를 부르지만, 그 자신 역시 그 논리와 근거 혹은 다른 논리와 근거에 의해 얼마든지 반박되고 논박되며 허점과 모순이 발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령, 아주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앞서 관점주의와 사실주의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 접근과 주장이 그렇다. 그러나 아래의 문장을 보면 결국 관점주의가 사실주의가 되고, 사실주의가 관점주의가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관점주의는, '특정 관점이 사실이다'는 것을 사실로 믿는 사실주의이다."

"사실주의는, '사실이라는 것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관점을 주되게 가지는 관점주의이다."


이 글은 관점주의 입장도 아니고 사실주의 입장도 아니다. 두 관점과 입장 모두 각자 주장을 끝까지 고집할 수 있다. 즉 어느 측이든 자기주장을 꺽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다. 양측 다 논리적으로 상대의 주장을 꺾거나 흔들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주장도 다른 논리에 의해 꺾여지거나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느 관점, 입장이 옳은 지 밝히는 그런 것이 아니다(어차피 애초에 끝이 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지를 근본적으로 통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행하고 있는 그러한 여하간의 관점, 입장을 주장(고집)하는 그 행위 자체에 대한 '통찰, 인식, 각성'이다. 그 행위 자체의 '문제 혹은 정체 혹은 구조'에 대한. 그리고 그 외 모든 것은 그 유용성에 따라 각자 자유롭게 하면 된다.


엄격히 말하면 '사실과 사실의 영역이 명백히 있다'도 오류가 있으며, '모든 것이 인간의 관점이다'도 오류가 있다.


'모든 것이 인간의 관점이다'는 관점주의는 다음과 같은 논리에 의해 무너진다. '모든 것이 인간의 관점에 불과하다'를 주장할 수 있으려면 '인간의 관점' 아닌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에 대비하여 '인간의 관점'인 부분을 분별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무엇을 본다 해도 그것은 결국 '인간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인간의 관점 아닌 관점'을 알 수 없다. 논리적으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다.

('사실주의'도 같은 논리에 무너지므로 둘은 같은 입장이 된다. 인간이 '사실'이 있음을 알려면 '사실 이외의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실 이외의 것'을 알 수 없다. 만약 사실 이외의 그 어떤 것을 안다고 할 때, 그 순간 그것은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사실 이외의 것'이 사실에 반대되는 환상, 상상, 가상 등이 아니란 것이다. 환상, 상상, 가상 등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역시 '사실'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둘은 동시에 생겨나고 동시에 사라지는 한 쌍이다. '사실 이외의 것'은 글자 그대로 인간이 만든 사실이라는 개념, 앎 범위 밖의 것이다. 인간은 '사실 이외의 것'을 알 수 없으므로 '사실'이란 것도 구별해서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 답이 있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인간의 관점'일뿐임을 돌이켜지지 않게 자각하는 것이다. 냉정하게.

이 자각이 왜 되어져야 하는가? 지금 거의 모든 인간은, 자신(들)이 가진 앎(관점, 개념)에 대해서 그것이 뭔가 '절대적인 무엇, 절대 사실'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믿음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사실 이 믿음 행위는 하나의 도구적 행위일 뿐이다), 이렇게 믿음으로서 스스로 만든 앎에 대해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데 어느 순간 그럴 필요가 없는 앎에 대해서조차도 절대화하고 사실시 하면서, 스스로 자기 앎에 갇히게 되는 게 문제다. 그 결과 불필요한 고통, 충돌을 겪게 되는 것이다.

논쟁은 논쟁대로, 논의는 논의대로 계속하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당면한 이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어떤 논쟁, 논의든 그것으로 인해 나올 수 있는 유용성이 있으므로 그것은 그것대로 챙기되(철학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학문에 그런 유용성 부분이 있다), 본래 아닌 것을 '절대시, 사실시'하게 되면서 스스로 빠지게 되는 자기 덫, 함정, 틀에서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을 각자 제시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엄중히 봐야 할 것은 그 방법이 '다만 상대적 개선'에 그칠 것인지,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인지이다. 당연히 근본적 해결이 되어야 한다.
(이 경우 이렇게 앞서의 주장 즉 '모든 것이 인간의 관점에 불과하다'에 대하여 똑같이 '그 주장 역시 인간의 관점일 뿐이지 않는가'라는 대응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역시 ''그 주장 역시 인간의 관점일뿐이다'도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로 대응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마치 자기가 자기 꼬리를 먹으며 들어가는 우로보로스처럼 된다. 계속 맴돌이다. 철학적, 논리적 논쟁 중에 이러한 부분이 자주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논쟁의 내용 이전에 이러한 현상 자체에 또 주목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느 관점이 옳으냐 아니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관점주의든 사실주의든 이러한 모순, 역설, 한계 등이 왜 생겨나느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순, 역설,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그것을 간과하고 계속 특정 주장, 관점, 입장을 주장하는 그 행위 자체, 그리고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불필요한 고통과 혼돈이다. 멈출 수 있음에도 계속 그걸 되풀이하고 있는 고집과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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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현상은 관점주의, 사실주의 논쟁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인간의 앎 중 많은 영역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사실은 인간의 앎 그 자체에 대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관점주의가 정답인지 사실주의가 정답인지가 아니다. 어느 경우든 끝까지 주장될 수 있고, 또 어느 경우든 반론될 수 있다. 앞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라고 했다. 왜 이런 일종의 모순 같은 일이, 왜 이렇게 뭔가가 끝에서 경계가 흐려지는 듯한 상황이 일어나는가?'이다.


여기서 에셔의 그림을 사용해 보자. 위 그림을 보며 상단의 좌우 끝에는 '선명한' 검은 새와 흰 새가 보인다. 그런데 새들의 그림 가운데로 가면 갈수록 점점 검은 새와 흰 새의 경계와 구분이 모호해진다. 더구나 경계만이 아니라 검은 새는 흰 새에 의해 그 모양이 만들어지고, 흰 새도 검은 새에 의해 모양이 만들어진다. 마치 위에서 '관점주의와 사실주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림과 글이 같은 양태를 보이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한 발 더 나아가, 그림의 아래쪽으로 가면 이제 새와 배경의 경계도 점점 모호해진다. 즉 두 새 간의 차이만이 아니라 새들과 그 배경의 경계도 역시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에서 '실체가 있다/없다' 모두 아니라고 한 것이다. '사실이 있다/없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가 있다/없다', '사실이 있다/없다'가 모두 맞기도 하다.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본래 전체 구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체의 양태가 본래 그런 것이다. 양쪽 끝의 새를 보면 검은 새와 흰 새는 너무나 선명하게 따로 '있다'. 실체이고 사실이다. 그러나 점점 가운데로 오면 둘이 서로를 형성하게 되면서 둘의 경계와 모습 자체가 모호해진다. 가운데에서는 새도, 실체도, 사실도 없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면 배경과도 그렇게 된다. 더 이상 배경(근원)과 현상(대상)의 구분이 없어진다.


핵심은, 이러한 '있음, 없음'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디를 주목하느냐, 어느 것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있는 경우, 없는 경우가 나뉘는 것뿐이다. 하지만 애초에 검은 새, 흰 새가 본래부터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 현상(대상)이 배경(근원)과 따로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즉 검은 새랄 것도 흰 새랄 것도 없다. 대상(현상)이랄 것도 배경이랄 것도 없다. 즉 '있다, 없다'로 절대적으로 확정 지을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림에서와 같이 필요에 따라 혹은 경우에 따라 '뭐가 있다 혹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모두를 포함한  그림 자체도 또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인간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이 구도 전체이다. 동시에 모든 경우가 존재하는 것, 그러면서 그 조차도 만들어진 것인. 그런데 인간 인식의 한계 혹은 오해, 착각, 고집, 집착 때문에 자기가 한번 흰 새를 주목하면 이제 '흰 새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가 되어 버린다. 즉 '절대화'인 것이다. 그리고 '검은 새는 틀렸다 혹은 없다'는 식으로 인식한다. 본래 존재하는 전체 구도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이 전체 구도 즉 전체 그림 또한 만들어진 것이다).


더 근본적인 착오, 오류는 이 모든 것이 '본래부터,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배경과 두 가지 새가 말이다. 각각이 선명한 부분도 있지만 그것이 '본래, 전부, 전체, 절대'가 아니다. 또 둘의 경계가 모호한, 둘의 존재 자체가 모호한 부분도 있지만 이 역시 '본래, 전부, 전체, 절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 있다'도 아니지만, 

동시에 '~가 없다'도 아니다. 

'~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도 아니며, 

'~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도 아니다. 


그럼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절대화의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그렇게 '절대적인 무엇'이 아닌 것 즉 '절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인식의 한 기능으로서 존재하는 '실체시, 실재시, 사실시' 그리고 '절대시'를 절대시 하는 것은, '본래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므로 반드시 부작용을 만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유용성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인식이 생겨난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부작용도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인류의 대부분은 이 유용성을 '실체성, 실재성, 사실성'과 연결시키는 오류, 절대화시키는 오류에 빠져 있으며, 그에 수반되어 생기는 부작용 즉 '절대시'를 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절대시를 함으로 생기는 자기 함정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하고 서로 괴롭히는 것이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강제로 하게 한 것도 아니다. 모두 자기가 자발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어쩔 수 없어'라고 느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셔의 그림을 바탕으로 설명한 이러한 구도 그 자체를 눈치채는 것으로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렇게 그림과 함께 설명을 듣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식이 완전히 바뀌고 우리의 근본적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는 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맞다. 그냥 되진 않는다. 그냥 이런 설명을 듣고 또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되진 않는다. 실제 자각과 각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단지 이론으로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자신이 이제까지 빠져있던 그 '근본적 무지, 착각, 오류, 오해'를 눈치채야 한다. 돌이켜지지 않게, 선명하게 눈치채야 한다. 마치 이제까지 '사실이란 것은 존재한다'를 의심할 여지도 없이, 대상화할 여지도 없이 믿어 왔듯이 말이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를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다시 새롭게 믿느냐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의 '본래 구도, 정체, 프로세스, 본질'을 돌이켜지지 않는 선명함으로 깨우치는 것을 말한다. 선명하게 그 순간이 와야 한다.


(이 글에서는 '논리, 논리학'적 요소를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논리와 논리학 등도 역시 인간 앎의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논리, 논리학 등은 유용하며 여러 모순이나 잘못을 잡아주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논리와 논리학이 앎 자체의 한계나 모순을 밝혀 주지는 못한다. 앎의 정체를 보게 하거나 앎을 넘어설 수 있게 하지 못한다. 근본적인 통찰을 주게 하지는 못한다. 논리 자체가 앎의 부분 요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히려 논리와 논리학 자체가 스스로 모순과 한계를 가짐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통해 그 모체가 되는 인간의 앎의 한계, 정체를 눈치채게 해 준다. 이 부분을 유념해야 한다.)




6. 석가모니 붓다의 '14 무기(十四無記 · Fourteen unanswerable questions)',
그리고 독화살의 비유


이 글에서는 불교와 상관없이 이 주제를 논의하고 있지만, 불교에서 이 주제에 대해 특화된 부분이 있으므로 그중에 한 내용을 보는 것은 유용하다.


불교의 석가모니 붓다가 설한 '14 무기'설과 독화살의 비유가 있다. 14 무기는, 간단히 말하면 붓다가 답변하기를 거부한 질문들이다. 답변을 거부한 이유는, 이 질문들이 열반 또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돕는 물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질문들은 '시간, 공간, 자아, 사후세계' 등에 대해서 우주가 시간과 공간적으로 유한한지 아닌지, 자아와 육체는 동일한지 아닌지, 여래가 육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하는지 아닌지 등이다.


여러 불교 경전에 이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중에 아함경을 보면, 붓다가 설하기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부처님이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따라 도를 배우지 않겠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도중에서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를 말하는 부분이 있다.


어떤 이가 독화살을 맞았는데 친족들이 독화살을 뽑고 치료를 하기 위해 의사를 부르려 하자, 의사를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는 화살을 누가 쏘았는지, 활이 무슨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화살 깃은 무슨 새의 털로 되었는지 등을 먼저 알아야 하겠다고 했다는 게 독화살의 비유이다.


'실체(실재, 사실)가 있다, 실체(실재, 사실)가 없다' 등을 논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붓다는 14 무기류에 해당되는 질문들에 답을 하지 않는 이유가, 이 질문들이 실제 인간의 생로병사와 슬픔 · 울음 · 근심 · 괴로움 · 번민 등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물론 상대적인 도움은 당연히 줄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한다)


왜 이런 질문과 그 탐구와 답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근본적 도움이 되지 못할까? 그 이유가 바로 필자는 여기에서 말하는 '절대시'이다. 절대시로 말미암아 인간의 근본 문제들이 생기는 것인데 이런 질문은 여전히 그 절대시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절대시 자체, 절대시의 문제 자체를 보게 하거나 자각하게 하거나 깨뜨리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도 말했지만 이런 14 무기류의 질문들은 해당 문장 그것으로 성립할 수 없다. 그 질문을 하기 위해 먼저 전제로 세워야 할 개념들이 필수로 존재해야 한다. 어떤 전제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답을 하든 '아니다'라고 답을 하든, 혹은 '실체가 있다'라고 답을 하든 '실체가 없다'라고 답을 하든 거기에는 항상 실체와 있음(없음), 그리고 그 답을 묻는 이와 답하는 이라는 주체의 설정을 절대화하는 과정이 먼저 있게 되어 있다. 즉 질문과 답문 자체에 이미 한계(전제, 설정, 분별)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불교에서 유명한 '토끼뿔이 있는가, 없는가?' 질문과도 상통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있다고 해도 없다고 해도 모두 답이 아니다. 애초에 그 묻는 토끼뿔이라는 것이 있고 없음을 논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무심결에 믿고 있는 '실체, 실재, 사실' 등은 마치 토끼뿔과 같은 것임을 눈치채는 게 필요하다. 이러한 것을 이론과 내용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돌이켜지지 않게 자각, 각성, 통찰'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기도 하다. 앎과 깨달음은 분명 다른 것이다. 앎은 꿈속에서 여전히 꿈을 꾸는 것이지만, 깨달음은 그 꿈 자체, 잠 자체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7. 유용하다고 '실체, 실재, 사실'인 것이 아니다.
유용하다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둘은 별개이다.
유용함은 유용함일 뿐 실재성, 절대성과는 아무 상관없다.
맞다고 해서 '실체, 실재, 사실'인 것이 아니다.
맞다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둘은 별개이다.
맞는 건 맞는 것일 뿐 실재성, 절대성과는 아무 상관없다.


이 단락에서 말하는 것은 현 인간 문명의 근본 문제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 문명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뭔가가 유용하면 그것이 실제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실체가 있고 사실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실체성과 실재성과 사실성을 부여하면 이제 그것은 절대적인 무엇이 된다. 그러나 유용한 것은 유용한 것일 뿐 실재성과 절대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둘을 연결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착각일 뿐이다.(현재로서는 인류 전체가 빠진 거대한 착각이다)


유용한 것만이 아니라 '맞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뭔가가 맞을 때 그것이 실체가 있고 사실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역시 절대적인 무엇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맞는 건 맞는 것일 뿐 실체성과 절대성과는 상관이 없다. 이 둘의 연결 역시 하나의 착각이다. 이 연결의 착각은, 일면 유용하게도 쓰이지만 결국 인간의 모든 고통과 혼돈과 충돌의 원인이 된다.


가령 숫자를 보자. 숫자는 무척 '유용'하다. 그리고 일정한 산술 법칙에 따라 계산을 하면 결과가 '맞게' 나온다. 숫자는 단지 숫자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 인간 문명이 실제로 돌아가는 바탕 도구로 사용되고도 있다. 일상에서 물건을 살 때 돈 계산에 사용되는 용도, 물건을 세는 용도로 쓰이며 나아가 온갖 복잡한 기계를 만들 때도 사용된다. 유용하고 또 맞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숫자가 실재하는 무엇이라 여긴다.


그러나 실은 숫자는 '만들어진 것'이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만들어진 것이지만 잘 사용하면 무척 유용하다. 여러 상황에도 맞고, 계산 등으로 맞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충분히 유용한 것이다. 실재하는 게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맞는 것이다. 숫자만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개념들은 무척 유용하고 또 맞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모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일부 개념은 사실이고 일부 개념은 만들어진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개념이 그렇다.('나'라는 개념마저도)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 자신의 개념, 생각, 앎을 가지고 살아간다. 유용하지 않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유용하고 또 맞기도 한다. 문제는 그렇게 유용하고 맞으므로 이제 우리의 인식 그 자체를 '뭔가 실재하는 것, 사실'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실재하고 사실이므로 절대시 하게 된다. 이 무의식적 기제를 눈치채야 한다. 관계없는 두 가지를 연결하는 자동적인 반응을 말이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 자신의 인식과 앎에 대한 이러한 사실시, 실체시와 절대시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진화의 과정 중에 생긴 하나의 유용한 기능이다. 대뇌의 발달과 언어의 사용으로 인간의 개념화 능력과 기억 능력은 눈부시게 발달했다. 연상 기능과 연결 기능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인식을 사실시 및 절대시 하게 되면 거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인가가 사실이다'라고 여기면 그것을 절대시 하게 되며, 그것이 자신에게 중요하거나 흥미로운 것이라면 아주아주 집중하게 된다. 더 오래 기억하게 되고, 더 깊게 파고들게 된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성취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체시와 절대시는 아주 유용한 기능이다. 현 문명도 이에 바탕해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실체시와 절대시가 무용하거나 오히려 고통과 부정적인 것을 만들어 낼 때 조차도 적용될 때이다. 즉 '무조건적'이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나쁘거나 부정적인 것을 먼저 신경 쓰고 집중하게 되는 것은 진화의 한 결과이다. 그래야 스스로를 좀 더 안전하게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인류가 가진 많은 걱정, 불안, 두려움 등은 실제 필요하거나 유용한 경우보다는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경우가 훨씬 많다. 실체시, 절대시가 하나의 무의식적 프로세스가 되어 버림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상태로 그 프로세스들을 밟게 되었다.


자, 같이 한번 보자. 우리는 뭔가가 실재하고 사실이어야만 가치와 의미가 있고, 기꺼이 집중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실은 뭔가가 실재한다고, 절대적이라고 여기지 않아도 얼마든지 집중할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다. 두 가지 요소가 연결되었다고 인식하기에 그렇게 여기게 되는 것뿐이다. 실체시와 절대시가 하나의 도구적 기능일 뿐임을 인식하는 바탕에서, 자신이 하고 싶거나 해야 할 일들에 얼마든지 몰입할 수 있다. 실체시와 절대시의 정체를 눈치챈 상태에서 말이다.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만 표면적 인식에서는 모두 '그것이 사실이므로' 그렇게 한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실체론, 실재론적 믿음과 상관없이 인간은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을 하고 있다. 실체론, 사실론을 믿기에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실체론과 사실론은 그냥 '추후에 붙여진 추가 해석'에 불과하다.


현 문명과 현 인류가 가진 혼란과 고통의 대부분은 이 '유용성, 맞음'과 '실체성, 절대성'의 연결 오류에 기인한다. 이제 이 두 요소가 별개의 것임을 돌이켜지지 않게 자각하게 된다면, 인류는 훨씬 더 자유롭게 될 수 있다. 더 이상 실체시와 절대시에 무조건 휘말려 들지 않게 된다. 자유롭게 된 마음은 여러 가능성을 더 볼 수 있게 되고, 더 많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실체시와 절대시는 우리가 뭔가에 우리의 의식을 고착시키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지만, 동시에 그 고착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을 바꾸어야 할 때 바꾸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우리는 그만큼 스스로를 좁은 틀에 가두게 되며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상상해 보라. 만약 나와 당신이 이 '유용성, 맞음'과 '실체시, 절대시'의 잘못된 자동 연상에서 자유롭게 된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인류가 점점 그렇게 된다면 그 바탕 위에서 만들어지는 문명은 어떤 문명이 될 것이지. 가장 강력한 창의성은 '기존의 것을 잘 활용하되, 기존의 그 어떤 것도 절대시 하지 않음'에서 나온다. 자유로움도 그러하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모든 앎은 나름의 유용성이 있다. 모든 학문이 그렇고 과학, 기술, 예술, 유희가 그렇다. 그러므로 최대한 잘 만들어 내고 잘 사용하면 된다. 그것들에 실체성, 절대성을 부여해도 좋다. 그러나 실체성과 절대성을 부여하면서도 그것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도 이용하는 것임을 자각하자. 실체시와 절대시의 도구성을 눈치채자. 알아채자, 통찰하자, 파악하자. 그래서 필요에 따라 쓰되, 필요하지 않을 때는 그냥 넘어서 버리자, 떠나보내 버리자, 무시해 버리자, 있어도 상관치 말아 버리자. 그만큼 우리 존재와 삶은 더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고 만족스러워질 것이다.


실체, 실재, 사실이 아니어도 우리는 충분히 우리의 앎을, 우리가 아는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고, 엄청나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집중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다!  




8. '있음'의 절대시 문제.
그에서 파생되는 '내가 있음'과 '(나의) 앎'의 절대시 문제.
마지막 이 '있음성'에 대한 의존과 절대시가 모든 것의 근원이자 시작이다.


왜 '있음'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가. 마지막 이 '있음성'에 대한 의존과 절대시가 모든 것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있음'에 대해선 어느 정도의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가 실체론이나 사실주의를 주장할 때 그 바탕이 되는 인식이 있다고 했다. 바로 '뭔가가 있다'는 인식이다. 인간이 붙여 놓은 해석이나 이름, 개념, 분별, 앎들을 다 떼어놓았을 때에 끝끝내 '거기 뭔가가 있다'라고 하는 그것이다. 즉 이 '있음'은 실체론, 실재론, 사실론의 최초 근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절대시의 근거도 된다.(그런데 '뭔가가 있다'는 실체론만이 아니라 관념론, 관점론, 유식론 등에서도 마지막에 모두 의존하는 대상임은 동일하다. 각각이 주장하는 그것이 끝끝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있음'은 모든 것이 다 떨어져 나간 순수의 있음이므로 인간이 스스로를 '나'라고 여기는 그 설정된 주체 즉 '주체 설정'마저도 떨어져 나간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나'는 없다. 즉 '내가 있음'이 아니라 '(그냥) 있음'이다.


이 최초의 혹은 마지막 '있음'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간 범위에서의 '있음'인지 아니면 다른 동물, 아메바, 식물, 광물, 분자, 원자, 전자 수준에서의 있음인지는 구분은 해야 할 것이다. 혹은 지구와 같은 행성, 태양과 같은 항성, 태양계와 은하계와 같은 수준에서의 있음과도 구분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논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범위에서의 '있음'만이 가능하므로 여기서도 그렇게 하기로 하자.

(다만, 이 부분은 확실히 하고 가야 한다. 우리가 인간 범위 밖의 인식 혹은 있음에 대해서 논한다고 할 때, 그것이 다른 동물, 아메바, 식물, 광물, 원자, 별, 은하계 등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경우 우리가 마치 실제 인간 범위가 아닌 다른 영역, 범위, 수준의 의식과 있음을 논한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가 아무리 인간 범위 밖의 것을 설정하고, 그것을 논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바로 '인간의 범위 안, 인간 의식의 배경 안에서의 인식'이 될 뿐이다. 즉 우리가 논하는 아메바의 의식과 있음, 전자의 의식과 있음, 태양의 의식과 있음 등은 그 자체들의 것이 아니라 모두 인간의 의식권 안에서의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결코 인간 범위 밖의 것을 알 수 없다. 논리적으로도 모순이고 실제로도 안 된다. 그것이 그 무엇이든 그것을 '아는 순간' 바로 인간 인식의 범위 안 즉 인간의 범위 안의 것이 될 뿐이다.)


이 '있음'을 의식적으로 체험해 보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일종의 '있음 명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강도와 순수성 등은 개인마다, 체험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때론 그 차이가 아주 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 안내하는 대로 하면서 자신의 느낌이 큰지, 작은지 혹은 강한지 약한지는 신경 쓰지 말라. 처음에 약하거나 희미해도 연습에 의해, 인식의 강화에 의해 얼마든지 그 체험과 느낌을 강하게 만들 수 있다. 처음엔 몰입이 잘 안 되더라도 상관하지 말라. 얼마든지 더 강화할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다음을 따라와 보라. 자세는 어떤 자세든 상관없다. 다음의 안내를 차분하게 따라 할 수 있는 경우면 다 좋다. 눈은 감을 수도 있고 뜰 수도 있다. 안내문을 볼 때는 뜨고, 실제 해 볼 때는 감을 수도 있다. 혹은 그냥 계속 눈을 뜬 채로 마음속으로, 의식 속에서 할 수도 있다. 다 좋다. 편한 대로 하면 된다.


[있음 명상]

- 자, 이제 고요히 않아서 자신이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을 지켜보라. 자신의 오감, 감정, 생각을 가만히 지켜보라. 자신의 몸과 행동도 느껴보라.

-  그리고 이제 자신에 대한 것이든, 타인과 대상에 대한 것이든 그리고 상황에 대한 것이든 그 어떤 생각, 감정, 감각이든 다 떼어내 보라. 얼핏 '떼어낸다'는 표현이 정확히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잘 모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평상시 의식 활동에 사용하던 모든 개념, 이름, 분별 등을 다 놓아 버린다는 말이다. 안 떠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떠올라도 상관치 않기'로 하라. 온갖 잡다한 오감, 감정,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그냥 다 무시하라. 떠오르든 말든 그냥 보내버리라.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라. 그렇게 해서 그 어떤 오감과 감정이 느껴지든, 그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그 어떤 행동을 하든 그냥 개의치 말아 버리라.

- 다시 강조한다. '안 느껴지거나, 안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건 기대하지 말라. 그렇게 될 필요 없다. 오히려 '떠올라도 개의치 않기, 상관치 않기, 그냥 흘려보내기'를 하는 것이다. 떠올라도 상관치 않으면, 떠올라도 괜찮다. '떠올라도 괜찮기',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명상 중에 하나이다. '고요히 만들어야만 한다'는 그런 명상이 아니다.

- 간단한 예를 하나 들겠다. 가령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땐 인간이라는 조건 외에도 여러 가지가 고려된다. 남자이거나 여자이고, 나이가 얼마고, 성정체성이 무엇이고, 직업은 무엇이고, 무엇을 잘하거나 못하고, 무엇을 성취했거나 못했고, 인종은 어떻고 등등이다. 사실 인종 차별, 남녀 차별, 나이 차별, 각종 소수자 차별 같은 것이 모두 이 조건들을 절대시 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 최종 조건만 고려하고 나머지는 모두 떼어내 버릴 수 있다. 즉 '나는 그냥 인간이다. 이것이 전부다'라고 하면서 그 외에 인종, 남녀, 성정체성, 나이, 직업, 지적 수준, 성취도 등등은 모두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그냥 순수한 인간'으로 자신을 느낄 수 있고, 고려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다. 타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인종차별, 남녀차별, 나이차별, 소수자 차별 등을 없애는 관점도 바로 이것이다. 그의 인종, 성별, 나이 등을 보긴 보지만, 그런 조건과는 별개로 그냥 그가 우리가 같은 '한 사람의 인간'임을 보는 것. 그러면 불필요하고 불합리한 차별과 혐오를 멈출 수 있다.
지금 '있음 명상'을 하고 있지만, 일종의 전단계 과정으로 '인간 명상'을 먼저 하는 셈이다. 그냥 나를 '한 명의 인간'으로만 보는 것이다. 다른 조건들은 다 떼어낸다.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는 이미 '그냥 인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른 조건들은 필요할 때만 붙여 쓰는 것이지 필수 조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바로 '떼어내기'라 할 수 있다.

- 자, 이렇게 '그냥 인간으로 있음'이 된다면 이제 다음 작업도 같다. 이제는 '인간'이라는 그 조건을 떼어내 버리는 것이다. 마치 앞서 다른 조건들을 떼내고 '순수한 인간'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라는 조건 그리고 그 외에 또 남아있는 모종의 어떤 조건(동물, 생명체 등등의)이든 다 떼어내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그냥 '내가 있음'이다. 아주 순수한 상태이다. 아주 순수한 있음이다.
이때의 '나'는 '나라는 존재자, 행위자, 당사자, 주체자'의 느낌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라. 이름도, 정체성도, 기억도 다 무시하라. 여전히 느껴지고 떠올라도 상관없다. 그냥 있어도 없는 듯 여겨버리면 된다. 이것이 이 명상법의 노하우다.
이 순수한 '내가 있음'에서의 '나'는 말하자면 '설정된 주체'이다. 본래 주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인간의 인식 기능 중 하나인 '개념 설정하기'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주체'라는 설정이다. 본래 존재는 주체 같은 게 없어도 현상으로 존재한다. '행위지, 당사자, 존재자'라는 뜻의 주체란 것은 존재 후에 붙여진 '사후 해석, 사후 이름'에 불과하다. 하지만 설정해서 만들면 존재하게 되는 것이므로, 그 만들어진 주체로서 '나'를 느끼며, 순수한 존재감, 자아감으로 고요하며 맑게 있는 것이 바로 '내가 있음'이다.

- 이제 마지막이다. 그 '내가 있음'에서 '나'를 걷어내어 버리라. 주체를 떼어내 버리라. 오해하지 말라. 우리는 결코 '나'라는 느낌, 의식을 지울 수 없다. 그런 건 기절했을 때, 잘 때, 죽었을 때 가능하다(혹은 깨어 있더라도 의식이 멍할 때는 사라진다). 의식의 초점이 맺힌 상태에서 지금과 같이 뭔가 의식적인 행위를 할 때는 필연적으로 '나'라는 주체감이 생긴다. 대뇌의 신경망에 그 주체감을 일으키는 회로가 있고, 그것이 활성화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필요하고 유용한 기능이다.
하지만 역시 '만들어진 것'이므로 얼마든지 '있지만 없는 듯' 할 수 있다. 억지로 지우거나 없애는 게 아니라, 그냥 '나라는 주체 설정의 현상의 본래 정체, 의미, 구조, 본질'을 알아채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지금 안내대로 따라 하면서 바로 선명하게 되지 않을 수 있고, 느낌도 약할 수 있다. 상관없다. 그냥 하면 된다. 일단 할 때 느껴지는 그 정도가 바로 지금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최상의 것이라고 여기면 된다. 지금 약하더라도 차후에 얼마든지 점점 더 강하게, 더 선명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최종적으론 이런 단계적 접근이 아니라 '돌이켜지지 않는 자각과 각성으로 나라는 것 그리고 인간의 앎이라는 그 현상의 정체, 본질을 눈치채는 순간'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전이라도 얼마든지 작업은 해 볼 수 있으므로 계속 따라오면 된다.)

- 자, 이렇게 '내가 있음'에서 '나'마저 떼어내 버리고, '나'라는 것이 느껴지든 말든, 그 존재감이 있든 말든, 그런 게 존재한다고 여전히 믿든 말든 상관치 않고 '있음'으로만 있는 것이 마지막 단계이다.
이 있음이, 인간의 범위, 인간 인식의 범위 안에서 가장 순수한 '있음'이다.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있음이다. 그 어떤 인간적 분별, 생각, 감각, 감정, 판단, 앎과도 상관없는 있음이다. 우리가 가장 편안히 쉴 수 있고 안식할 수 있는 자리이다.
이 편안함과 안식과, 모든 것을 넘어선 이 '있음'의 자리에서 충분히 취할 수 있는 만큼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이 '있음'과 '내가 있음'은 사실 항상 우리 의식 안에 있다. 특별한 상태에서만 나타나거나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어떤 의식 상태에 있든 항상 배경으로 존재하고 있다. 아니, 우리가 그 안에 항상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있음 명상'을, 그 항상 존재하는, 우리 의식 그 자체인 '있음'을 새삼 주목해 보는 시도라 말 해도 된다. 주목하지 않아도 늘 존재하지만, 무심함에 미처 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니, 의도적으로 환기하여 인식해 보는 작업. 그러므로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이 '있음'을 의식할 수 있고, 바쁘고 복잡한 일상사를 살면서도 '동시에' 이 '있음'에 의지할 수 있고, 안식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있음 명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느낌이나 선명도, 강도가 약하다 하더라도 점점 반복하고 그리고 제대로 된 안내를 따르게 되면 '있음 명상'도 점점 더 잘 될 수 있다. 제대로 되면 있음 명상은 마음의 안정과 편안함, 고요함, 여유로움 등을 느끼게 해 준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불안, 불만, 고민, 두려움, 슬픔, 허무, 무기력 등등이 생기는 원인이 바로 '나'라는 주체의 설정을 절대화함에 기인하고, 그리고 그 '나'의 앎을 절대화함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있음 명상에서는 그 모든 것을 '있어도 개의치 않음'으로 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수반된 부작용도 사라지는 것이다.


'있음'은 인간이 가지는 모든 인간적 번뇌의 근간이 된다. 다음의 3단계를 보자.


'있음' => '내가 있음' => '(나의, 인간의) 앎이 있음'


보통은 마지막 '앎이 있음'만을 보고, 거기서 앎의 문제와 인간의 문제를 파악하고자 하고 처리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해결책은 일부분 유용성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상대적이고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앎은 그 자체로 혼자 있는 게 아니고, 그 자체로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앎을 처리해도, 그 앎은 '나의 앎'과 '너의 앎'이 되는데, 나든 너이든 그 주체가 있다고 믿는 '내가 있음'과 그에 대한 절대화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즉 불씨가 살아 있으므로 아무리 밖의 불을 꺼도 불씨에서 계속 불이 피어 번지는 구조이다.


또한 '내가 있음'도 홀로 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확인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 앞에 '있음'이 있다. 이 '있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러면 '내가 있음'이 절대화되고, 결국 '(나의, 인간의) 앎'이 절대화된다.


즉 최초의 이 '있음'을 절대적인 무엇으로 잡는(의존하는) 것이 바로 소위 '실체론, 실재론, 사실주의'의 정체이다. 끝끝내 '뭔가가 실제로 있다'라고 믿고 싶고, 그것으로 안심하고 싶어 하는 마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앎도 결국 그 본래 정체는 이 '있음에 대한 절대시'이다.


그래서 '있음'마저도 결국 넘어서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원인이니까.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다. 있음을 넘어서라는 말은 '있음이 없다. 환상이다. 무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있음이 있다, 없다' 모두 아니다. 그게 아니라 이 '있음' 마저도 절대적인 무엇이 아님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 자각과 통찰은, 이러한 내용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다고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실체 깨쳐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눈치채고 알아채야 한다. 자각, 각성해야 한다. 하지만 당장 돌이켜지지 않는 선명한 자각으로 오지 않더라도, 의식적으로 이러한 구조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의식에 '씨앗'이 되어, 차후에 일어날 근본적인 자각의 출발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있음을 넘어선다'라고 하는 것은 '있음이 없다'는 식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남는 일종의 마지막 인식 혹은 느낌(느낌도 앎이다)일 이 '있음'이라는 것마저도 결국 그 정체가 무엇인지 그것을 눈치챈다는 말이다. 


'있음'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무엇' 같은 게 아니라는 것, 그래서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엇이 아니라는 것, 그냥 최초의 설정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되면, 이제 그에 기반해서 생기는 '내가 있음'도 그리고 그에 기반해서 생기는 '나의 앎'도 모두 같게 취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은 이 세 가지가 모두 같은 놈이다. 그 복잡성만 차이가 있을 뿐.




9. 과학은 왜 힘이 있나?
절대시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넘어선 '과학'
과학과 영성은 둘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과학 그 자체가 아니라 오늘날의 과학이 있게 한 그 과학 정신.
이것은 과학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앎에 적용.


과학이 힘을 가지는 이유는 '기존의 앎'을 절대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과학만이 힘이 있고 과학만이 옳고 절대적이란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과학 역시 인간의 여러 앎 중에 하나의 영역일 뿐이며, 완전한 것이 아니라 여러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근대와 현대 과학은 과학 시대 이전의 치명적인 한계를 깨뜨린 공적이 있다. 바로 '기존의 앎을 절대시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과학도 인간의 앎이므로,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오류와 한계 역시 여전히 가지고 있다. 여전히 '절대적인 사실, 있음이 존재한다'는 근본 믿음이 있으며, 새로운 사실이나 원칙이 발견되어도 기존의 과학계에서 믿고 있던 것이 여전히 고집되거나 그에 집착하고, 또 새로운 발견 자체가 아니라 인간적인 명성이나 세력 간 싸움, 과학계 내 정치적 영향도 존재한다. 또 한 시대의 과학은 다음 시대에 과학이 아니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이전의 종교나 기타 인간의 앎의 시스템이 가졌던 '기존의 앎의 절대화'에서 상당히 자유롭다. 이것을 '과학 정신'이라 할 수도 있다. 제목에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과학 자체의 힘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과학이 있을 수 있게 '과학 정신'이 핵심이라 하겠다. 즉 과학 외의 인간의 앎의 영역인 사상, 정치, 경제, 종교, 철학 등의 모든 곳에서 이러한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의식적 통찰과 깨달음 탐구에서도 핵심인 부분이 바로 이 '앎을 절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앎을 절대화하지 않는 것 자체가 깨달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아닌 것을 쳐내는 작업'이 필수이다. 결론적으론 '모든 앎의 절대시, 앎 자체의 절대시를 쳐내는 것'이기도 하다.


깨달음 탐구와 의식적 통찰을 도와주는 여러 도구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 현대의 뇌과학과 현대 물리학이 탁월하다. 과거에는 과거대로의 도구가 있었고 현대의 도구가 그런 것이다. 뇌과학에서 발견하고 보여주는 여러 현상과 원리, 현대 물리학이 보여주는 발견과 이론이 인간의 앎의 절대시를 흔들고 깨뜨려 주는 것이 많다.


'앎'은 인간이 품고 넘어서야 할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제하거나 무시할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아주 효율적이고 유용한 도구이며, 그 도구성을 제대로 파악해서 적절하게 잘 쓰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앎의 종이 되지 않고 앎의 주인이 되는 것. 하지만 결국엔 넘어서야 하는 것.


인간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앎 자체'이기도 하지만 앎을 절대시 하는 개인적, 집단적 고집과 집착이 근본 원인이다. 그런데 과학적 방법은,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한 개인이나 집단의 기존 앎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면 여지없이 기존의 앎을 버린다. 절대시 하지 않는 것이다. 일종의 집단적 앎의 조정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어느 시대 이후부터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을 표준으로 삼게 된 것은 인류 집단의식적 성장, 성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앎의 절대시에서 자유롭게 되면 될수록' 바람직하게 되기 때문이다.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 한 개인이나 집단이 독자적으로, 검증 없이 주장하는 내용은 맞는 경우도 있겠지만 틀리거나 치우친 경우가 훨씬 많다. 만약 '아닌 것을 쳐내는'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그 잘못된 주장이 계속 전해지고 퍼지고 영향을 미친다. 결국 당사자와 타인들 모두 부작용을 겪게 된다.


보통 과학과 종교, 과학과 영성 등은 서로 반대되거나 충돌되는 영역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어느 영역이든 '아닌 것을 쳐내는 접근, 기존의 앎을 절대시 하지 않는 관점과 방법론'을 취하면 될 뿐이다. 현대에서 인간에 대한 통찰, 인간 의식에 대한 통찰에 오히려 뇌과학, 현대 물리학 등의 과학이 더 유용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어떤 앎이든, 어떤 학문이든, 철학이든, 종교든, 신비주의든 '앎의 절대시'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 자신에게 좋다.



왜 붓다는 마지막에 자신이 아무 말도 설하지(말하지) 않았다고 했는가.
- 실은 그냥 '쌩까면' 된다.


실은 그냥 쌩까면 된다. 문제는 그게 안 되는 것이고, 그게 안 되는 원인을 모르는 것이다. 


그 원인은 스스로 만든 그 믿음, 스스로 빠져든 그 함정에 계속 (잡혀 있는 줄 모르고) 잡혀 있기 때문이다. 고집하고, 의존하고,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지도 원인이다.


붓다만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이 글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말은, 결국 말 그 자체를 넘어설 수 있게 안내해 줌에 의의가 있을 뿐이다. 일단 넘어서면, 그 다음엔 아무 말도 필요 없다. 필요 없지만 쓸 수 있는 것에 가장 잘 쓴다. 그것이 말(분별, 언어, 개념, 생각)의 효능이기 때문이다.


넘어섬 즉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하면 그냥 '쌩까기'이다. 고상한 어떤 의미가 전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그냥 쌩까기 그것이다.


차이는 무엇인가? 일반적인 쌩까기는, 부분적으로만 적용된다. 그리고 나(주체)와 있음이 쌩까기가 안 되는 한정된 것이다.


이 모든 말과 상관 없이 만약 누군가가 정말 '모든 것'을 쌩깔 수 있다면, 그러면 끝난 것이다. 정말이다. '모든 것'이라 했지만 내용(콘텐츠)으로서 모든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앎 그 자체에 대한 쌩까기이다. 즉 절대시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내용을 알게 되면서 정말 모든 것을 쌩까겠다고 마음 먹고, 실제 그렇게 한다고 해도 뭔가 끝나지 않음을 스스로 느낄 것이다. 왜 그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혹은 의식 속에, 혹은  뇌 신경망 속에 여전히 '나의 앎, 혹은 사실이 있다는 믿음, 혹은 느낌이 사실이다'는 연결성을 쌩깔 수 없는 원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앎에 대한 모든 상대적 믿음'이 그것이며, 끝끝내 남아있어 감히 쌩깔 수 없는 마지막 것이 바로 '나라는 설정된 주체'와 '사실이 있다'는 믿음이다.


이 모든 것을 드러내어, 의식화 해서, 대상화 해서. 객관화 해서 자각(통찰, 파악, 눈치, 각성)하지 못한 한은 아무리 뭔갈 하려고 해도 완전히 끝내지 못한다. 이 작업을 부분적으로 하면 상대적 쌩까기만 되는 것이고(이 역시 유용하지만), 결국은 전체를 대상으로 되어 완전히 끝내야 한다. 의자에서 내려와야지여전히 의자 위에 앉아서 위치만 바꾼다고  일이 아니란 말이다.


수 많은 부분적 쌩까기가 완전히 끝날 수 없는 것은, 불씨가 계속 남아 타고 있는 한은, 공급되는 연료에 계속 불이 붙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이치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는 한은, 열린 문틈으로 계속 들어오는 바람이 멈추지 않는 이치와 같다. 지구의 중력 한계선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이상은, 어느 지점에 있어도 결국 다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이치와 같다.(주: 불이 전혀 타지 않아야만 하고, 바람이 불지 않아야만 하고, 중력의 힘이 전혀 없어야만 한다는 말이 아니다. 불, 바람, 중력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쓸 수 있는 한 잘 쓰되 그것을 불필요하게 절대화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있으되 없는 것과 같음, 없으되 있는 것과 같음'으로.)


'그냥 쌩까기'가 되는 이유는, 애초에 거기에 쌩깔 것이 없음을 알아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냥 쌩까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믿고 있고 잡혀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하다.


여하튼, 여기저기의 모든 말은 '그냥 쌩까기'가 되지 않기에 그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 그냥 쌩까기가 되지 않게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잡혀있는 가상의 근거(들)'을 눈치채게 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냥 할 수 있으면 그냥 하면 된다. 그냥 안 되면 안 되게 만드는 그 원인을 찾아 해체 시키면 된다. 이렇게 단순하다.


이것이 붓다가 그리고 모든 선각자들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그 이유이다.



                                                                        - 끝 -





아래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필자가 쓴 책 <무루의 깨달음>, 그리고 무루의 깨달음 공부 모임 공지, <무루의 깨달음> 영문판 출간 프로젝트에 대한 공지 링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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