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SF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만 좋아하는, 기상천외한 생김새를 가진 SF 보석

스타니스와프 렘의 『사이버리아드』를 읽고

좋아하는 SF 작가가 누구에요?
네! 스타니스와프 렘이랑...
스타니...네?
스타니스와프 렘... 공산 시절 동구권 폴란드 작가...
아 그렇구나...
테드 창이요.
아 테드 창! 저도 알아요!


나는 지금까지 여러 번 스타니스와프 렘 빠심을 표출한 적 있다. 그런데 실은 나를 이 고독한 세계로 빠뜨린 주범은 렘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솔라리스』가 아니다. 아주 오래 전 한국에서 만들어졌던 장르문학 잡지 『판타스틱Fantastique』에 소개된 「첫 번째 외출 혹은 가르강티우스의 덫」을 읽었을 때, 그리고 그보다도 전에 『이런, 이게 바로 나야』라는 인지과학 이론서에 실린 「아서 도브의 “논 세르위암”」이라는 작품을 읽었을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그 후로 오멜라스 출판사라는 곳에서 『솔라리스』 외의 스타니스와프 렘 작품들이 하나둘씩 번역되기 시작했고, 나는 드디어 『사이버리아드』라는 책의 전체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 인생은 그로 인해 ‘약간’ 변화되었는데, 무덤에 들고 들어갈 책의 종류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한 권에서 『사이버리아드』까지 포함한 두 권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절판된 오멜라스판 『사이버리아드』가 중고 되팔렘들에 의해 중고 시장에서 육만 원까지 팔리던 참혹한 꼴을 보다가, 이번에 속 시원하게도 알마에서 같은 번역자의 번역으로 개정판이 나와서 그런 꼴을 보지 않게 되었다. 나야 두 권 다 소장중이지만. 내 바램으로 부디 더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접했으면 하지만, 또 다른 심정으로 어차피 널리 읽혀져 봤자 지루하다느니, 이해 안간다느니 좋은 소리 안 나오는 거 차라리 나한테한 소중한 나만의 보석으로 간직해야 하나 싶다.


Cyberiada - Stanisław Lem (알마판, 오멜라스판)

최근 한국 출판계의 여러 출판사에서 스타니스와프 렘이 우후죽순 번역 출판되고 있는 건 2021년, “Lem2021” 렘의 탄생 100주년 기념의 일환인 듯하다. 『사이버리아드』 외에도 『스타니스와프 렘 - 미래학 학회 외』(현대문학),  『솔라리스』, 『우주 순양함 무적호』,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여기까지 민음사), 로봇 동화』(알마)까지 사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젠 우리나라도 ‘렘 선진국’이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만 유일하게 『우주여행사 피륵스』는 오멜라스판 이후로 재판되지 않아 접할 방법이 없다. 언젠가 누가 재판해 주겠지 뭐. 


이 작품 제목의 유래는 ‘사이버’+‘일리아드’의 합성어로 렘 본인이 직접 만든 단어라고 한다. 책 뒷표지에 ‘사이버 시대의 일리아드’라는 소개가 달려 있는데, 사실 여기서의 ‘사이버’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이버가 아니라 ‘사이버네틱스’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그 시대엔, 우리가 생각하던 인공지능이란 ‘사이버네틱스’ 분야의 관심사였으니까. 그러니까 이 작품은 ‘메타버스’니 사이버 월드니 하는 디지털적인 분위기보다는 훨씬 고전적인, 왕국을 지배하는 고철 인공지능 로봇 제왕이 자신의 관절에 기름을 칠하며 기계에 대한 시를 읊는 분위기에 더 가깝다.


이 작품의 장르를 굳이 찝자면 '코미디 SF'라 할 만하다. 계보를 따지자는 건 아니지만, 코믹SF라는 장르의 연대기를 추적하면 이 『사이버리아드』 후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와 애니메이션 드라마 『퓨처라마』, 그리고 최근의 애니메이션 『릭 앤 모티』에 다다른다. 모두 내 인생작들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으로, 인간성과 절대적 진리에 대한 풍자, 해학, 아이러니를 바탕으로 코미디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이 바로 나를, 혹은 우리를 SF의 본질적 재미로 이끈다.


모든 작품을 언급하고 싶지만, 분량 관계로 진짜 핵심적인 작품들만.




트루를의 기계

두 주인공 콤비, 트루를과 클라파우치우시는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로봇을 제작하는 로봇 장인이다. 그런데 그들이 만든 한 로봇이 (인간처럼) “2+2=7”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주인공 콤비는 이 한없이 인간적인 주장을 ‘로봇스럽게’ 바로잡으려 한다. ‘로봇이 인간을 만든다’는 이 아이러니에 대한 주제는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다.


트루를과 클라파우치우시, 그리고 생각 기계. Midjourney가 그림


세계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주인공 중 한 명인 클라파우치우시는 N으로 시작하는 모든 것을 만드는 게 가능한 기계를 만든다. 또다른 주인공인 트루를은 클라파우치우시를 놀리고자 그 기계에게 무(Nothing)을 만들라고 지시한다. 고전적이기까지 한 ‘거짓말쟁이의 역설’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주체가 또 로봇이라는 점이 포인트이다. 왜냐하면 괴델의 정리에 의해 (혹은 튜링의 증명에 의해) 완전한 수학 체계를 탑재한 로봇은 그 체계 내에서 거짓말쟁이 역설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봇이 진정 (거짓말쟁이 역설에 대해 적절한 대응이 가능한) 인간성을 소유하려면, 완전성을 가진 수학 체계의 레이어에 적절히 순서가 없으면서 또 자기 자신을 포함한 레이어를 꼬아 놓아야 한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면,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를 읽어 보시길.)


이 작품의 상황은, 로봇이 로봇을 만들었고 또 그 만들어진 로봇이 오히려 거짓말쟁이 역설에 더 뛰어난 형태로 대응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또다시 인간성과 ‘로봇성’의 역전이다.) 주인공들은 세계가 점차 사라져가는 상황에 우왕좌왕하며 로봇의 작동을 멈춰 달라고 빌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로봇이 삭제한 것들의 언어유희적 리스트는 작품의 또다른 감상 포인트이다.

미누, 밤머미줄, 무사우, 부사우, 비질개, 허길, 허비잘, 곤심, 타갈뱀, 슈뻥, 타타품, 이거뜰, 쇗불, 냥자, 포각... (번역자 칭찬 좀 부탁합니다)


이 단어들이 지칭하는 무엇인가가 실제로 작가가 창조해낸 무의미의 단어일 수도 있으나, 약간의 상상력만 더하면 그 단어들이 지칭하는 것들이나 의미들이 실제로 “우리의 우주에서도 사라진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래서, 우리의 세계는 (이 작품의 제목 대로) 이러한 형태로 살아남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첫 번째 외출 혹은 가르강티우스의 덫

이 작품은 예전 한국에서 만들어졌던 장르문학 잡지 『판타스틱Fantastique』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을 합쳐 버려 전쟁을 형이상학적으로 해결한다는 기가 막힌 결말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있어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이다. 내 졸작인 「책이 된 남자」의 결말과 아직 공개되지 않은 단편들인 「왼손의 유령」, 「중력 로봇 하이드리엄」(가제)의 결말 또한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고, 전쟁에서 병력이 피아일체의 경지에 이른다는 설정은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룬다는 나의 또 다른 졸작, 「두 서울 전쟁」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아직도 구상중이고 언제 나올 지는 명확히 알지 못하겠지만 아예 이 작품을 오마주하는, 「평행우주의 전쟁 컨설턴트」(가제)라는 작품도 구상하고 있다.


첫 번째 외출(A) 혹은 트루를의 전자 시인

챗GPT의 시대까지 이르러 애초에 ‘문학 작품을 짓는 AI' 혹은 ’예술을 하는 AI'는 전혀 놀라운 상상력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새삼스레 지금 다시 읽어도 놀라운 작품인데, 왜냐하면 이 작품의 진정한 미친 작품성은 로봇이 짓는 시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기 지능 이상의 세계관을 구축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소설에서 천재가 등장하면, 작품 내 천재의 작품은 절대로 작가의 역량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 작가는 불행하게도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작품을 통해 증명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스타니스와프 렘은 충분히 증명하였다. 자신이 천재일 뿐더러, 작품 내에서 ‘천재 로봇’을 그릴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스타니스와프 렘은 작품 내 어떤 로봇보다도 더 혹은 동등하게 천재이며 실질적으로는 현실의 챗GPT보다도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ChatGPT에게 트루를의 시를 지어 보라고 시켜 보았다. 구리다.


여섯 번째 외출 혹은 트루를과 클라파우치우시가 해적 퍼그를 이기기 위해 제2종 악마를 창조한 이야기

주인공이 박사 학위를 가진 해적을 만나는데, 그 해적은 모든 지식을 빼앗아 소유하길 원한다. 주인공은 그에게 ‘제 2종 악마’라는 것을 만들어 준다. ‘제 2종’이라니 제 1종 악마도 있는지 궁금하겠는데, 작품 내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제 1종 악마’도 있으나, 그건 그리 재미있는 놈은 아니라는 설명을 한다. (그런데 그 설명을 들어보니 그건 실제 사람 맥스웰이 언급한 ‘맥스웰의 악마’라고 하는 가상의 존재다.)


그렇게 해서 박사 해적은 원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는데, 그 정보라는 게 이런 것이다.

할레바도니아의 꿈틀이들이 얼마나 정확히 꿈틀거렸는지, (...), ‘촘촘한 멍청이’라는 새의 배설강의 직경은 얼마인지, (...), 불규칙 20면체의 밑각을 얻는 방법, (...) , 마리노티카에서 7만 년간 발행된 우표의 권수, (...), 왜 파리지엔의 ‘파리’나 모기지론의 ‘모기’는 날지 않는지, (...)

그 ‘악마’라는 것은 모든 정보를 종이에 다 써서 해적에게 전달해 주었고, 그래서 해적은 무한히 생성되는 종이의 무더기에 파묻혀 버렸다는 결말.


현대 인공지능학에서 꽤 심각하게 다루어지는 ‘상식(common sense) 추론’의 문제와 다를 바 없다. 우리와 인공지능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는, (적어도, 챗GPT 이전에 논의되던 결정적이었던 차이는) 상식적인 추론을 인공지능에게 가능하게 하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이다. “모든 물체는 질량이 있다”는 명제엔 자연스럽게 “질량이 없는 물체가 최소한 하나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는 명제가 참으로 증명되고, 우리는 이 명제를 종이에 써서 학습해야 할 필요 없이 논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안다. “물컵에 물을 부으면 물은 무슨 모양이 될까?” 라는 질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물이 물컵의 모양이 된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이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챗GPT는 이제 어느 정도 가능할 지도 모른다.) 딥러닝 이전 인공지능학에서는 그 추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몰라서 모든 명시적이지 않은, 상식으로 추론되는 명제들을 데이터로 코딩해야 하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위의 제2종 악마가 만든 수많은 잡설들은, 지식이란 즉 모든 상식의 모든 가능한 경우의 수에 대해 다 종이에 적어놓아야 하는 거대한 지식체계의 나무다. 해적이 종이의 무더기에 파묻혀 버린다는 비극적이고 아이러니한 결말은 과거 인공지능학의 비극적인 삽질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


일곱 번째 외출 혹은 트루를의 완벽함이 소용없었던 이야기

주인공 트루를은 왕국을 잃은 어떤 왕을 위해 잘 작동하는 소형 왕국을 만들어 선물한다. 클라파우치우시는 그 왕국의 인간들도 고통받는다고 말하며 트루를의 사악한 행위에 비판을 가한다. 그러나 트루를은 단지 시뮬레이션인 그 소형 왕국의 ‘고통’ 또한 시뮬레이션일 뿐이라며 반문한다. 하지만 아뿔싸, 트루를의 장인 정신은 그 시뮬레이션을 ‘실제와 완전 똑같게’ 작동하는 방식으로 설계했고, 거기서 시뮬레이션된 고통은 실제 고통과 동일한 기능을 가진다. 그로 인해 트루를은 깊이 후회하고 그 세계를 없애버리려 하지만...


시뮬레이션의 윤리성에 대한 문제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죽이거나 없애는 걸 금지하는 윤리적 강령에 그렇게나 신경쓰면서 시뮬레이션이나 계층 세계를 통째로 없애버리는 것에는 그렇게 거리낌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시뮬레이션 내부의 고통은 단지 시뮬레이트된 가상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 타이쿤의 손님들이 내지르는 그 고통의 메시지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그들을 거리낌없이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열차에 탑승해 폭파시키는데, 우리네 학부모님들의 심각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게 ‘의외로 정상’인 이유는 그게 우리의 인성을 폭력적으로 만들지는 몰라도, 그들의 죽음의 고통이 실제이기 때문은 아니다.


다 정상이다.


그러나 고통의 시뮬레이션이 점점 현실을 닮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윤리성은 분명 혼돈이 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소중히 느껴야 하는 지점은 대체 언제부터일까? 만약 그 날이 오게 된다면, 우리는 대체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우린 어느새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다. 혹시, 이 세계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이유는 누군가가 이 세계의 고통을 단지 ‘시뮬레이션된 감각’으로 치부하기 때문 아닐까?


게니우스 왕의 기계 세 대 이야기

책에서 가장 긴 작품인데, 단일한 얘기로 구성된 작품은 아니고 꽤 많은 얘기들이 액자형 구성으로 중첩되어 있다. 이 액자는 혼란스럽게도 두 단계나 세 단계까지 깊숙히 들어가기도 한다. 렘에 애정을 느낀 독자들이라도 여기까지 온다면 심히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 또한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분석을 위해 이 액자 구성의 구조를 한 번 그려 보았다.


「게니우스 왕의 이야기 기계 세 대 이야기」의 액자 구조


가장 기괴한 부분은 ‘두 번째 기계’ 이야기 내의 ‘트루를의 세 번째 이야기’다. 서브틸리온이라는 이야기 내의 작자는 여러 개의 시뮬레이션을 왕에게 권하는 신하다. 그 시뮬레이션 이야기들이 자그마치 일곱 개나 되는데, 진짜 골때리는 점은 마지막 일곱 번째 시뮬레이션은 자기복제를 하는 시뮬레이션, 즉 이야기가 무한히 반복되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작가가 노린 구조라고밖에 생각이 안 든다.




이 책이 스타니스와프 렘의 다른 작품들보다 유독 돋보이는 지점이 있다. 인간성의 아이러니에 대한 변칙적 접근,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보게 만드는 기괴한 사고실험들, 특별하고 괴상한 액자 구조들. 정말로 이 탁월한 SF를 이 세상에서 나만 오롯이 좋아한다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외로운 렘 우주에서 서로의 거리가 너무 멀 뿐이겠지. 스타니스와프 렘의 한국어 번역 책들이 풍성하게 차려진 2023년, 나는 또다시 이 책을 세 번째 들여다보았다. 변함없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지 않냐고? 그다지...나만 즐기기에도 바쁘다. 죽기 전에 열 번은 읽고, 언젠가는 스스로 사이버리아드 풍의 소설을 써 보리라.



스타니스와프 렘 컬렉션

1. 『스타니스와프 렘 - 미래학 학회 외』

2. 『솔라리스』

3.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4. 『사이버리아드』(현재 글)

5. 『로봇 동화』


매거진의 이전글 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7』을 읽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