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스와프 렘의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를 읽고
스타니스와프 렘의 좆문가인 내가 볼 때 그의 글은 세 가지의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그 문체는 적막하고 건조한데 주제의식은 불가해한 우주나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다루는 글들. 『솔라리스』가 대표적이지만 책 『스타니스와프 렘 - 미래학 학회 외』에 실린 「가면」같은 단편도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두 번째, 그 문체의 건조함은 덜하지만 현실적인 우주 모험에 대한 구체적인 사건사고를 다루는『우주 순양함 무적호』, 『우주비행사 피륵스』 같은 작품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스타니스와프 렘의 정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우주선과 외계인, 로봇의 난장 파티, 그 와중에 철학적 풍자와 아이러니함, 거기에 블랙 조크를 더하는 작품. 그 대표작으로 나의 최애 작품 『사이버리아드』가 있지만, 오늘 얘기할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도 이 분류로 묶일 수 있을 것이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는 '이욘 티히'라는 (이국적인 동유럽풍 이름을 가진 남자가) 로켓 여행을 하며 벌이는 좌충우돌 신나는 우주 모험 여행 단편 옴니버스다. 제목들은 "N번째 여행" 혹은 "이욘 티히의 회상 N" 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숫자가 작품 내에 중요한 건 아니고, 그냥 순서 없이 읽어도 전혀 문제 없다. (이런 점에서, 작품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부제를 붙여 주는 게 좀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좀 있다.) 안타깝게도 이 한국어판 책 한 권으로는 이욘 티히의 정수를 다 누리지 못하는데, 이 책을 읽고 이욘 티히의 모든 것을 읽어볼 의무감을 느꼈다면 앞서 언급했던 『스타니스와프 렘 - 미래학 학회 외』까지 읽어 봐야 한다. 이욘 티히가 등장하는 최고 명작인 「스물한 번째 여행」 포함 세 편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 책에 이욘 티히의 모든 작품이 실리지 않게 된 건 계약 관련 뭔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짐작할 뿐이다. 작품 외적인 이야기를 더 하자면, 스타니스와프 렘은 이 '이욘 티히'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시리즈를 1954년부터 1971년까지 지속적으로 썼는데, "한 로켓 여행가가 다른 행성으로 가서 특이한 외계인의 인류학적 일지를 기록한다"는 포맷 자체가 무한히 확장 가능한 형식이라 가능했었던 것 같다.
내용에 대해 말해 볼까? 이욘 티히는 로켓 조종사이고 업무 때문에, 아니면 그냥 여행으로 우주를 여기저기 쏘다닌다. 그런 식으로 기록한 일지가 바로 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N번째 여행"이다. 거기서 로봇 행성에 가기도 하고, 시간을 빠르거나 느리게 흐르게 하는 발명품과 함께 외계 행성에 착륙해 외계인들이 문명을 가지도록 하기도 한다. 때로는 중력 이상으로 시간선이 꼬여 미래와 과거의 이욘 티히가 한 자리에 만나기도 한다. 어떤 비좁은 행성에서는 주민들은 지루하거나 잘 때가 되면 원자를 모두 복제하고 자신을 가루로 만든 후, 나중에 필요할 때 원자의 배열을 복원한다. 우주공간에서 어떤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해하니 이욘 티히는 그 정체에 대해 조사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 괴물은 진화한 감자였다.
「이욘 티히의 회상 N」이라는 제목의 단편들은, 이욘 티히가 지구에서 어떤 특이한 과학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이야기다. 세계의 시뮬레이션이 돌아가는 상자들을 만들어서 신이 되고 싶어하는 과학자, 상자 안에 감각이 차단된, 영혼을 담았다고 주장하는 과학자, 복제한 자신을 표본으로 만든 과학자, 자극-반응 이상의 무엇인가가 스스로 발생하는 형태의 생명체를 만든 과학자 등등. 그 기괴하고 정신나간 가상의 실험들에서, 인간성에 대한 한계를 사고실험해 보는 SF 본연의 감성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스타니스와프 렘에게 기대하고 있는 감성의 원형을 담고 있어서 나에겐 더욱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들이었다.
뭐 이런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에서 분명 낄낄대면서 즐겁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뭐 어쩌라고?"하며 턱 괴고 지루하게 한두 페이지 넘기다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예상한다. 뭐, 좋다. 그럴 수도 있지. 스타니스와프 렘은 그래서 더욱 남들에게 추천하고 싶지 않은 나만의 소중한 SF작가다. 내가 읽으면서 생각났던 작품은 미국 애니메이션 『퓨처라마』인데, 그 작품도 로켓 여행을 하며 우주 곳곳의 기괴한 행성들을 돌아다니는 코믹물이다. 이욘 티히의 여행기 중 대다수가 『퓨처라마』의 한 에피소드로 제작되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분위기를 풍긴다. 『퓨처라마』는 끝났지만, 이젠 뒤이어 그 정신을 이어받은 『릭 앤 모티』가 미국 SF 애니메이션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릭 앤 모티』는 『퓨처라마』에 비해서는 약간 냉소적인 분위기가 있다.) 미국에서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만개하고 있는 로켓 여행물의 원형이 동구권의 SF였다니, 놀랍고 기분 좋은 발견이다. 『퓨처라마』가 직접적으로 스타니스와프 렘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이런 형식에서 느낄 수 있는 SF만의 독창적 재미라는 게 시대를 뛰어넘어 반복해서 재현된다는 것은 신기하고도 반가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라는 책을 읽었다. 한국 SF작가들이 쓴 앤솔로지 책인데, 그 중 두 번째로 실린 곽유진 작가의 「테레비 부처님」이라는 작품이 있다. 시대 배경은 갓 TV가 보급되기 시작한 한국인데, 거기서 TV 제품을 광고하는 커머셜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다가올 미래를 주도하는 건, 공상과학 테레비!
SF는 Science Fiction이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공상(Fantasy)과학소설'이라는 잘못된 번역 단어를 사용한다. 국내 SF작가들이 "이젠 더 이상 SF를 '공상과학소설'이라고 쓰지 말자고 읍소한 지 한세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니는 회사 임원들이 미래학에 대해 참조할 때마다 '공상과학'이라고 언급하고 아랫사람들 모두 그에 대해 일말의 문제제기도 않고 장표에 그걸 적어 내는 상황이 반복된다. 내가 한국 SF작가들의 저 주장을 언급한다 해도, 아래 사람들은 ‘윗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전히 장표는 수정되지 않는다.
한국어 화자에겐 SF란 '공상과학'이다. 어짜피 SF에 관심 없고 광팔이나 원하는 대중들에게 '공상과학소설'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그 막연한 감성은 찰떡처럼 잘 달라붙어 있다. 21세기하고도 20년이나 더 흘러버린 이 시대에, 우리가 이욘 티히를 읽는 행위는 '과학 소설'이라는 SF의 번역어로 뭔가 부족하다. 왜냐하면 우리 현시대의 SF란 예를 들어 '메타버스 VR'을 즐기기 위해 '임플란트 뇌신경수술'을 받은 개조인간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거니까. 이젠 SF도 오랜 역사를 자랑하므로, 프랑켄슈타인 시절 SF와 스타니스와프 렘 시절 SF의 감성, 그리고 우리의 SF의 감성은 각각 다르다.
나에게 있어서조차 그 번역어의 의미는 다르다. 나에겐 '과학'이란 엄밀하고 통제된 실험 하에서 산출된 결과를 통계적으로 해석하는 '딱딱한' 행위이다. 그래서 '과학'이란 단어는 이욘 티히의 환상적인 로켓 여행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로서는 이 책의 이 자유분방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엔 '과학소설'이라는 단어가 잘 입에 붙지 않는다. 그냥 'SF'라고 퉁치는 게 그나마 마음 편하긴 한데...그러니까, 이 책 정도로 공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SF 작품으로 '공상과학'이라는 단어를 좀 남겨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 상상력을 자극하는 로켓 여행 이야기는 어짜피 이젠 '근미래에 실현될 가능성'도 없고, '다가올 미래를 주도'하지도 않지만, 그 공상적인 모험에 대한 정신만은 우리의 마음을 찌르르하게 찌르고 있으니까.
스타니스와프 렘 컬렉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