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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7』을 읽고

죽는 임무를 위해 살아가는 복제인간의 ㅈ같은 기분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 다음 영화로 『미키17』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기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인 『미키7』을 읽어 보았다. 아시다시피,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영화의 배경인 동시대 한국에 내가 살고 있다는 우연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대단한 불멸의 걸작 영화다. 봉준호 감독의 위상 또한 『기생충』 이전에 비해 엄청나게 올라갔다. 물론 『기생충』 이전에도 봉준호 감독은 ‘대단한’ 감독으로서 이름나 있는 상태이긴 했다. 그의 영화 중 『살인의 추억』은 한국 영화의 역사에 남을 영화이자, 또 세계적으로도 인디 영화 중 명작으로 인정될 만큼 훌륭한 영화였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투자받고 촬영한 SF 영화,『설국열차』나 『옥자』는 뭐, 다들 훌륭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게까지 훌륭하다고 할 만한 영화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의견이 갈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미키17』 또한, 그렇게 될 확률이 있을 지도 모른다. 봉준호 감독이 정말로 현 시대의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감독이라 할지라도, 그의 다음 작품이 『기생충』 만큼 혹은 그 이상 위대한 영화가 될 확률은 크지 않다.(봉감독이 위대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고, 확률 계산상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기생충』은 정말로 위대한 걸작이고 이 이상 혹은 동등한 걸작은 나오기가 정말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제적으로 투자받고 영어를 주 언어로 하는 봉준호의 SF 영화가 두 번이나 미묘한 평가를 받았던 만큼, 같은 조건으로 만들어지는 이번 영화도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떨칠 수 없다. 게다가 미묘하게도, 소설 내에선 『설국열차』와 『옥자』가 떠오르는 몇 가지 소재와 장치들이 눈에 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미키7』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사이클러 페이스트라는 걸쭉한 액체를 즐겨 마시는데, 이것은 폐기될 유기체를 무차별적으로 섞어서 (채소 껍질, 손톱, 각질, 머리카락, 배설물, 특히 시체) 재조합해서 영양분 역할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마치 『설국열차』 열차 내에서 서식하는 벌레들을 섞어서 만든 ‘단백질 블록’을 떠올리게 한다. 『미키7』의 주요 배경인 폐쇄적인 돔은 안에서 극도의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데,『설국열차』의 열차도 그런 면에서 작품 내에 동일한 역할을 하는 배경이다. 다음으로, 약간 억지일 수는 있지만 『미키7』의 복제인간 미키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복제되는 동물 ‘옥자’를 떠올리게 한다.


Mickey7 - Edward Ashton

작품의 주요 소재는 복제인간과 자아정체성이다. 기억까지 모조리 복제된 나의 복제본은 나인가? 나는 연속적이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우리의 철학적 관념을 골치아프게 자극하는 오래된 SF적인 문제 말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크게 새롭지 않은데, 『스타 트렉』의 순간 이동 기기에서 인간이 복제될 때 발생하는 부수적인 문제, 제임스 패트릭 켈리의 1994년 단편 「공룡처럼 생각하라」나 국내작가 존 프럼의  「영원의 모양으로 찻잔을 돌리면 (테세우스의 배)」에서 등장하는 순간이동 기기에서 실수로 복제 후 삭제되지 않은 인간을 처리하는 문제, 크리스토퍼 놀란의 『프레스티지』에서 복제 마술로 무한정 복제되는 마법사 이야기, 영화 『더 문』에서 복제되는 클론 등등 SF의 역사에선 셀 수 없이 많이 다뤄져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미키7』은 이것들에 비해 무엇이 새로운가?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장치들을 통해 딴 얘기 안하고 복제인간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문제에만 오롯이 집중하는 전략을 취한다.


주인공이 “위험한 임무를 도맡아 사고로 죽으면 복제되기 위한 자리”에 지원한, 즉 “죽음 임무”를 맡은 우주선원이다. 즉, 순간 이동 장치의 부수적인 문제로 발생하는 문제에서 벗어나 복제 그 자체의 문제만을 다룬다.

죽음 임무를 맡은 선원은 우주선 내 단 한 명뿐이다. 그래서 주인공만 죽음이 발생할 확률이 높은 임무를 맡는다. 애초에, 주인공이 그 우주선에 탑승한 이유가 바로 ‘죽음 임무’에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위의 아무도 그 죽음 임무의 실존적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너는 다시 되살아나잖아~”하는 짜증나는 인간들만 한가득이다.

여러 가지 장치들을 통해 ‘동시에 두 명’이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구조를 설정해 놓았다. 예를 들어, 예전에 어떤 놈이 자기 자신을 수없이 복제해서 행성을 지배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우주선 사람들은 동시에 두 명의 죽음 임무 선원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우주선은 단백질 같은 유기물 재료가 만성 부족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건이 시작된다. 우연히 잘못된 사고에 의해 주인공이 죽었다고 알려지고, 그에 따른 프로토콜이 진행되어 한 명의 클론이 만들어져 버린다. 주인공이 공포에 떠는 지점은, 만약 그들이 두 명이라는 사실이 사회적으로 알려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옛날 꺼 폐기해~”라며 별 일 아닌 것처럼 일을 처리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이런 장치들로 작가는 작품에서 복제인간이 느끼는 자아정체성의 ㅈ같은 기분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해 놓았다. 물론 여기에 엄청 깊고 골아픈 철학적인 고뇌 같은 건 없다. 이 무거운 소재를 작품 내에서 의외로 경쾌하고 알기 쉽게 진행시키는 힘은, 바로 이 주인공의 ㅈ같은 기분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한 솜씨다.


이 장점은 동전의 양면이다. 작품의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시키기 위해, 복제인간의 기분을 완전히 ㅈ같게 만들기 위해 주변 인물들이 다 이 철학적 문제를 이해 못하는 머저리들이 되었다. 이게 약간 이해가 안되는데, 모든 등장인물들이, ‘테세우스의 배’ 같은 복잡시러운 얘기는 찰떡같이 알아들으면서 매번 죽을 때마다 실존적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심정을 깊이 공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같으면 주인공 같은 애가 친구라면 (죽으면 되살아나긴 하는데, 그 특수 능력 때문에 회사 상사가 다른 사람들 다 놔두고 일부러 친구한테만 죽는 임무를 시킴) 진짜 ㅈ같을 것 같은 심정이 이해되고 같이 소주 한잔 하면서 슬퍼해 줄 것 같다. 그런데 단 한 사람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의 애인마저 그렇다.


사실 이런 특수한 복제인간의 기분을 작품 내에서 조립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이 좀 작위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주인공이 역사가를 직업처럼 얘기하긴 하는데 태도나 말투나 뭐나 절대로 역사가 같지도 않다. 주인공이 역사가라고 설정된 이유는, 그냥 그가 심심할 때마다 옛날 책을 들여다보며 작중 세계관을 ‘설명’해 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세계관에 대한 얘기는 이야기 진행에 있어서 없어도 거의 상관 없다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 이 부분이 전부 빠질 것이라고 예상해 본다.)


단적인 예로 복제인간이 두 명이면 안되는 이유에 대해 무슨 예전에 복제인간을 무한정 생산해 독재 전쟁을 일으킨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사실상 이 이유보다는 ‘단백질 재료 부족’이라는 이유가 작중 인물들에게 더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인간의 구성성분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 빼고, 칼슘 같은 무기질도 빼고, 얼마되지 않은 단백질과 지방 같은 유기물을 스스로 합성하지 못한다는 점이 좀 의아하다. 아니, 바이오 3D 프린팅에, 시냅스 배선을 실시간 저장하고 그걸 붙여넣기할 수 있고, 똥과 시체를 화학적으로 반죽해 먹을 수 있게까지 하는 기술력까지 보유했으면서 단백질 같은 게 부족하다고 맨날 밥을 애껴먹고, 복제인간 한 카피가 더 나왔다고 단백질 도둑으로 몬다고?


(아래는 이 작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말도 시시했다. 모든 결말이 작위적으로 해피 엔딩을 위해 조립된다. 주인공은 갑자기 외계인과 말을 통하고, 우주선에서 ‘외계인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상사는 주인공을 죽일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다른 사람이 외계인과 소통하는 법을 왜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 당연히 작품 내에 이유 있다. 하지만...그것조차 결말을 위한 편리한 설정이다.) 행성을 날려 버릴 수 있는 위험한 반물질 폭탄을 상사 몰래 숨겨놓는 장면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애인에게 “상사가 죽을 때까지 숨겨놓지 뭐~”라며 ‘거창’하고 ‘똑똑’한 작전을 알려 준다. 여기서 곧바로 애인이 만약에 상사가 생각보다 오래 살게 될 때의 대책을 묻자 주인공이 하는 말은 “헤헤 몰라~”이다. 이게 결말이다. (진짜다.) 두 명의 복제인간 중 주인공이 아닌 쪽, ‘미키8’은 편리한 해피 엔딩을 위해 사고로 죽어 버린다. 아니, 진지하게 주인공이 두 명으로 살아가면서 발행하는 철학적인 자아정체성 문제를 영구히 고민하거나, 두 명의 동일한 내가 같은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 발생하는 인간 실존의 문제 같은 거 영원히 고민하면서 고통받도록 열린 결말로 안 만들고 아무 일도 없었던 예전의 삶으로 주인공을 돌려보내냐고! 왜냐고? 작가는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해피 엔딩을 만들고 싶었던 거지. 상사가 오래 살았을 때에 대해 아무 생각 없었던 주인공마냥.


아무래도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 『미키17』은, 대대적인 각색이 없는 한은, 그의 여느 국제적으로 투자받은 SF영화들처럼, 그저 그런 영화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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