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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F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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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를 읽고

유치함의 일본맛

포켓몬은 진화하는가? 놀랍게도 게임 내에서 일어나는 포켓몬 진화는 찰스 다윈이 말한 그 ‘진화’가 아니다. 다윈 진화는 자식에게 변이가 전해져야 하는데, 포켓못은 그냥 같은 개체가 변하는 것 뿐이다. 포켓몬 진화를 굳이 생물학적 용어로 치환하자면 ‘변태’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곤충이 애벌레에서 성충으로 성장하는 그거 말이다.


그러나 포켓몬 세계관 내에서 이걸 ‘진화’로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내가 뭐 그쪽 세계관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SF도 아닌 판타지 세계에서 그런 게 뭔 상관이겠는가? 다만 사람들이 포켓몬과 현실의 개념들을 혼동하기 시작하면 좀 골때리는 경우가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 진화론에 반대한다고 아이들이 『포켓몬 Go』를 금지한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 (사실 이 기사 또한 그 진위가 의심되긴 하다만)

제노사이드 — 다카노 가즈아키

다카노 가즈아키의 SF소설 『제노사이드』에도 이런 진화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 발판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서 하등생물에서 고등생물로 진화하는 것이 필연적이라거나, (그러니까, 하등생물과 고등생물은 어떻게 구별하는 건지?) 종 구성원끼리는 서로 지키기 위해 이타적인 행동을 하기 때문에 신인류 둘이서 필연적으로 인류를 말살할 것이라거나. (여기에서는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종선택설이냐 개체선택설이냐 하는 오랜 논쟁이 포함된다.)여기에 일본문화 특유의 중2병 테이스트까지 더해지면 오글거림의 극의에 이른다.


“나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싫다네.”(그렇다. 인간을 싫어하는 것은 중2병의 기본 소양이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 같은 종끼리 제노사이드를 행하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네. 이것이 사람이라는 생물의 정의야. 인간성이란 잔학성이란 말일세.”


어? 분명 본문에서도, 침팬지가 어린 침팬지들을 제노사이드 하는 장면이 나왔었는데?

나도 유년 시절 일본 만화의 문화적 자양분을 받아 성장한 사람으로서, 일본식 중2병 유치함이 나쁘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 옛날 『기생수』나 『몬스터』도 사실 이런 유치뽕짝한 중2병 테이스트 범벅이었으니까. ‘포켓몬’의 진화에 대한 오용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진화 이론의 틀린 점을 굳이 수정하려고 노력하고 싶지도 않다. 작품은 그냥 작품이니까. 하지만 중2병이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다.


“역사학만은 배우지 말게. 지배욕에 사로잡힌 멍청한 인간이 저지른 살육을 영웅담으로 바꿔서 미화하니까 말이야.”


이런 관점은, 중2병 가득한 이과 중학생의 읖조림 같다. 오히려 역사학을 배워야 그런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재미 측면에서도 깔 수 있을 것이다. 하드 SF 스럽게 많은 생물학 이론과 제약 이론을 가져다 썼으므로 지향이 하드 SF를 향한다는 건 알겠는데, 결론이 진화에 대한 틀린 정의에 중2병 감성이라면 하드SF의 본질적 재미는 신기루가 되어 사라진다. 그러니까, 좋은 하드SF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 진화 이론으로 ‘신인류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억지로) 설명해 내는 게 아니라, 어떻게 진화의 예외 상황으로 신인류가 진화할 수 있는지를 과학이론스러운 느낌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결말도 좀 아쉽다. 나는 좀 더 파괴적인 걸 기대했는데 말이다.(신인류가 인류들을 전부 말살한다거나, 신인류가 도움을 준 인간 몇 명만 남겨 노예화한다거나, 신인류가 인류에게 기프트 알약을 전부 먹여 신인류만 태어나게 한다거나…)


그래서 평가는? 내가 일본 만화 보면서 컸다는 걸 앞에서 언급했었지? 재미 측면에서는 좋은 점도 많았다. 아까 말한 신인류의 진화에 대한 SF적 설정이야 뭐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이고, 제약의 원리를 공들여 설명하면서도 서스펜스를 놓치지 않았던 것도 흥미로웠다. 인물들의 정체에 대한 반전도 세심하게 떡밥을 잘 회수하며 마무리지었다.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맛보는 유치함의 일본맛. 일본인만이 구현할 수 있는 감성일 것이다. 오랜 만에 기생수나 정주행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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