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스와프 렘의 『스타니스와프 렘 - 미래학 학회 외』를 읽고
2008년, ‘판타스틱’이라는 잡지에서 렘을 처음 접했다. 눈이 휘둥그래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설이야! 현실세계와는 전혀 접점이 없는 세계에서 로봇이 주인공으로 활동하면서도, 신화적이고도 동화적인 세계관에, 풍자적이고 아이러니하면서도 철학적인 결말이라니!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솔라리스』는 예전에 읽어보았지만 그리 큰 감동을 받지는 않았던 데에 반해, 『판타스틱』에도 실렸던 단편이 포함된 『사이버리아드』는 인생 SF 소설이 되어 버렸다. 그 후 스타니스와프 렘 작품을 더 번역하겠다며 자신만만했던 출판사 오멜라스는 『우주비행사 피륵스』 한 권만 더 출판하고 문을 닫게 되었고, 우리나라는 총 세 권의 한국어 번역본만을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스타니스와프 렘의 『스타니스와프 렘 - 미래학 학회 외』 한국어판 출판을 환영하는 바이다. 뭐 읽어본 주변 지인들의 반응은 ‘어렵고 힘들다’라는, 어느 정도는 예상된 반응이었지만. 나만 좋아하면 뭐 됐지! 그러나 언제나 호불호 갈리는 취향을 가졌다는 건 참 외롭다. 나도 내 SF 인생의 시리우스가 발음하기도 어려운 동구권의 작가가 될 줄은 몰랐다. 더 많은 사람이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다들 나가떨어지는 모양이지만.
이번 번역된 책의 원제는 "환상적인 렘"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제목으로 1957년부터 1971년까지, 렘의 전성기 시절의 단편들을 모아놓은 컴필레이션이다. 스타일이나 문체도 작품마다 매우 다르고 주제의식도 중구난방이지만, 렘은 원체 그런 작가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솔라리스』의 적막하고도 사변적인 문체의 작품과 『사이버리아드』의 풍자적이고 아이러니한 문체의 작품이 한 작가의 머리에서 나왔다. 랜덤 재생을 누르고 음악을 듣는 것처럼 책이 정해준 순서대로 읽는 것도 좋겠지만, 연대기별로 모아서 살펴보는 것도 렘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순서는 공신력 있는 출처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위키피디아에서 한땀한땀 짜깁기한 것이기 때문에 너무 믿지는 말것.)
「스물한 번째 여행」, 「세탁기의 비극」, 「열세 번째 여행」이 포함된 단편집. 이욘 티히라는 우주비행의 여행기를 다룬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스물한 번째 여행」이 좋았다.
문장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쉼표로 연결되는 만연체에다가, 종교철학적인 개념들을 (실제로 옛날에 진지하게 논의된 개념이든, 아니면 렘이 직접 가상으로 만든 허구의 개념이든 상관없이) 뒤죽박죽 뒤섞여서 무차별적으로 난사하는 책을 주인공이 ‘읽는’ 것이 소설의 주요 스토리이다. 재밌게 들리는가? 참을성 있게 읽는 것 쉽지 않을 것이다. 결론은 놀랍다. 과학 기술이 극단적으로 발전한 세계에서 종교의 역할을 묻는데, 진지하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종교의 역설적인 상황을 아이러니한 형태로 돌아보게 한다.
세탁기가 극단적으로 발전해서 인간이 처한 모든 니즈를 전부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나도 이런 생각을 한 적 있는데, 놀랍게도 렘은 1957년에 이미 한 적이 있다. 내 생각이 적어도 60년이 뒤늦은 아이디어라니! 또 다시 렘은 코믹한 아이러니를 우리에게 들이대는데, 어떤 인간이 로봇(이자 행성)이 된다면, 법적으로 이 인간은 로봇인지, 아니면 인간인지, 아니면 행성인지를 묻는 것이다. 결말은? 그 법을 판단고 집행하는 인간들이 사실상 모두 ‘세탁기’였다. ‘인공지능이 법적인 권한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현실적인 질문과도 밀접한 주제로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해 진지해지지 않고 아이러니를 살린 결말이긴 하지만.
「세 명의 전자기사」, 「무르다스왕 이야기」, 「자가 작동 에르그가 창백한얼굴을 물리친 이야기」가 포함된 소설집이다. 기본적으로는 『사이버리아드』와 비슷한 스타일의, 판타지적이고 우화적인 소설들이다. 내가 이런 스타일을 — 『사이버리아드』를 포함해서 — 너무나 좋아한다고 이야기 했었나? 심지어 렘의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솔라리스』를 제치고 말이다.
그러나 굳이 아쉬운 점을 살리자면 「세 명의 전자기사」는 아이러니가 좀 약했고 (아이러니를 명백히 의도란 결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르다스왕 이야기」는 거대해진 왕의 꿈과 현실에 대해 다루는 방식이 좀 난잡한 느낌이 있었다. 「자가 작동 에르그가 창백한얼굴을 물리친 이야기」의 허무한 결말도 시큰둥했다. 『로봇 동화』 1년 후 출간되는 작품인 『사이버리아드』야말로 이런 스타일의 완성형으로 느껴진다.
『사이버리아드』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2008년에 오멜라스에서 번역되어 나온 적이 있다. 『사이버리아드』의 모든 단편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이 뛰어나지만, 특히 이 소설이 기억에 남았던 점은 “고급 수학 용어로 쓰인 사랑과 죽음에 대한 사이버네틱스 시”였다. 시적인 운율에 ‘스칼라 공간’이니 ‘점근선의 0의 일치도 없이’니 하는 단어들을 천연덕스럽게 남발하는 시를 읽으며, 개인적으로 ‘시’라는 문학 분야에 대한 조예는 1도 없는 상태에서도,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어찌 보면 유치한 이공계 개그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유치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고 진짜로 인류가 모두 멸종하고 로봇만이 살아남은 세계에서 로봇들이 향유하는 문학 작품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만 같았다. 문과의 극한과 이과의 극한이 만나면 이런 식 아닐까?
‘창작하는 기계 혹은 인공지능’이라는 주제는 동시대의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과도 연관을 맺는다. 만약에 인공지능의 창작력이 극한에 다다르면, 우리는 정말로 시를 읽고 정신이 혼미해진다던가, 우울해져서 나도 모르게 자살한다든가 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이 순식간에 모든 이야기 구조를 파악해서 가능한 모든 이야기 구조의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를 창조해 낸다면? 무한대의 창작력을 가진 인공지능이란 무서운 존재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창작을 하는 인공지능이 존재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새삼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테르미누스」가 실려 있다. 『우주비행사 피륵스』 이야기는 렘 작품들 중에서도 유독 신비하고도 환상적인 배경이 없는 현실적인 우주비행을 그린 소설이다. (외계인도 안나온다!) 예전에 출판된 책을 읽는 데도 심심한 느낌은 있었다. 아무래도 청소년 타겟으로 쓴 모험물이라서 그런 것 같다. 「테르미누스」 또한 당시 읽을 때도 큰 감명은 받지 못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허무주의적인 결말은 여운이 조금 있었다. 피륵스 이야기 중에서는 「아난케」라는 작품이 개인적으로는 좋긴 했지만 여기엔 실려 있지 않다.
「사이먼 메릴의 “섹스플로전”」, 「앨리스타 웨인라이트의 “존재주식회사”」, 「A. 돈다 교수」, 「아서 도브의 “논 세르위암”」, 「마르셀 코스카의 “로빈슨 연대기”」를 포함하는 소설집. 모든 이야기들이 주인공이 명확하지 않고, 설령 있다 해도 주인공이 어떤 이론이나 인물, 세계관을 묘사하는 방식이 주가 된다. 이중 재밌게 읽었던 것은 「A. 돈다 교수」와 「아서 도브의 “논 세르위암”」 정도였다.
시뮬레이션 속의 인공적인 지능들이 창조주인 신에 대해 토의한다. 그걸 지켜보는 시뮬레이션의 창조자는 윤리에 대해 고민한다. 창조주를 믿지 않는다고 이들을 처벌하는 게 옳은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결국 기독교적인 믿음에 대한 무신론적 비판이다. (여담으로, 이 이야기를 옛날에 읽어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 출판된 히스토리를 찾지 못하겠다.)
(후기: 드디어 찾았다! 대니얼 데닛과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이런, 이게 바로 나야!』라는 절판된 책에 실려 있다.)
초반과 중반이 확연히 달라지는 이야기 구조는 진행 중반까지는 의구심을 가지게 하지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야?) 충격적인 결말이 모든 것을 해소한다. 우리는 미래를 정보통신과 콘텐츠 플랫폼으로 꿈꾸고 있지만, 이쪽 미래는 대안적인 미래로 생화학적인 알약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세계다. 우리는 저출산에 대해 걱정하는 중이지만, 이쪽 미래는 인구폭발을 걱정하는 중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 공산권의 미래에 대한 예상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살짝 엿볼 수 있다. 가장 긴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이 단편집을 읽어야 할 이유를 담고 있는 작품. 딴 거 다 필요없고 이것만 재밌게 읽었다면 스타니스와프 렘이란 작가를 건진 것이니, 고맙다는 말은 넣어둘것.
『솔라리스』와 비슷한 건조하면서도 만연체적인 스타일을 가진 작품으로, 풍자와 아이러니는 거의 없다. 자의식을 가졌지만 자유의지를 가지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암살 로봇이 주인공으로, 초반에 연대기적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누군지,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이런 감정을 가지는지 따져 가는 고뇌하는 주인공의 내면 서술이 훌륭하다. 사실 책 전체적으로 보아도 유독 다른 감성을 지닌 작품이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매우 궁금한데, 가장 대중적인 렘의 작품이 『사이버리아드』가 아닌 『솔라리스』라는 걸 볼 때 의외로 대중에게 먹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 치곤 문체가 너무 이해하기 어렵지?
소련 시절의 동구권 작가라 헐리우드나 영미권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낮설게 느껴지는 감성일 수 있지만, 어쨌든 우리와 교류하지 않았을 지라도 지구의 절반인 그들도 나름대로 별을 보고 우주를 향해 로켓트를 발사해 본 경험이 충만한 사람들이다. 오히려 단절되어 각자도생한 역사 때문에라도 그 감성이 매우 색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이제 전세계는 연결되었고 이런 단절되어 있다 물밀듯이 만나는 색다른 경험 같은 건 외계인을 만날 때나 가능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Lem2021 — Year of the 100th Lem anniversary
스타니스와프 렘 컬렉션